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엄마가 되어버렸다-3화 (3/221)

3화.

“소문을 들어보니, 루버몬트 공작 이 오랫동안 마음에 두었던 여인이 있다고 하더 라고요?”

소설 속 내용을 곱씹으며 상념에 잠 겨있던 내게 앤이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라, 이건 나도 모르던 정보였다. 귀가 쫑긋 섰다.

“정말?”

“네. 누군지는 모르지만, 마음 놓고 안주인 자리를 줄 수 없었던 걸 보면 평민이나 한미한 가문의 영애쯤 되지 않았을까요? 이건 제 추측이긴 한데, 아마도 아벨 공자님의 친모가 아닐 지…….”

음, 그게 아니라는 건, 내가 안다. 아벨은 하데스의 친자식이 아니니까.

내가 그 사실까지 안다는 걸 알릴 수는 없어서, 앤은 모르고 있지만 말이다.

다만 아벨을 만나기 이전에도 충분히 혼기가 찼던 하데스인데도 옆자리를 쭉 비워두었으니, 앤이 알려준 소 문이 어느 정도 신빙성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아니, 그러면 정말로 왜?

마음에 둔 여자도 있는 마당에, 정말 뒤꽁무니 졸졸 쫓아다니는 내 정 성이 갸륵해서 부인으로 받아준다는 말인가?

아, 그래.

어쩌면 앤의 말대로, 바지사장처럼 나를 공작부인 자리에 세워두고 따로 정부를 둘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조금 괘씸하 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보면 이용당하는 상황인데 아 무리 보잘것없는 가문 영애라고 해도 기분 나빠야 정상 아니겠는가?

나는 아주 조금 고민하던 마음을 다 잡았다.

“가서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 하고, 결혼 문제는 없던 일로 하자고 해야겠어. 당장이라도 우리 가문에 혼인 문서를 보낼 기세였으니까 이렇 게 꾸물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어.”

“결혼, 안하시게요?”

“너라면 할 거야?”

아무리 루버몬트 공작이 대단한 사람이라지만, 인생의 사활이 걸린 결혼 같은 중대사를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결정할 생각은 없었다.

아벨의, 아벨에 의한, 아벨을 위한 환생이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그래도 아이샤 에스클리프로서 살아가게 된 이상 나도 내 인생이 있는데 말이지.

그러니까 이 결혼을 통하여 얻게 되는 모든 유혹적인 상황을 차치하고라 도 이건 쉽게 고개를 끄덕일 만한 문 제가 아니었다.

당장 결혼해주겠다며 고고한 표정으로 말하던 하데스의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생각을 정리하 고 나니 이건 아니다 싶다.

아무렴, 원활한 덕질이 가능하다고 해서 내 인생까지 파는 건 조금 너무 하지 않은가.

이 세계에서 한미한 귀족 가문 영애 가 그나마 출세할 수 있는 길은 잘나 가는 남편을 만나 적당히 그를 내조하며 살아가는 삶이었지만, 나는 굳 이 그런 조선시대 현모양처를 자처할 필요가 없었다.

소설 내용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꽤 대단한 메리트였고, 나는 별 힘을 들 이지 않고도 충분히 혼자 몸으로 윤 택한 골드미스 라이프를 쟁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적당히 이곳에서의 생활을 즐 기며 가끔씩 아벨의 덕질이나 해주고 말면 그만이 었다.

그러니까 직접 공작의 방을 찾아가 결혼 얘기를 다시 꺼내기 전까지는…….

그렇게 굳게 다짐했었다.

***

제국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라는 루버몬트 공작가의 수장을 알현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공작령을 포함하여 제국 북부령 거의 전부를 관리하고 있는 그는 성에 붙어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데, 웬일 인지 내가 머무는 동안에는 시기가 맞았던지 밖으로 나돈 적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성안에서 팽팽 놀고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내가 찾아간 그 순간에도 그는 집무실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아올려진 서류를 보느라 정신없었다.

집무실까지 찾아온 나를 보고, 하데스는 서류를 정리해둔 다음 자리를 권했다.

나는 쭈뼛쭈뼛 그에게로 다가가며 말했다.

“저어……. 전하, 우리 결혼 문제 말인데,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 어요.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바쁜 건 맞지만, 직접 찾아온 예비 아내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못 내어 줄 사내는 아니야. 사과는 불필요하겠군.”

어우, 세상에.

분명 로맨틱한 벤츠 남주의 대사에 가까운데 왜 나는 이렇게 온몸에 소 름이 돋는단 말이냐?

연애 경험이 전무해 면역도 없어 그 런지, 하데스가 정말 내가 좋아 결혼을 결정한 게 아닌 걸 알아 그런 지……. 이유는 모를 일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하데스가 권 한 자리에 어정쩡하게 엉덩이를 붙이 고 앉았다.

그의 집사가 금세 차를 내왔다.

꺼내기 힘든 말을 하려니 입술이 딱 붙고 시선은 괜히 애꿎은 찻잔 위로 향했다.

문득 느낀 건데 매번 대접받는 차는 북부에서는 잘 보기 힘든 종류였다.

우리 영지에서 즐겨 마시던, 중남부 지역에서나 흔히 나는 찻잎으로 우린 차.

이 차가 북부에도 있는 게 신기했다.

미리 체험학습 신청을 했다지만 날 위해 일부러 미리 익숙한 차를 준비 해놓는 배려를 했을 리는 없는 데…….

쓸데없는 상념에 빠져들었던 나는, 곧 하데스의 굵직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남작가에 보낼 혼인 문서는 지금 작성 중이야. 늦지 않게 처리할 텐데, 무슨 걱정이 있어서 왔지? 내일 중으 로 전령을 보낼 예정이었는데.”

하데스는 조금 피곤해 보이는 얼굴 로 미간을 문지르며 물었다.

혼인 문제와 관련해할 말이 있다고 했더니, 아마 자기가 딴소리할까 봐 걱정되어 내가 찾아온 줄 아는 모양이었다.

내 예상은 다 맞았다.

“난 한 입 갖고 두말하지 않아. 내가 영애와 결혼해주겠다고 한 게 당 연히 믿기지 않을 테지만, 꿈이 아니 니 깰까 봐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 어.”

“하하…….”

소름이 돋는다, 소름이!

이 남자의 자의식 과잉에, 소름이 돋는다고!

“그…… 사실, 전하. 저는 이 결혼을…….”

“아버지!”

쾅—!

그때였다. 별안간 하데스의 집무실 문이 벼락같은 소리를 내며 벌컥 열 렸다.

동시에 잔뜩 들뜬 쩌렁쩌렁한 목소리까지.

“엄맛, 깜짝이야!”

무려 공작의 방문을 이리 무례하게 기척도 없이 열어젖힐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나는 화 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순간적으로 민망한 탄성을 내뱉으며 나는 쿵 떨어진 가슴을 붙잡았다.

놀란 나만큼이나 하데스도 놀란 얼굴이었다.

마주 본 채 질겁하는 나를 그가 걱 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 소, 손님이 계신 줄 몰랐 어요. 죄, 죄송합니다.”

그러나 놀란 가슴은 금세 가라앉았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인지하는 순간, 놀라 뛰던 가슴은 기대와 설렘, 흥분으로 더욱 거세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맙소사!

신이시여!

이럴 수가!

먼발치에서만이지만 그래도 1년 넘 게 멀리서나마 아벨을 덕질해왔던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아직 변성기도 채 오지 않은 우리 남주 아벨의 목소리라는 것을!

공작령에 도착한 이후, 손님맞이블하러 나온 아벨의 모습을 잠깐 보기는 했으나 그뿐이었다.

지나가는 손님 1에 지나지 않는 나 와, 아직 후계위도 제대로 공표 받지못한 아벨이 이 넓은 성 안에서 사적으로 마주칠 일은 없었다.

일코를 위해 만전에 만전을 기하고 있는 내가 직접 아벨의 얼굴을 보기 위해 성을 뒤지고 다닐 수도 없는 노 룻이었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 새삼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렇 게까지 하는 건 너무 의심스러워 보였으므로.

호위 한명에 하녀 한명이 전부인 단출한 행렬로만 리 길을 걸어온의 지 넘치는 귀족 영애인 나는, 일주일하고도 나흘이 지난 지금에야 북부까 지 찾아온 성과를 보고야 말았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전율했다.

그러니까…… 그것이 무슨 느낌이 냐 하면…….

어마어마한 팬을 거느린 아이돌 그 룹의 인기 멤버를, 사적인 자리에서 단둘이 만나기 일보 직전의 그것!

물론, 내 기준 불청객에 지나지 않는 루버몬트 공작이 옆에 있긴 했지 만.

“아벨, 대체 이게 무슨 경박한 행동 이지? 에스클리프 영애는 귀한 손님이다. 이리 와서 무례를 사과하는 게 좋겠군.”

하데스는 벌떡 일어나 무서운 눈으 로 내 어깨 너머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때쯤 되었을 때, 떨려서 차마 뒤 도 못 돌아보고 있던 내 귀에 하데스의 말 따위는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벨! 아벨! 아벨!’

아, 앓다 죽을 그 이름이 여.

대적할 자 하나 없는 막강한 능력치 와 그에 비례하는 수려한 외모, 흠잡을 데 없는 인성, 정치 능력, 거기에 여주 하나만 일편단심으로 지키고 바라보는 로맨스 소설 필수 덕목까지 완벽하게 갖춘 내 인생 남주!

아벨 루버몬트!

저벅저벅, 아직 작고 소중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떨리는 가슴을 붙잡은 채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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