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내 덕질 역사는 이성을 향한 호기심 이 생기기 시작했던 초등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첫사랑은 그 나이대의 소녀들이 으 레 그렇듯 아이돌 보이그룹의 센터였다.
뭔가에 꽂히면 무섭게 파고드는 집 착적인 성격은 아이돌 덕질에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수박 겉 핥기식 사랑 은 용납하지 않았다.
음악프로 및 콘서트 직관, 팬 사인 회, 조공, 팬 카페 관리, 머글 영업까 지…….
숨을 쉬는 건 오로지 최애를 덕질하 기 위함이었고, 돈을 버는 건 오로지 최애에게 조공하기 위함이었다.
혹자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할지 도 모르겠으나, 어쩌란 말인가? 그것이 내 인생의 유일한 기쁨이었던 것 올아무튼, 그런 내가 눈물을 줄줄 흘려가며 읽은 로판 소설의 남주를 덕질하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장르 소설로서는 이례적인 판매량을 기록한 로판〈페르소나〉의 남주 아벨 루버몬트는 내 20대 중반의 전 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 었다.
자고로 덕질이란 최애의 모든 것을 알고 싶은 법.
그러나 2D를 처음 좋아해본 나는 덕질의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 미 완결이 난 소설 속의 아벨에 대해 서는 더 알고 싶어도 알아갈 게 없었 으므로.
하여 아벨을 향한 집착은 고스란히 작가님을 향한 집착이 되었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아벨의 조물주, 〈페르소나〉의 작가가 팬 사인회를 연 당일, 나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새 벽부터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것이, 내 덕질과 함께했던 27년 인생의 마지막 외출이었다.
끼 이이 익—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아직 밝지 않은 뿌연 새벽하늘과, 정면에 서 달려오던 중형차의 노오란 헤드라 이트 불빛과, 나처럼 새벽같이 사인회 장소에 찾아와 대기 중이던 독자 들의 놀란 비명소리. 그뿐이었다.
사실 그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예정되 어 있었던’ 듯한, 양산형 로판소설스 러운 죽음이었다.
***
「허어어억! 」
내 두 번째 삶은 시작부터 파란만장 했다. 아니, 시작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했다.
아이샤 에스클리프.
가진 거라곤 작위뿐인 가난한 남작 가의 외동딸.
그녀는 18살의 나이로 요절했으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관 뚜껑을 덮기 전 기적적으로 되살아났다.
그래, 그게 바로 나였다.
「에그머니나, 아이샤?! 」
「아악! 이 게 무슨 일이람? 」
「머, 멈춰라! 내 딸이 살아났다」
새로운 몸에 적옹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죽었던 기억이 확실하니 그저 환생했구나, 깨닫게 되었고, 금세 초연해졌다.
그녀는 가난한 집 딸이긴 했지만 그 래도 귀족이었고, 다정한 부모님과 예쁜 얼굴(솔직히 이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을 가지고 있었으며, 앤이라 고 하는 친한 하녀도 곁에 있었다.
같은 나이의 앤과는 허물없이 지내 왔던 모양이고, 이전 성격은 조금 소 심하고 착한 아가씨였던 것 같다.
하늘빛인 듯도 하고, 물빛인 듯도 한 결 좋은 머리카락, 보석처럼 푸른 눈동자, 하얀 피부와 여리여리한 몸 매를 가진 상당한 미인이 이름 한 줄 언급되지 않은 조연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에, 나는 이곳이 소설 속 세계임을 곧바로 인지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남작 영애 아이샤 에스클리프의 삶에 적옹해가던 중.
‘크레센타 제국’이라는 나라 이름, 간간이 듣게 되었던 ‘루버몬트’라는 가문 이름.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세계 사람들이 갖고 있는 신기한신체적 특징이 내게도 존재한다는 걸 알고 나서야 외쳤던 것이다.
「유레카!! 」
이곳은 다름 아닌 소설〈페르소나〉 와 동일한 세계이며, 시기상 남주 아벨은 아직 작고 소중한 7살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
살아생전 밤낮으로 덕질해댔던 2D 최애를 실물로 영접할 수 있게 되었 다는 사실은 나를 흥분시 켰다.
그것도 책 속에서는 상세히 언급된 바 없었던 그의 ‘어린 시절’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니.
거의 외우다시피 달달 읽은 소설 내 용은 내 수월한 덕질에 많은 도움이 되어주었다.
이를테면 덕질의 기본인 최애의 스 케줄 파악이라든가, 조공을 위해 필 수로 지녀야 하는 재력을 보유하는 일이라든가…….
그리하여 내 덕질 프로젝트는 이곳 크레센타 제국에서 다시 시작되었던 것이다.
***
“그래서 지금, 루버몬트 공작이랑 결혼하시겠다고요? 아니, 엄청 경사 이긴 한데…….”
루버몬트 공작성, 내게 주어진 지나 칠 정도로 화려한 손님방.
체험학습을 핑계로 벌써 이곳에 머 문 지가 일주일하고도 나흘째였다.
화장대 앞에 앉은 내 머리를 곱게 땋아주던 앤이 거울 너머로 눈을 맞 추며 물었다.
빨간 머리와 주근깨가 매력적인 그 녀는 익숙한 이름까지 꼭, 언젠가 재 미있게 봤던 명작 만화의 주인공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래서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한 어 리둥절한 상황에서도 앤에게 친근함을 느꼈는지 모른다.
나는 질색하고 말했다.
“미쳤니? 아무리 아벨이 좋아도 그 렇지, 얼굴이랑 이름 빼곤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랑 어떻게 결혼을 해?”
“그건 그렇지만, 이건 어쩌면 꽤 좋 은 기회일지도 몰라요. 아가씨는 혼 기가 훌쩍 지났잖아요? 루버몬트 공작은 잘생겼고, 돈도 많다고요. 사실 상 에스클리프 남작가랑 엮일 그런…… 아, 죄송해요.”
“아냐, 틀린 말도 아닌걸.”
나는 앤이 미처 잇지 못하고 흐린 말에 십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다시 현재 상황으로 돌아와서.
하데스 루버몬트 공작은 아무래도 내가 공작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닌 이유가 자기에게 홀딱 반해서라고 생 각하는 모양이 었다.
실제로만나본 바, 하데스는 아벨만 큼은 아니라도 충분히 매력 넘치는 남자였다.
그런 그가 예상외의 자의식 과잉 환 자였다는 사실은 퍽 놀라웠지만…….
‘그렇게밖에 생각이 안 되겠지.’
아주 당연하고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내게는 분명 어떤 목적이 있어 보일 테고, 설마하니 그게 고작 10살 난 자신의 아들을 따라다니려는 거라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고 해도 왜? 내게는 의문이 남았다.
돈이면 돈, 권력이면 권력, 입지면입지. 뭐 하나 빠지는 것 하나 없는 이제국의 주역 루버몬트 공작가의 수장인 남자가, 자길 졸졸 따라다니는 볼품없는 가문의 귀족 영애를 벌주지는 못할망정 정성이 갸륵하니 결 흔해주겠다고?
루버몬트 공작이 미쳐버린 게 아니라면, 그 황당한 청혼을 듣고 가장 먼 저 떠올려야 할 의심은 역시…….
“사실은 루버몬트 공작도 나를 덕질하고 있었다든가…….”
“아주 높은 확률로,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했으나 이제는 ‘덕질’이라는 전문용어에 익숙해진 앤은, 냉큼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음, 역시 그렇지? 그러면 대체 이유가 뭘까?”
“고민해봐야 답이 나오겠어요? 그 냥 곧이곧대로 들으세요. 열심히 뒤 꽁무니 쫓아다니는 아가씨 정성이, 정말 눈물겨워서 그랬올 수도 있죠. 사실 루버몬트 공작도, 안주인 자리를 공석으로 두면서 이런저런 잡음이 많았다고 들었거든요.”
“잡음?”
“네. 어디 루버몬트 공작가가 보통 가문인가요? 공작가에 아직까지 안 주인이 없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아, 그건…….”
소설을 읽은 나는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특별히 궁금해할 필요는 없었다.
루버몬트 공작, 하데스는 전쟁터에 서 만난 고아 아벨의 능력을 눈여겨 보고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자 결심한다.
그러나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권력 자 가문인 루버몬트에 출생이 불분명 한 고아를 양자로 들여 후계를 잇게 한다니, 가당치도 않았다. 가신들과 가문 혈족들의 반발은 예상된 것이었다.
하데스는 그러한 잡음을 사전에 차 단하고 아벨에게 조금이나마 후계자 로서의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를 자신의 친자라고 공표하며 영지로 데리고 들어왔다.
정실인 공작부인의 자리는 비어있 었고, 아벨의 어머니는 알려지지 않 았기에 그의 공식적인 위치는 루버몬트 공작의 사생아였다.
뭐, 그래도 루버몬트의 피가 전혀 흐르지 않는 불분명한 출신의 고아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하데스에게 충성하는 가신들과 공작성의 고용인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 진 공작의 사생아 아벨을 아니꼽게 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데스가 끔찍이 아끼며 싸고돌아 도 은근히 뿌려지는 눈총들에서 아벨 은 자유로울 수 없었다.
실은 자신이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벨만은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주위의 눈치를 보느라 바쁘던 어린 아벨은, 그런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 며 일찍 철이 들었다.
아, 불쌍한 우리 아벨. 잠깐 눈물 좀닦고.
“공작은 아마 보여주기식으로라도 급히 결혼해야 하는 상황일지도 몰라요.”
나는 어느 정도, 앤의 말에 동의하 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가장 문제가 되는 건 공석인루버몬트 공작 가문의 안주인 자리였다.
하데스는 안주인을 들이라는 가신 들의 집요한 요구에 대충 고개를 끄 덕이며 적당한 혼처를 찾긴 했으나, 추후에 자식을 몇 명이나 보든 루버몬트 공작가의 후계자는 무조건 아벨이라고 못을 박았다.
루버몬트 공작가와 수준이 맞을 만한 거대 귀족 가문에서는, 그러한 손 해를 감수하고 곱게 기른 딸들을 보 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루버몬트 공작가가 제국을 대표하다시피 하는 대단한 권력의 중심인 것과는 상관없었다.
물론 아무도 공작의 옆자리를 탐내 지 않은 건 아니 었다.
조금 낮은 수준의 가문에서는 청혼 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저 루버몬트 라는 이름의 명예를 나누고 싶어 아벨의 존재를 감수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러나 고만고만한 가문들의 청혼 문서는 가신들 선에서 전부 파기되었다.
아무리 혼처가 없어도 전혀 수준이 맞지 않는 가문과 연을 맺는 건 수치 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데스는 자존심 세우느라 바쁜 가신들의 논의 속에서 그럭저럭 안주인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두고도 버텨올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언젠가는 공작부인의 자리를 채워야 했겠지만, 내가 아는 작중 내용에서 하데스가 신부를 맞는 일은 없었다.
왜냐고?
‘공작도 불쌍하긴 하지…….’
하데스 루버몬트 공작.
그는 아벨의 열한 살 생일, 아벨을 대신해 장렬히 죽음을 맞이하는 헌신 적인 아버지 캐릭터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