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아가씨!”
아벨의 손이 닿기 전에 앤이 재빨리 부축해주어, 나는 그의 앞에서 나자 빠지는 추태는 면할 수 있었다.
“여, 영애. 괜찮으세요?”
걱정스러워하는 아벨에게 겨우 고 개를 끄덕여주면서도, 내 시선은 바닥에 내팽개쳐진 화관에서 떨어질 줄몰랐다.
저게 뭐야, 대체?
무려 아벨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에게 주기 위해 ‘손수’ 만든 역조공 품이 맞아?
아직 덜 자란 저 작고 통통한 손으 로?
“아…….”
“여, 영애!”
머리가 다시 어지러워 몸이 또 한 번 휘청거렸다.
종이인형처럼 굴고 싶진 않지만, 한번 죽었다 살아난 아이샤 에스클리프의 몸은 전생의 나와 달리 외부적인 충격은 물론 정신적인 타격에도 매우 취약했다.
역시 미인이라는 장점 빼곤 실로 하 둥 쓸데가 없는 개복치 같은 몸이었다.
덕질에도 체력이 필요한 법인데 이 건 뭐…….
아무튼, 내 연약한 몸에 성질 낼 겨를 따윈 없었다.
지금 당장 죽더라도 나는 저 화관을 집어 머리에 뒤집어쓴 채 관 속에 들 어가리라.
“여, 역시…… 영애에게는 너무 안 어울리는 초라한 선물이 었죠?”
땅에 떨어진 화관을 집요하게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아벨이 부 끄러워하며 말했다.
“조금, 조금 더 괜찮은 선물을 생각 해 볼게요. 이건…….”
“안돼!”
냉큼 화관을 주워 달아나려던 아벨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영애?”
“전.”
혹시나 오해한 아벨이 첫 만남 때처럼 삽시간에 튀기라도 할까 걱정이 된 나는, 냉큼 그가 주운 화관을 빼앗 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꽃을 정말…… 좋아해요.”
오, 사실 꽃이 아니라 아벨, 네가 주는 거라면 그게 한 달 묵힌 음식물 쓰레기라도 기쁘게 씹어 삼킬 거란다.
차마 그런 스토커 같은 발언은 하지 못하고 꾹 입을 다물고 있는데, 아벨이 웃었다.
“저, 정말요?”
“네.”
“다행이에요. 전…… 영애가 혹시 나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면 어쩌 나 걱정이 돼서…….”
“제가요? 공자님, 저는 공자님 이 주는 거라면…….”
“아가씨.”
자꾸만 오해하는 아벨 앞에서 나도 모르게 나불거리던 주둥이는, 다행히 도 앤이 막아주었다.
내 똑똑하고 눈치 빠른 친구 앤은 황급히 눈을 맞추며 입 모양으로 말 했다.
‘일. 코.’
맞다, 일코.
아벨이 너무 좋아 공중제비 다섯 번 은 돌 수 있을 듯한 마음으로도 나는 내면을 고요히 진정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대놓고 아벨에게 호감을 드러내는 건, 아직 시기상조였으므로.
긴 심호흡과 함께 마음을 진정시킨 뒤, 제멋대로 움직이려는 얼굴 근육을 억지로 붙잡곤 말했다.
“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 잘 간직할게요.”
“아! 감사합니다, 영애!”
아벨은 붉은 눈을 잔뜩 휘며 크게 웃었다.
그 모습에 나는 멍하니 시선을 빼앗 기고야 말았다.
대체 아벨은 무엇이 저렇게 기쁜 걸 까?
설마, 내가 자기가 만들어준 화관이 마음에 든다고 말해준 것이? 고맙다 고 해준 게? 받아준 게?
“저, 저, 저…… 영애!”
“……네.”
아벨은 빨갛게 달아오른 빰으로 한참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씌, 씌워드려 도…….”
뭘? 설마 이 화관을? 역조공도 모 자라 이 미천한 덕후에게 은혜로운 세례까지 내 려준다는 건가?
당황해 딱딱하게 굳어버린 나 대신, 앤이 끼어들었다.
“그럼요, 공자님! 자, 얼른!”
앤은 덜덜 떨고 있는 내 손에서 화 관을 빼앗아 아벨에게 넘겨주었다.
얼떨떨한 마음으로 살짝 무릎을 굽 히니 아벨과는 금세 눈높이가 맞았다.
아벨은 머뭇거리다가, 내 머리 위에 아주 조심스럽게 화관을 얹었다.
“와…….”
작은 탄성과 함께, 나를 가만히 바 라보던 아벨이 배시시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나는 그 은혜로운 미소에 정신을 쏙 빼앗긴 채로 그저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너, 너무 예뻐요. 꼭 요정님 같아요.”
혼미해진 정신에 쐐기를 박는 그 로 맨틱한 칭찬에.
“어머, 아가씨!”
“여, 영애……!”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 앉고 말았다.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실로 완 벽한 성덕으로 거듭난 순간이었다.
***
그 시각, 하데스는 새벽같이 찾아온 가신, 대부호 가스펠 백작과 마주 앉아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대 루버몬트 공작 가문의 혼인 문제를 이렇게 독단적으로 결정하시다 니요?”
중북부의 큰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 가스펠 백작은 루버몬트의 제일 가신으로, 하데스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친누이 애거사 가스펠이 그의 아내였다.
가스펠 백작은 어린 나이에 공작이 된 하데스의 행보에 사사건건 어깃장을 놓는 사내였다.
몇 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아 하데스는 가스펠이라는 가문 이름만 들 어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였지만, 마 냥 백작을 무시할 수만은 없는 이유 가 있었다.
딱히 장녀의 시가가 아니었더라도 가스펠 백작 가문은 벌써 몇 대째 루버몬트의 가신 가문으로 충성해 왔다.
하여 여러 가신들 중에서도 가스펠백작, 메이슨이 루버몬트에서 가지는 입지는 클 수밖에 없었다.
하데스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결혼을 안 하면 안 한다고 문제, 하면 한다고 문제. 대체 나더러 어쩌 라는 거지?”
“전하께서는 정말 뭐가 문제인지 모르시는 겁니까?”
“뭐가 문젠데?”
“루버몬트의 격에 맞는 몇몇 가문을 골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고집은 그만 부리시고, 그 사생아에게 후계위를 내리겠다는 말도 안 되는 공표나 철회하시지요.”
“백작.”
하데스의 눈이 서늘해졌다.
“아벨의 일은 번복할 생각 없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그럼 정말로 전하께서는, 어디 이 름도 없는 한미한 귀족 가문과 연을 맺고, 무슨 피가 섞였는지도 모를 사 생아들 세워 루버몬트의 이름을 더럽 히실 생각이었습니까? 저는 그저 전하께서 젊은 날의 패기로 잠시 방황하고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난 언제나 진지했지. 백작이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을 뿐.”
무심하게 중얼거리는 하데스는 단 호했고, 대화가 통할 것 같지 않았다.
메이슨은 노기를 가라앉히고 말했다.
“내일쯤 아내가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 말에, 하데스의 얼굴이 구긴 종 잇장처럼 찌푸려졌다.
“후계위 계승을 준비해야 하지 않 겠습니까? 일전부터 논의해 왔던 공자의 교육을 슬슬 시작해야지요. 전 부터 제 아내가 맡기로 한 사항이었으니…….”
가스펠 백작부인, 하데스와 스무 살 터울이 지는 친누이 애거사는 고고하 고 전형적인 귀족이었다.
전대 루버몬트 공작부인이 하데스를 낳고 머잖아 절명했으므로, 그는 거의 친누이 애거사에게 아들처럼 길 러졌다.
손이 귀한 루버몬트 공작가에서 하데스가 태어나기 전까지 철저히 후계 자로 교육받았던 애거사는 친가를 향 한 애정과 집착이 대단했다.
하데스가 공작위를 계승하고도 여전히 자유롭지만은 않은 가장 큰 이유였다.
다시 말하자면, 애거사 가스펠 백작 부인은 무서울 것 하나 없는 하데스 루비몬트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전하께서 사랑해 마지않아 가신들 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혼인을 추진하셨다는 그 에스클리프 남작 영애도 마침 공작령에 머물고 있으니, 시기 가 딱 좋군요. 제 아내도 궁금해할 겁 니다. 거의 아들처럼 기른 전하의 평 생 배필을 직접 한번 봐야지요.”
하데스의 약점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메이슨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뱀 같은 메이슨을 마주하고 하데스 가 이를 갈고 있는 사이, 벌컥 문이 열렸다.
두 남자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벨이 었다.
이번에도 손님이 있었다는 사실을, 게다가 그 손님이 만날 때마다 서늘 하고 매서운 시선을 보내 자길 꼼짝 못하게 만드는 가스펠 백작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아벨은 땡 얼어붙고 말 았다.
차갑게 아벨을 한번 스치듯이 본 메이슨이 몸을 일으켰다.
“내일 또 뵙겠습니다, 전하.”
메이슨이 허리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하데스 모르게 이것저것 메이슨의 눈치를 봐 와야만 했던 아벨은 그에게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사색 이 되어 벌벌 떨었다.
메이슨이 아벨을 지나치며 그만 들을 수 있는 조용한 목소리로 옮조렸다.
“예의 없고 멍청하기는.”
탁.
아벨의 등 뒤로 방문 닫히는 소리가 차가웠다.
“아벨.”
선명한 악의에 순간적으로 눈가가 시려왔던 아벨은, 하데스의 다정한 목소리에 아닌 척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버지, 제가 또 실수했어요. 아버지의 방에 불쑥 들어오는 게 너무 익 숙해졌던 모양이에요……. 앞으로는 정말 조심하겠습니다.”
“음……. 그래, 새로 하나 배운 건 좋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시간 맞춰잘 와줬다. 저 늙은이랑 몇 분 더 말을 섞었다간 수명이 십 년은 줄 뻔했 어.”
피곤한 듯 미간을 문지르며 다가온 하데스가, 힘없이 웃고는 아벨을 번 쩍 안아들었다.
“에스클리프 영애에게 다녀왔나?”
“아, 네!”
시무룩했던 아벨의 표정에 금세 화 색이 돌았다.
생각보다 훨씬 밝은 표정에 하데스 가 놀랐다.
“네 선물을 마음에 들어 했어?”
“엄청요! 엄청, 엄청!”
의외였다.
아이샤도 그 나이대 귀족 영애들처럼 남들에게는 숫기 없고 도도하게 굴 거라 생각했는데.
“다행이군. 무슨 선물을 했지? 꽃다 발이라도 줬나?”
“영애께 어울릴 것 같아서, 화관을 만들었어요. 처음 만들어 봐서 정말 볼품없었는데, 영애가 무척 좋아하시는 거 있죠?”
“……그래?”
“네! 영애랑, 앤이랑, 아! 앤은 영애와 에스클리프에서 함께 온 하녀예요. 앤도 영애만큼이나 상냥했어요. 같이 산책을 했는데…….”
“뭐? 둘이 산책을 했다고?!”
“아뇨, 아뇨. 앤이랑 셋이요.”
“어어, 그래.”
“여기에 오신 이후로 영애는 앤이랑 꼭 낮에 별채 쪽을 산책하시는 걸요. 모르셨어요, 아버지?”
“어어…….”
너는 어떻게 알았냐?!
……물으려다 말고, 하데스는 계속조잘거 리는 아벨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벨과 아이샤는 제법 친해진 모양이었다.
만나서 결혼 문제만 논했을 뿐 딱히 교류가 없던 자신보다도, 아벨이랑 훨씬 더.
하데스는 괜히 멋쩍어지는 마음에 아벨의 말에 그저 끄덕끄덕 고개를 기울일 뿐이었다.
“산책하는 동안 영애가 ‘정말 좋다. ’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하셨는지 몰 라요. 그래서 저도 정말 좋았어요.”
“뭐가 좋았다는 건데?”
“음……. 꽃이겠죠? 제가 씌워드린 화관을 일 분에 한번씩 만지셨거든요. 전 영애가 그렇게 좋아하실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제가 서운해할까 봐 그냥 좋은 척하시는 게 아닐까, 했 는데…….”
아벨은 붉어진 뺨으로 아이샤를 떠 올리며, 부끄러운 듯 하데스의 목을 끌어안고 얼굴을 비비적댔다.
그녀는 같이 산책하는 내내 상기된 얼굴로, 머리 위에 얹힌 화관을 애지 중지했었다.
힘들게 꽃을 꺾어 엮은 보람 있었다.
아벨은 행복하게 중얼거 렸다.
“꽃을…… 진짜 좋아하시는 것 같 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