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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엄마가 되어버렸다-8화 (8/221)

8화.

“아가씨, 잠은 좀 주무셨어요?”

이른 아침부터 세숫물을 가지고 졸 린 눈으로 내 방을 찾아온 앤이 기겁하며 물었다.

물론, 못 잤다.

테이블 위에 곱게 올려둔 화관을 꼭 신전의 성물이라도 되는 양 지켜보고 있기를 하루 꼬박.

뻑뻑한 눈이 얼마나 충혈돼 있을지 안 봐도 뻔했다.

“잠이 안 와서…….”

“어휴! 그래도 눈은 좀 붙이셔야죠. 지금 아가씨가 무슨 기분인지는 알겠 지만…….”

앤이 걱정하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어제 아벨에게 역조공을 당한 이후로 좀처럼 진정할 수 없 었다.

덕질 생활을 꽤나 오래 했던 나지만 흔히들 말하는 역조공은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었다.

역조공이 다 뭔가.

아이돌들이 SNS에 조공품 인증을 해주는 경우도 더러 있다 하던데, 내게는 그런 기적이 찾아온 적 없었다.

성덕이란 나와 거리가 먼 단어였다.

미천한 덕후는 그저 지켜보는 것만 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건만, 무려 역 조공을 통한 성덕 세례까지 내려주다 니…….

“앤, 그 작고 통통한 손가락으로 이 걸 만들었다고 생각해봐. 도, 도저 히…….”

몸이 절로 부르르 떨렸다.

쾅,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내려치자 앤이 깜짝 놀랐다.

“끌어안고 뽀뽀라도 해주지 않는 이상은 못 참겠다! 나 언제까지 참아 야하니?”

“조금만 더 참으세요. 공자님과 더 스스럼없이 친해지실 때까지만이라 도요. 아, 참. 오면서 만난 주방 하녀 가 귀띔해줬는데…….”

세숫물올 적셔 내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빗질하며, 앤이 말했다.

“오늘 루버몬트 공작 전하가 아가씨랑 함께 식사하려고 한다 했어요.”

“뭐?”

내 인상은 대번에 구겨졌다.

겨우 생각을 미뤄놓고 있던 하데스 얘기가 나오자 착잡했다.

공사다망한 공작 전하께서는 업무에 정신없어 식당을 찾는 일이 거의 없었다.

사람이라면 밥을 먹기는 해야 할 텐 데 식당에 얼굴 비치는 일이 없어 의 아했던 터라, 한번은 그쪽 하녀에게 물어봤더니 대부분 방이나 집무실에 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운다고 했다.

한참 덕질과 취업 준비를 병행할 때잠도 못 자고 토스트 하나로 배를 채 우던 전생의 기억이 떠올라 아주 조금 하데스가 안쓰러웠지.

사실 아벨을 제외한 공작가 일원들 은 전부 관심도 없고 마주치는 것도 불편했기에, 굳이 하데스의 눈치틀볼 필요가 없는 식사 시간이 퍽 행복 했는데…….

“갑자기 왜 내 얼굴 보고 식사하겠 다는 거지?”

“글쎄요. 뭐, 곧 결혼할 사이니까 같이 시간을 보내려는 게 아닐까요? 공작 전하께서는 소문만큼 무뚝뚝하고 냉정한 분은 아닌 것 같아요.”

무뚝뚝? 냉정? 글쎄…….

하데스와 처음 독대한 이후, 그의 이미지를 이미 반쯤은 재고한 나로서는 동의할 수 없었다.

***

걱정과 달리 하데스와 단둘이서 하는 식사는 무난했다.

남부 음식에 길들여진 내 입맛에 공작성의 메뉴들은 여전히 안 맞았지만, 잘생긴 하데스를 마주 보고 있으 려니 눈은 즐거 웠다.

하데스의 생김새는 보면 볼수록 놀라웠다.

내가 소설을 읽으면서 상상해왔던 아벨의 모습 그대로였다.

북부의 차가운 공작 전하.

추운 영지의 날씨와 냉기 폴폴 날리는 성격이 꼭 비슷해 보이지만, '인재 와 마법사의 나라'라는 이곳 크레센타 제국에서 화(火)속성을 다루는 가 장 강한 가문의 수장이라는 괴리는 가히 매력적이었다.

꾸준히 등장했더라면 아벨만큼이나 그도 덕질했을 거라고 장담…….

“한시도 눈을 못 떼겠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어서 식사를 하는 게 어떻 겠나? 영애.”

……아니다. 방금 한 생각 취소.

자의식 과잉 환자라는 치명적인 단 점이 있는 캐릭터를 내가 덕질할 리 없어.

“미안해요. 신경 쓰이셨나 봐요. 조 용히 식사할게요.”

“아니, 사과는 됐어. 얼굴은 닳는 게 아니니 얼마든지 봐도 좋지만, 영애가 식사에 집중하지 못하는 건 걱 정이 되는군. 거, 매일 끼니는 거르지 않고 챙기는 건가? 지금까지 많은 귀 족 여인들을 봤지만, 영애만큼 마른 사람은 본 적 없는 것 같아.”

“그 정도인가요? 먹는 걸 좋아해서 식사를 거르진 않아요. 그냥 이 몸이 살이 잘 오르지 않는 체질인가 봐요.”

“나쁘군.”

동의한다. 병자처럼 창백한 피부와 마른 몸 때문에 가끔씩 거울 볼 때면 나 자신이 안쓰러워질 지경이니까.

하데스는 아주 기품 있게 접시 위로 한참 칼질을 하다가 말했다.

“오늘 저녁쯤 가스펠 백작부인이 오기로 되어있어. 아마 저녁 식사를 같이 하게 될 것 같은데…… 괜찮은 가?”

하데스는 답지 않게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어울리지 않는 그의 모습에 잠시 멍 해 있다가, 나는 가스펠 백작부인이 누구인지를 기억해냈다.

루버몬트의 가신인 가스펠 백작은 작중에서 꽤나 많이 등장하는 캐릭터였다.

물론, 하데스의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누나 가스펠 백작부인도 그러했다.

하데스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루버몬트의 후계자 자리에 떡하니 앉은 아벨이 그들 눈에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사사건건 그를 구박해댔다.

등장할 때마다 내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던 이들이지만, 마냥 악역이라 고 생각해야 하는지는 조금 애매했다.

아벨은 구박받으면서도 절대 백작내외를 원망하지 않았고, 종국에 그 들은 성장한 아벨에게 마음을 열고 조력자가 되어주니까.

다만 그렇게 되기까지 과정이 꽤나 험난하다는 게 문젠데…….

“아, 가스펠 백작부인은 내…….”

“누님이시죠.”

무심코 대답했더니 하데스가 가만 히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다 픽 웃었다.

“그래. 나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을 테니, 특별히 더 설명할 건 없겠 군.”

아니, 그걸 또 그런 식으로 받아들 여버리시면…….

“결혼 전에 영애를 만나보고 싶은 생각인 듯하니,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렇죠.”

나는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 꾸했다.

꼬장꼬장한 성격의 가스펠 백작부인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데스와 아벨, 루버몬트 공작가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그녀가 갑 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올케를 궁금해할 것은 자명했다.

갑자기 분위기 시월드다. 느낌이 싸 했다.

“식사를 마치고는 정원을 좀 구경하지 않겠나? 아벨에게 들으니, 꽃을 퍽 좋아한다고 하던데. 북부에서는 따로 관리하는 온실에서 말고는 꽃을 구경하기 힘들지.”

가스펠 백작부인이 방문한다는 전 언에 혼란스러웠던 것도 잠시, 뜬금없는 하데스의 산책 신청에 나는 어 리등절했다.

“……정원이요?”

***

공작성에 있는 온실 정원은, 그 거대한 규모에 비해 딱히 볼 게 많진 않았다.

사시사철 겨울 날씨인 북부에서 인공적으로만이든 온실은 원래 약초들을 자급하는 용도였는데, 겸사겸사 남부 에서나 볼 수 있는 꽃, 수목들을 심어 미관을 가꾸기도 했다.

왜인지 바빠 보이는 정원사들이 곳곳에서 꽃을 옮겨 심고 관상목들을 다듬고 있었다.

“어제 영애가 상냥하게 대해줘서 그런지, 아벨의 기분이 좋아 보였 지.”

“어머, 정말요?”

아벨 이야기에 나는 본능적으로 훙 분했다.

“그 점은 고맙군. 아닌 척해도 아벨의 존재가 염려스러울 것이 뻔한데, 티 내지 않아주어서 조금 놀랐어.”

“염려스럽다니요? 그런 걱정 마세요. 공자님은 아주 귀엽고 사랑스러 워요. 어제 얼마나 즐거웠는지 몰라요. 그리고 전하, 실례가 안 된다면 말예요, 친해질 시간이 필요하니 앞 으로도 가끔…… 산책을 함께 했으면 좋겠는데…….”

“좋아. 바빠도 그대에게는 시간을 낼 수 있게 노력해보지.”

“아뇨, 아벨 공자님이랑요.”

“아.”

하데스는 멍하니 탄성을 내뱉고는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걸 굳이 나한테 허락받을 필요는 없지. 아마 아벨도 좋아할 거야. 영애가 굉장히 마음에 든 모양이 니…….”

“으으,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고요. 그런데 전하, 잠 못 주무셨어요?”

문득 가까이서 본 하데스의 얼굴이 퀭해 보여 물었다.

그는 흠칫 놀라더니 살짝 고개를 뼤 곤 나를 의심스러운 얼굴로 쳐다봤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마치, 제 침실에 스파이라도 심어두 고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받는 스토킹이라도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눈치다.

절로 한숨이 났다.

내가 좋다고 따라다닌 게 자기가 아니라 자기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면, 하데스 성격에 부끄러움으로 수치사 할 것이 분명하다.

해명은 영원히 묻어두기로 하자.

아벨의 아버지를 수치사로 죽게 하는 것보다야 그냥 내가 오해받고 마는 게 낫다.

“눈가가 좀 어두워요. 얼굴색도 전 체적으로 피곤해 보이고. 여기, 머리 도 까졌어요.”

오른쪽에 삐죽 튀어나온 머리카락한 가닥을 가리키며 말하자, 하데스 가 황급히 손을 올려 머리를 매만졌다.

바보처럼 애먼 데만 정리하니 삐죽 튀어나온 머리카락 한 가닥은 여전했다. 의외의 빈틈이라 조금 웃겼다.

입을 막고 쿡쿡 웃고 있으려니 하데스는 조금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빰을 붉힌 게 어제의 아벨과 꼭 닮아 있었다.

“……됐나?”

“아뇨. 잠깐…….”

나는 까치발을 들어 하데스의 머리위로 손을 뻗었다.

흠칫하던 하데스가 반사적으로 살 짝 고개를 숙여 높이를 맞춰주었기에, 나는 수월하게 그의 뻗친 머리를 정리해줄 수 있었다.

“이제 됐…….”

별생각 없이 손을 떼어내려는데, 예 상보다 하데스의 얼굴이 꽤나 가까이 와 있었다.

‘와, 정말 내가 상상했던 소설 속 아벨의 얼굴 그대로인데.’

내 감상은 그것이었다.

어쩐지 조금은 당황한 듯 커진 눈하며 어색해하는 표정이 꼭, 여주인공 과 처음 만나 설레어하던 아벨의 표 정 묘사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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