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하데스가 한참 손수건을 들고 황당 한 듯 웃고 있는 사이 아벨이 도착했다.
금세 표정을 갈무리한 하데스가 서 랍 속에 손수건을 집어넣고 일어났다.
그는 아벨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 은 척했다. 일견 딱딱하게 굳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표정에 아벨은 걱 정스러웠다.
“저……. 아버지, 부르셨어요?”
“그래. 무슨 일로 날 찾아왔던 거 냐?”
혼날 거라고는 예상하고 왔었다. 꺼 내놓으려던 말이 있었지만 아벨은 겁먹은 채로 떨기만 했다.
“아벨?”
“무,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해요. 그 렇게 방에 불쑥 들어가는 게 아니었 는데…….”
우물쭈물 머리를 숙이는 아벨을 보며 하데스는 멍해졌다.
생각해보니, 찾아왔던 아벨을 무섭 게 꾸짖었다.
매번 아벨에게만은 방이나 집무실에 편하게 찾아오라고 했던 하데스다. 따지고 보면 아벨에겐 아무 잘못 도 없었다.
놀랐는지 휘청거리기까지 하는 아이샤를 보고 당황한 나머지 언성을 높이긴 했지만…….
하데스가 곧바로 달래듯 말했다.
“영애가 놀란 것 같아서, 내가 순간 너를 조금 엄하게 꾸짖었던 모양이 야. 놀랐다면 미안하다.”
잔뜩 주눅 든 아벨을 향해 다가간 하데스가 눈높이를 맞추고 앉았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퍽 다 정해 아벨은 겨우 마음을 놓았다.
으레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던 루버몬트 공작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 기에, 부자의 모습을 본다면 많은 이 들이 놀랄 것이었다.
하나 아벨은 익숙했다. 무섭고 냉정 한 사람이라는 하데스는 자신에게만 은 누구보다 좋은 아버지였기에.
겨우 한숨 돌린 아벨이 말했다.
“실은요. 하녀들이 말하는 걸 들었 어요. 아버지가 에스클리프 영애와 결혼하기로 결정하셨다고 해서…… 축하해드리려고 갔던 건데…….”
“아, 소문이 빠르군. 그래, 네게도 금방 알릴 생각이었다. 에스클리프 영애와는 최대한 빨리 결혼식을 준비할 생각이야. 아마 네게도 나쁘지 않 은 결정일 거다. 아버지만 있는 것보 다는…….”
“저……. 영애께서 저를 마음에 들 어 하실까요?”
아벨은 금세 시무룩해져 물었다. 동시에 말끝을 흐리던 하데스 또한 걱 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자신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일 년을 넘게 졸졸 따라다녔던 아이샤다.
처음 반하게 된 계기는 모르니, 자신을 마음에 둔 건 그보다도 훨씬 오 래되었을 테다.
눈길 한번 받지도 못했건만 참으로 절절하고 한결같은 마음이 아닌가.
충동적으로 결혼을 결정한 데에는 그러한 아이샤의 진실한 마음이 엿보 여서, 라는 이유도 있었다.
작위나 재산 같은 배경이 전부 없어지더라도 여전히 자신을 좋아해줄 만한 여자라면, 아벨을 받아들여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 년을 지켜본 결과 아이샤는 예상 대로 음험한 의도 없이 그저 순수하 게 자신을 좋아할 뿐이었고, 그 때문에 하데스는 제 충동적인 청혼을 전 혀 후회하지 않았다.
공작가의 안주인 따위 딱히 필요하 다는 생각도 안 했으나, 굳이 누군가 가 그 자리를 채워야 한다면 아이샤 가 좋을 듯했다.
비어있던 공작부인의 자리가 메워지고 가신들의 잔소리로부터 자유로 워질 수 있다면 그도 좋은 일이었고.
“……글쎄다.”
하지만 역시 아벨이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여자가 남편의 사생아를 진심으로 사랑해줄 수 있을 텐가.
결혼 이후에 불륜을 저질러 만든 아이도 아니었고 사실은 제 친자식도 아니었지만, 아이샤가 그것까지 가늠해가며 아벨을 너그럽게 보아줄지는 모를 일이었다.
하여 하데스는 걱정이 많아 보이는 아벨에게도 괜찮을 것이다, 라고 확 언해줄 수가 없었다.
하데스의 애매한 대꾸에 아벨의 낯 빛이 어두워졌다.
“아직 잘은 모르지만, 에스클리프 영애는 나쁜 사람은 아니다. 아마 친 해지고 나면, 나만큼이나 널 아껴줄 지도 모르고. 물론 너도 노력해야겠 지.”
“네에…….”
“넌 어땠지? 혹 영애가 마음에 안 든다거나…….”
“제, 제가요? 아니요, 아뇨. 제가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요? 그런 말씀 마세요. 영애께서 알 면…… 기분 나빠하실지도 몰라요.”
아벨이 사색이 된 채 손을 내저었다.
문득 아벨은 아이샤의 얼굴을 떠올 렸다.
처음 공작령에 왔을 때 먼발치에서 보면서도 느꼈지만, 그녀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아버지 하데스를 여기저기 따라다 니며 제법 많은 귀족들의 얼굴을 눈에 익힌 아벨이지만, 아이샤만 한 미인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서 보니, 청은빛 머리 색과 꼭 같은 눈동자마저도 신기하고 아름다워 자꾸 눈이 갔다.
어딘가 아파 보일 정도로 창백한 환피부는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그마저 도 설산의 요정 여왕님 같았다.
만약 하데스와 결혼한다면 어머니 라고 불러야 할 사람이었으므로, 아벨은 무조건 아이샤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첫 단추부터 잘못 꿴 것이 아닐까…….
자신이 가까이 다가갔을 때, 아이샤의 표정은 정말로 안좋았다.
잔뜩 찌푸린 얼굴하며, 불쾌한 듯손으로 입을 가리던 모습까지 떠올려 낸 아벨은 저도 모르게 푹 한숨을 내 질렀다.
아벨은 어 렸지만 충분히 철이 들었 기에 알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가 많은 사람들에게 얼 마나 눈엣가시처럼 보일지.
아버지, 하데스에게 자신은 짐과도 같은 존재였다.
사생아라고 알려진 자신 때문에 하데스가 적당한 혼처도 구하지 못한다는 걸 아벨은 알고 있었다.
그런 하데스가 겨우 신부를 맞게 되 었다니 축하해야 할 일이다.
아이샤의 눈에 자신이 아니꼬워 보 일 수밖에 없겠지만,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폐 끼치는 아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 라도…….
생각을 마친 아벨은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아버지, 저 열심히 할게요. 영애에게 잘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할 거예요.”
가만히 아벨을 지켜보던 하데스가 피식 웃으며 그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너무 애쓸 필요는 없다. 너는 그대 로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아이 니까. 아마 내가 에스클리프 영애를 잘못 보지 않았다면, 굳이 네가 뭔가를 하려 하지 않아도 널 예쁘게 봐줄 거다.”
“그,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볼 거예요! 저…… 아버지, 그래서말인데……. 혹시 온실 정원에 있는 꽃을 열 송이만 꺾어도 될까요?”
머뭇거리던 아벨이, 혹시나 거절당 할까 걱정되었는지 서둘러 덧붙였다.
“어……. 아버지가 정원을 아끼시는 건 알지만요. 꽃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서 꺾을게요. 영애에게 귀한 선물을 받았으니까, 꼬옥 보답하고 싶어서 그러는데……. 안 되나요?”
우물쭈물 뺨을 붉히는 아벨을 가만 히 응시하던 하데스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아들은 정말이지, 예뻐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하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하지. 정원에 꽃을 심은 건 너를 위해서였으니까. 전부 네 것인데 무엇이 아까울까.”
빙긋 웃는 하데스에 아벨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아이샤에게 어울리는 예쁜 화관을 만들어 선물할 생각이었다.
***
내가 행복한 성덕으로 자리매김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줬던 ‘그 사 건’은, 하데스의 집무실을 찾아간 이 튿날에 일어났다.
그날도 나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앤 과 함께 산책을 하고 있었다.
내가 살던 남작령은 소똥 냄새 폴폴 나긴 했어도 날씨와 경치가 좋아서, 하루에 한번씩 빼놓지 않고 산책하는 게 습관이 돼 있었다.
그 습관이 북부에 왔다고 달라지진 않았다.
식후에는 옷을 단단히 챙겨 입고 나서 앤과 이삼십 분쯤 수다를 떨며 별 채 뒤편을 거닐었다.
물론 우리 대화 소재의 팔 할은 아벨의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이었다.
“전보다 자수 놓는 실력이 더 떨어 진 기분이야. 이전에 놓은 것이 훨씬 예쁘게 잘…….”
“헉, 아가씨!”
“응?”
갑자기 멈춰선 앤이 놀라 숨을 들이 켜며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앤의 요상스러운 시선은 왜인지 내 어깨 너머로 향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아…….”
“에, 에스클리프 영애! 안녕하세요. 산책…… 중이셨나요?”
그곳에는, 그래, 아벨이 있었다.
아니, 아벨인지 아벨을 향한 내 열 망이 만들어낸 신기루인지 헷갈리는 바람에 나는 옆에 선 앤을 돌아보았다.
앤은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제가 더 벅찬 눈으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신이시여, 지금 날 보고 있다면 정 답을 알려줘.
내 눈앞에 있는 게 정말 아벨이라 고?
심지어 이번에는 방해꾼인 하데스 도 보이지 않는다. 외톨이인 아벨인 지라 곁에 따르는 시종들 하나 없었다.
고요한 산책로에는 나와 아벨, 그리고 앤뿐이었다.
꿀꺽, 긴장 때문에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또 첫 만남 때처럼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가까스로 눈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네.”
산책 중이었어요. 우리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벨은? 식사는 했나요? 디 저트는 먹었고?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온갖 주책없는 질문들을 삼키며 나는 겨우 일 코를 시전했다.
아벨이 쭈뼛쭈뼛 가까이 걸어왔다.
“저어……. 첫 만남에 제가 무례했 던 걸, 사과드리고 싶어서요. 그때는 너무 당황해서……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던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영애.”
“네? 아니…….”
“제, 제가 영애의 마음에 들지 않으 시리라는 것은 알아요. 그렇지만 절 대 영애께 폐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 겠습니다.”
네? 뭐라고요? 이 무슨…….
“저,공자님. 저는…….”
“이거! 이건…… 어어, 영애께서 보 내주신 선물에 부족하지만 보답을 하 고 싶어서…….”
아벨은 내게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후다닥 말을 뱉어냈다.
그는 눈을 꼭 감은 채 뒤에 숨겨뒀 던 무언가를 불쑥 꺼내 내밀었다.
어쩐지 뒷짐 진 손이 부자연스러워 보이더라니.
“아…….”
아벨이 내게 건넨 건, 건넨 건…….
그러니까 도대체 이 사시사철 겨울 인 북부에서 어떻게 찾아냈는지 모를 하늘색 봄꽃으로 얼기설기 엮은 화관이었다.
화관.
그래, 화관…….
선물.
조공품.
이것이 그…… 말로만 듣던…….
‘역조공?!’
세상에나.
“여, 영애가 주신 선물에 비하면 엄 청 초, 초라하지만……. 아!”
어김없이 충격 받은 내 유리 몸은 휘청, 기울었다.
놀란 아벨이 반사적으로 들고 있던 화관을 내던지곤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