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방으로 돌아온 나는 짐승처럼 포효했다.
부드러운 실크 베개가 흥분한 내 손에서 이리저리 이지러지는 걸 보며 앤은 경악했다.
조신한 귀족 영애처럼 굴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힘들 었다.
아벨을 직접 만나고 온 후유증이 너무나도 컸으므로.
“그렇게 좋으세요?”
내 손에서 베개를 낚아채가며 앤이 큭큭 웃었다.
“네가 그 귀여운 모습을 봤어야 했 어. 세상에나, 뺨은 이만큼이나 토실 토실해가지고 입술도 꼼지락대는 데…….”
“한참 귀여울 때죠. 열 살치고는 조금 덜 자란 것 같더라고요.”
“그러니까! 한창 때니 이것저것 잘 먹어야 하는데, 북부 음식은 영 맛대가리가 없어.”
“그나저나 결혼은 절대 아닌 것 같 다더니, 그렇게 단숨에 마음이 바뀌 셨어요?”
홍분한 내가 이곳저곳 어질러놓은 흔적을 치우며 앤이 물었다.
사실 나조차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었다.
분명 하데스의 자의식 과잉을 지적해준 뒤에 결혼은 없던 일로 하자고 말하고 올 참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몸이 달아 그의 일하는 곳까지 찾아 간 셈이 되었다.
민망한 노릇이었지만 찬찬히 곱씹 어보니 그렇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루버몬트 공작부인이 되면 아벨의 양어머니로서 합법적이고 수월한 덕질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문제는 루버몬트 공작, 하데스였는 데 그것도 딱히 걱정할 건 없었다.
음…….
안타까운 일이지만 하데스에게 약속된 시간은 일 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는 곧 아벨을 대신해 죽을 운명이 었다.
“흐음…….”
아벨과 여주를 제외한 다른 등장인 물들에게는 썩 특별한 애정이 없던 나지만, 직접 하데스의 얼굴을 마주하고 생각해 보니 그가 안타깝게 느 껴지기는 했다.
하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하데스가 아벨을 위해 희생하지 않으면 이야기는 진행되지 않으니까.
때는 아벨의 열한 살 생일.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던 힘이 폭주해버린 아벨은 꼼짝없이 그 가누지 못하는 미지의 힘에 먹혀 생사의 기로에 놓인다.
만약 하데스가 그의 폭주한 힘을 흡수해 대신 죽어주지 않았다면, 소설 〈페르소나〉에 남주는 없었겠지.
자신을 대신해 죽고 만 양아버지의 희생을 기점으로 아벨은 쑥쑥 성장한다.
지금과는 달리 조금 차갑고 무뚝뚝 해질 테지만 그마저도 아벨의 매력이 었다.
아무튼 소설 내용을 알고 있는 나라 도 하데스를 살릴 재주는 없었다.
미지의 누군가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면 미리 도와줄 수도 있겠으 나, 아벨의 안에서 폭주하는 힘을 어 찌 막을 방도는 없었으므로.
“만약 결혼한 이후에 루버몬트 공작이 죽기라도 하면 말이야.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네?”
앤은 질색했다. 하는 생각이 뻔해 보였다.
결혼은 싫고 아벨은 가까이서 보고 싶기로서니, 루버몬트 공작을 암살할 준비라도 하는 건가 하고 망상을 펼 치는 듯했다.
“아냐, 됐다.”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앤의 망상을 흩뜨려주었다.
안타까워도 하데스는 곧 죽을 운명이니, 나는 공작부인으로 대신 이곳에 남아 그럭저럭 괜찮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아벨을 덕질하며 가끔씩 그의 엄마 노릇도 해주다가, 몇 년 후에는 예쁘 고 착하며 능력도 좋은 여주를 며느 리로 맞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있을지도 모른다가 뭐야. 하데스와 결혼하고 나면 아벨이 내 아들이고 공작가가 내 집인 것을.
“꽤 괜찮은데……?”
흐뭇한 얼굴로 턱을 문지르고 앉아 있자 앤의 표정이 더 하얗게 질려갔다.
내가 정말 공작 암살 계획이라도 세 울까 봐 무서운 모양이 었다.
아니, 굳이 그런 수작 부리지 않아 도 하데스는 곧 죽을 운명이라니까.
다만 걱정스러운 건 결혼 이후 하데스가 죽기 전까지, 나는 아벨의 엄마 역할뿐 아니라 그의 아내 역할까지 해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걱정도 잠시, 나는 초연해졌다.
이미 직접 찾아가서 좋은 아내가 되 겠다느니 어쩐다느니 황당한 소리나 늘어놓은 마당에, 하데스가 좋아 루버몬트 공작가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 다는 누명을 벗을 의지 따윈 없어진 지 오래였다.
그래, 그냥 북부의 차가운 공작 전하가 너무 좋아 오랫동안 먼발치에서 애달파하며 짝사랑을 해왔던 걸로 치 자.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는가?
무려 열 살가량 차이 나는 어린 아벨이 좋아 따라다녔다는 진실보다는, 그의 아버지 쪽이 마음에 들었다는 거짓이 알려지는 편이 나 또한 마음 편했다.
“아, 맞다! 내 손수건! 손수건 가져와라, 앤. 얼른 자수 놓던 걸마저 완 성해서 아벨에게 선물해야겠어.”
조공품을 인증해주던 아벨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흥분했다.
사실 정성이 들어간 선물을 하나 하 고 싶어서. 전생에서도 손에 잡아본 적 없는 바느질을 하느라 애 먹는 중이었다.
원래는 여기 도착하기 전에 완성해 서 아벨에게 선물할 생각이었지만, 재능이 없어 그런지 영 속도가 나지 않아서…….
“공자님 얼굴 자수 놓던 손수건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거 저한테 맡겨 두신 적 없잖아요? 제가 따로 챙겨놓 겠다고 할 때마다 직접 갖고 계시더 니…….”
“웅? 너한테 없어? 가만있자, 나 안 가지고 있는데…….”
입고 있던 드레스 자락을 위아래로더듬어보았으나 주머니도 안 달린 옷에서 손수건이 나올 리 만무했다.
그게 어디로 사라졌지. 앤의 말마따 나 몇 번 갖고 돌아다니긴 한 것 같 은데…….
귀여운 아벨의 얼굴이 수놓인 손수 건을 선물해보겠답시고 고생에 고생을 거듭했는데, 어디로 사라졌단 말 인가?
앤과 함께 방에 있던 반짇고리부터 시작해 외출복 주머니, 화장대 서랍, 침대 밑이나 베개 머리맡까지 뒤졌지만 손수건은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꺼졌는지 안 보였다.
이거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공작가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잘 지니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디 갔지?!”
텅 빈 침대 밑을 엎드려 홅다가 번 쩍 머리를 쳐들자, 맞은편에 서 있던 앤이 어깨를 으쓱하며 절레절레 고개 저었다.
“저야 모르죠.”
“아, 이런……. 거의 다 끝난 거였 는데. 검은 실로 머리카락 부분만 조금 더 놓으면 완성이 었단 말이야.”
“흰 손수건은 많으니, 자수는 다시 놓으세요. 나중에 찾으면 그것도 드 리면 되죠. 손수건을 꼭 한 장씩만 가 지고 다니란 법 있나요.”
반짇고리를 정리하던 앤이 울상 짓는 나를 달래면서 말했다.
앤의 위로에도 나는 살짝 힘이 빠졌다.
손에 구멍 숭숭 내가며 나름대로 열 심히 아벨의 얼굴을 수놓고 있던 중이었는데, 그게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곧 체념했다.
“에이, 그래. 다시 놓지, 뭐. 내가 아벨을 위해서 뭔들 못 하겠어.”
***
그 시각, 하데스는 아벨을 불러 놓고 아이샤를 떠올리고 있었다.
「좋은 아내가 될게요. 」
그의 입술이 피식 기울어졌다.
웃긴 여자였다. 대놓고 남의 뒤꽁무 니를 졸졸 따라다니 면서 당사자가 눈치채고 있다는 걸 자기만 몰랐다.
나름대로 잘 숨겨오고 있다고 생각 한 모양인데 그마저도 웃겼다.
처음에는 진딧물처럼 따라붙는 그 저 그런 수많은 여자들 중 하나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지켜볼수록 의아했다.
주구장창 따라다니기는 하되 결코 자기를 직접 드러내며 눈도장 박을 생각은 없어 보였고, 도리어 혹시나 걸리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게 눈에 보였다.
공석인 루버몬트의 안주인 자리를 노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보다는 역시 참사랑이 아닌가 싶었다.
집요한 의지가 놀라워서인지, 아주 조금 흥미가 들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는 어디를 갈 때마다 먼 저 그 이상한 여자를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게 벌써 일 년 정도나 되었다.
절대 먼저 제 존재를 드러내는 법 없던 여자가, 대놓고 공작령에 방문해도 되겠냐는 연락을 해왔을 때에 얼마나 놀랐던가.
그래도 결혼 문제를 이렇게 가신들 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결정할 생각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의 결정 또한 충동적이었다고 해야 할까?
왜 그랬지?
아마…….
첫 방문 이후 대접한 식사 자리에 서, 아이샤가 흘려두고 간 손수건을 봤을 때였을까?
서랍을 열어 하얀 손수건 하나를 꺼 내 펼친 하데스가 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민무늬인 천 손수건 위에 서툰 솜씨 로 자수가 놓여 있었다.
색색 실로 서툴게 동그란 얼굴이며 검은 머리, 붉은 눈을 제법 귀엽게 바 느질해 놨는데 누가 봐도 제 얼굴이 었다.
영 엉망인 솜씨였지만 꽤 귀엽지. 바늘 한번 안 잡아봤을 귀족 영애의 실력치고는 가상하지 않은가.
손수건을 쥔 하데스가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저으며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역시 이상하지만 재미있는 여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