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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엄마가 되어버렸다-4화 (4/221)

4화.

“아!”

본능적으로 입술을 가르고 탄성이 터져 나왔다.

흥분한 와중에도 일코의 본능이 남 아있었기에 태연하고자 마음속으로 는 수십 번 다짐했으나, 열 살 아벨의 모습을 마주한 순간 그 의지는 여름 날 아이스크림처럼 사르르 녹아내리고 말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그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결 좋은 혹발과 루비처럼 붉게 빛나는 눈동자.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아 통통한 뺨과 입 맞추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도 톰한 입술.

하데스와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다 행히도 사생아라고 우길 수는 있을 만큼 그를 꼭 닮은 모습이 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그가 하데스의 자식이라는 데에 누구도 이 견이 없을 만했다.

아벨은 놀랍게도, 그대로 자라면 아버지를 꼭 닮을 것 같았다.

“아아…….”

반사적으로 벌어진 입에서는 탄성 이 계속 흘러나왔다.

‘아차.’

헤벌쭉 벌어진 주둥이로 아벨을 마 주할 수 없었기에 나는 양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태연하겠다고 마음먹어놓고 그러지 못하는 못난 내 모습에 살짝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거…… 꿈은 아니겠지?

소설 속에서 나름대로 상상하며 읽 어왔던 장성한 아벨의 모습, 그보다 훨씬 어린 시절을 마주하게 된 내 감 상은 실로…….

할렐루야.

귓가에는 리베라 합창단의 상투스 가 맴돌았으며 아벨의 주변에는 꽃가 루가 휘날리는 듯한 착시가 일었다.

아, 눈부셔. 눈이 부시다.

365일 우중충한 날씨의 북부에는 해가 드는 일이 얼마 없건만, 대체 어 디에서 왔는지 모를 빛줄기가 아벨의 아름다운 미모를 감상하지 못하게 만 드는 느낌이었다.

반사적으로 눈이 좁아들고 찌푸려 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열심히 얼굴을 찡그려가며 눈부신 사이에서도 아벨의 얼굴을 찾으려 애썼다.

점점 가까워오던 하나의 빛덩이가 내 시야에 잡혀들었을 때.

그 순간, 나는 신께 감사인사를 올 렸다.

이제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신이시여, 다시 한번 할렐루야.

“저, 저…….”

빛덩이에 가려진 아벨의 얼굴은 보 이지 않았고 다만 그의 당황한 목소리만 들려왔다.

최애 영접의 여파에 내 연약한 몸은 휘청, 하고 기울었다.

“이봐!”

놀란 하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갸우뚱 기운 몸을 그가 단단한 팔로 뒤에서 부축해주었다.

“괜찮나? 많이 놀란 건가?”

“아아…….”

하데스가 뭐라 말하는지는 잘 들리 지 않았다. 그저 귓가에서 벌떼가 웅 웅거리듯 거슬릴 뿐이었다.

너무 눈이 부신 바람에 나는 하데스의 팔에 그대로 안긴 채 손을 들어 시야를 덮었다.

“아벨 루버몬트.”

잔뜩 노기 띤 목소리.

꿈과도 같은 찰나의 시간은, 끼어드는 하데스의 날 선 목소리에 파삭, 깨 지고 말았다.

나는 한순간 현실로 건져 올려졌다.

“뭘 우물쭈물하고 있지? 무례를 사과하라고 하지 않았나.”

아니, 귀한 아들이 문 좀 벌컥 열고 들어왔기로서니 이렇게 정색을 해야 할 일인가?

순간 울컥한 나는 손을 내리고 약간 못마땅하게 하데스를 힐끔 훔쳐보았다.

그는 무서운 표정으로 훈계하듯 아벨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아벨이 거리낌 없이 아버지의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건, 전 부 하데스 그의 잘못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머리 아픈 예절 교육이나 엄한 꾸짖음 없이 무르고 다정한 보호자처럼 아벨을 길렀다는 걸, 애독자인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왜 갑자기 엄한 아버지인 척하며 이미지 관리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벨은 화가 난 아버지의 모습에 조금 놀란 것 같았다.

그는 조금 망설이면서 내 눈치를 보 기 시작했다.

당황한 듯 입술을 달싹이며 허둥거 리는 표정까지…….

아, 젠장. 완벽하게 사랑스럽다. 이 보다 더 사랑스러운 존재는 어디에도 없을 거야.

내 묘비에 적힐 사인은 다름 아닌 심쿵사였구나. 심장 떨어지는 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묵직하게 내려앉는 것을 보니.

“에, 에스클리프 영애. 제가 이곳에 영애가 들어 계신 줄 모르고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 뭐가 죄송해!

너는 죄송할 거 하나도 없단다. 오히려 이곳에 행차해주셔서 천지신명님께 감사드리고 있는데, 죄송할 게무어 있니?

……라고 울상 짓고 있는 아벨을 달래주고 싶지만, 안 될 말이었다.

나는 티끌만큼 남은 인내심을 초인 적으로 끌어 모아 방종하게 날뛰려는 주둥이에 단단히 힘을 주곤 겨우 대 답했다.

“……아니예요.”

말을 꺼내놓은 직후에는, 조금 걱정 이 되었다.

짧고 굵게 내뱉은 대꾸가, 내가 봐 도 일견 차갑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벨도 같은 생각인지 나와 눈도 마 주치지 못하고 그저 우물거 렸다.

“그, 저…… 일전에 영애께서 보내 주셨던 선물은, 감사히 잘 받았어요. 감사 인사를 먼저 드렸어야 했는데 늦었……습니다. 용서하세요.”

헉. 놀란 나는 본능적으로 숨을 삼 키며 다시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나의 첫 조공품.

그가 말하는 선물이란, 내가 몰래 공작가에 보냈던 검 한 자루를 말했다.

산트크리아의 보검이라는 이미 망 해버린 왕가의 보물이었는데, 원래는 아벨이 열여덟 살이 되던 해 아주 힘 겹 게 구하는 아이템이었다.

그걸 구하느라 깨지고 찢어지고 다 치는 스토리를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것을 아벨 대신 구해놓았다.

망한 산트크리아 왕국령 어디에 위 치한 골동품 가게에 잠들어있던 보검 올 수소문해 찾아내느라 애 좀 먹었 지.

모든 덕후들의 마음이 비슷하겠으 나, 최애가 덕질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갖은 노력과 고난을 굳이 알아주 길 바라지는 않는다.

나 또한, 그저 보내드린 조공을 아벨이유용히 써주기만 하면 그것으로만족할 뿐이었다.

그러나, 무려, 나는 지금 이 순간.

아벨이 조공품을 직접 인증해줌은 물론, 동시에 수줍은 얼굴로 보내는 감사 인사까지 받고야 만 것이 었다.

아아…….

이것이 바로 성(공한)덕(후)인가?!

“아, 영애. 보검은 사실 내게 보낸 것이겠지만, 아들에게 더 어울릴 법하여 맡겨둔 거요. 혹시나 기분 나빠 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갑자기 하데스가 난처한 얼굴로 끼 어들며 말했다.

주책없는 아버님은 대체 뭐라시는 건지요. 아벨 루버몬트 공자에게, 하 고 예쁜 편지지에 정성들여 써놓았던 수신인의 이름을 눈이 있다면 읽지 못하셨나요?

이놈의 자의식 과잉…….

아주 약간 그를 한심해하는 표정이 되어 돌아보는데.

“나가 봐라, 아벨. 내게 용건이 있으면 나중에 이야기하러 오고.”

빌어먹을 하데스는 빠르게 아벨을 내보내려 했다.

‘안 돼! 아벨! 기다려!’

안타깝게도 내 속마음이 아벨에게까지 들리는 일은 없었다.

그는 한껏 미안해하는 얼굴로 머뭇거리다가, 이내 입술을 물곤 허리를 꾸벅 굽힌 뒤 빠른 걸음으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영애.”

“아, 저…….”

나는 차마 떠나가는 아벨을 잡지 못했다.

작은 키와 뒷모습, 아직은 조금 통 통하고 짧은 다리를 본 순간 다시금 이 약해빠진 몸에 호흡곤란이 찾아왔 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도 계속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고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시작했다.

그래, 차라리 코앞에 두고 심장 발 작으로 쓰러지는 것보다 지금은 한 발 물러서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그 완벽한 남주 아벨을 실제로만이나고, 대화도 뭣도 아니었지만 아무튼 말을 섞어본 후유증.

실로 엄청났다.

생각보다 더, 더 대단했다. 사랑스 러운 아벨의 어린 시절은 말이다.

그의 어린 시절을 가까이에서 조금이라도 더 지켜볼 수 있다면, 기꺼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겠다는 옷긴 생각까지 그 찰나에 하고 말 정도로.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 정도라 니? 앞으로 등장할 수많은 에피소드에서 활약하는 아벨의 모습은 그 얼 마나 나를 가슴 설레게 할 것인가?

“표정이 안좋이군. 아벨이 무례하게 군 것은 내가 다시 한번 사과하지. 저 래 보여도 나이에 비해 조숙하고 착 한 편이야. 친해지면, 아마 그대도 잘 따를 것이고…….”

하데스의 말이 길어졌다. 왠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해 보였다.

아마 결혼을 하게 되면 내가 아벨의 양모가 되어야 할 터인데, 그 점을 언 짢아할까 봐 걱정되는 거겠지.

그러나 우습다. 나로 말할 것 같으 면, 전생에서도 남주 덕질하느라 여 념 없던 여자.

아벨에게 안좋은 평을 내릴까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는 확실한 사람이 니까.

오히려 가까이에서 아벨의 실물을 영접하고 나서 새하얘진 머리로는, 충동적인 생각까지 하고 만 것이었다.

“마저 얘기하지. 하려던 말이 뭐였 지? 우리 결혼에 대해서…….”

일순, 아벨이 그 천사 같은 얼굴로 나를 향해 ‘엄마!’ 하고 웃으며 달려오는 모습이 그려졌다.

오, 신이시여.

“혹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나? 내 아들 때문이라면…….”

“아니요.”

나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좋은 아내가 될게요.”

사실 좋은 아내보다는, 남주의 엄마 가 되고 싶습니다.

엄마만큼 덕질 편한 포지션이 또 어 디 있을까요?

“그 말씀을 드리려고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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