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덕질의 기본은 일코(*일반인 코스프레)다. 어느 정도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대외적 이미지를 중요시해야 하는 귀족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지금 나는 강제 일코 해제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덕질의, 덕질에 의한, 덕질을 위한 내 30년 인생 최대의 위기.
“에스클리프 영애.”
하데스 루버몬트 공작.
수많은 인재들이 넘쳐나는 이곳 크레센타 제국에서도 가장 완벽함의 가 도를 달리고 있는 남자가,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심장이 떨렸다. 물론 루버몬트 공작 은 매우 잘생기고 매력적인 남자였으 나, 지금 내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이유는 그에게 설레서가 아니었다.
“영애를 이렇게 내 방으로 따로 부 른 이유, 알고 있겠지.”
루버몬트 공작은 다리를 착 꼬고 앉아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다소 건방진 자세였으나 그마저도 나쁜 남자의 매력이 폴폴 홀러넘쳤다.
암, 그래야지. 누구 아버님인데.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시치미를 떼고 봤다.
기울이고 있는 찻잔 너머로 공작의 붉은 눈이 나를 날카롭게 꿰뚫었다. 쓱 올라간 눈썹을 보니 내 뻔한 거짓 말이 마음에 안 드는 눈치다.
탁.
찻잔 내려놓는 소리가 방 안의 고요를 갈랐다.
휘오오오오—
때마침 타이밍 좋게 창밖을 때리는 날 선 바람소리가 윙윙 귓가를 올렸다.
슬쩍 창 너머 눈 쌓인 북부의 정경을 내다보고 있자니 울고 싶어졌다.
공작령은 날씨까지도 주인을 닮아 한기가 폴폴 맴도는구나.
“영애는 1년 전, 중부 메르엔 백작 령에서 열렸던 추수 감사 축제에 왔 었지. 아마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던것 같군.”
“……네, 네?!”
예상치 못했던 날카로움에 나는 헉, 숨을 삼키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제도에서 열렸던 올해 데 뷔탕트 볼(*어린 귀족 영식, 영애들의 사교계 데뷔 무대)에도 왔었던 걸 기억해. 영애는 데뷔탕트 나이가 아 닌데도. 그저 축제 기간이라 유희를 즐기러 왔다? 그렇다기엔 내가 아는 에스클리프 남작가 사정 이 조금 눈물 겹지. 제도에 한번 오려면 기둥뿌리 가 뽑힐 지경일 텐데.”
맞는 말이라 뼈가 아팠다. 이런 팩 트 폭력기 같으니라고.
“저기……. 전하.”
그러나 아직은 변명의 여지가 있다. 행선지가 두 번 겹쳤기로서니 덕질을 위해 공작가의 뒤를 밟았다고 몰아가는 건 너무나 큰 비약이지 않은가.
나는 핑핑 도는 시야를 억지로 다잡 으며 변명을 준비했다.
앞에 놓인 찻잔 위로 비처럼 흐른 땀이 턱에 고여 툭, 떨어졌다.
공작이 픽 웃는 게 느껴졌다. 곧 그 가 입고 있던 재킷 안주머니로 손을 불쑥 집어넣었다.
그 움직임에 나는 흠칫 떨었다. 흡 사 살쾡이에게 쫓기는 설산의 토끼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아는 공작의 성격이라면 지금 저 재킷 안주머니에서 나올 것은…….
비수? 표창? 올가미? 독약?
아무튼 개중에 하나는 무조건 튀어나올 테다.
그리고 나를 순식간에 사지로 몰아넣은 뒤, ‘왜 내 아들에게 접근했 지? ’라며 무시무시하게 물어오겠지.
확실해. 공작은 아들 바보이니까.
“……흡.”
그러나 본능적으로 목을 움켜쥐고 방어한 내 앞에 휙 던져진 건, 예상외 로 얌전한 물건이었다.
검은 천에 금자수가 놓인 심플한 손 수건 한장.
“긴장이라도 했나? 땀을 많이 홀리 네.”
“아하……. 너! 긴장했다기보다는 원래 더위를 좀 많이 타는 편이랍니다.”
“아, 이 추운 북부에서? 난방이 너무 과했나 보군.”
“그러네요! 불이! 저 벽난로! 저거, 어허, 차암 잘 타네…….”
활활 타오르는 애꿎은 벽난로를 가리키며 나는 공작의 손수건으로 주룩 주룩 흐르는 땀을 쿡쿡 찍어 닦아냈다.
“계속하지. 당시 제도에 머물 때, 익명의 인물로부터 꽤 값진 선물을 받았소. 정확히는 내 아들, 아벨 루버몬트의 앞으로 보내온 건데 말이야……. 산트크리아의 보검.”
“으아니, 그런 보물을요?”
“그래. 익명으로 보내면 모를 줄 알 았던 모양인데. 공작가의 정보력을 대체 얼마나 무시한 건지…….”
“…….”
“발신인은 더글라스 후라네 자작이 었소. 알아보니 3년 전부터 영애의 가문을 후원하기 시작한 귀족이더군. 이 정도만으로도 영애가 우리 공작가의 뒤를 졸졸 밟고 있다는 증거는 충 분하지만.”
공작은 한 템포 말을 멈춘 뒤, 덜덜 떨고 있는 나와 눈을 맞추고는 싱긋 웃었다.
지금 머리끝까지 차올랐을 그의 분 노 게이지와는 달리 상당히 무해한 웃음이었다.
“영애에게 변명의 여지가 남아있다 고 한다면, 더 해보겠소. 키 리에 후작 령에서 있었던 작위 계승식, 중부 귀 족 무도회, 제도 공개 기사 서임 식…….”
“아아! 네, 네. 전하. 거, 거기까지요.”
와, 이렇게 들으니 너무 놀랍다. 티 안 나게 덕질한다고 생각했던 건 역 시 나의 착각이었나?
전 대륙의 이름 있는 귀족들이 참여했던 꽤 큰 행사들에서 한미한 남작 가의 외동딸인 내가 눈에 띄었을 확 률은 뒤로 넘어져서 코가 깨질 확률 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 덕질 좀 해본 사람이라면 아무도 나를 욕하지 말라. 최애의 실 물을 가까이서 영접하기 위해 그의 스케줄을 빠삭하게 꿰고 있는 것은, 덕후 팬의 기본 중 기본 덕목일지어 니?
그렇다고 내가 스토킹을 했나, 뭘 했나? 따져보면 못 갈 곳에 간 적은 한 번도 없다. 루버몬트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한 가문이지만 그래도 귀족 딱지 달고 당당히 얼굴 들이밀 수 있는 데만 골라 다녔단 말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런 변명은 필요 없다. 공작은 내 갸륵한 팬심을 이해해줄 수 있는 현대인이 아니었으 므로.
아마 그에게 나는, 10살짜리 아들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는 나이 많고 정신 나간 여자 그 이상도 이하 도 아닐 것이다.
아. 이거 좀 슬프네.
“게다가 지금 영애가 이곳에 와 있는 이유.”
그래, 북부행은 좀 무리수였지?
“거짓말이 너무 성의 없지 않았나? 북부의 생활을 경험해보고 싶다? 뭐 라더라, 체험학습…… 신청? 아니, 힘이라곤 쥐뿔도 없어, 생긴 건 무슨 남부 봄바람에도 날아갈 것처럼 뵈는 영애가, 온갖 마수 때문에 악명 높은, 이, 공작령에?”
그러나 무슨 상관인가? 북부행을 결 정했을 때 나는 내 신변에 가해질 위 협 따위 걱정한 바 없다.
으레 소설 속 클리셰가 그렇듯 살을 에는 추위의 북부에는 마물들이 넘쳐 나고 예상치도 못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테지만,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진 차가운 공작님의 비호 아래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한 지대일지니. 아 멘.
아니, 지금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가 아닌데.
그렇지만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려보 아도 딱히 이 상황을 빠져나갈 탈줄 구가 떠오르질 않는다. 공작에게 덕질을 걸린 순간 불쌍한 남작 영애의 최후는 하나로 결정지어졌으므로.
나는 이곳에서 죽을 운명이다. ‘아 들 바보’ 하데스 루버몬트 공작은 아 들을 스토킹한 여자를 곱게 보아 넘 겨줄 만큼 온화한 성품의 사내가 아니었으니 길게 끌지도 않을 것이다.
아마도 이승 마감까지 D—3시간, 2 시간 59분 59초, 2시간 59분 58 초…….
가문 입적부터 공작위 계승까지 쉴 새 없이 그의 아들 아벨 루버몬트에게 퍼부어졌던 생과 사를 넘나드는 위협.
그리고 필요하다면 피를 보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아들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지켜냈던, 능력자 아버지의 정석 하데스 루버몬트 공작.
그의 아들 사랑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나는, 조심스레 속으로 셀프 명복을 빌었다.
아직 장성한 남주 아벨의 멋진 모습을 눈에 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소설 속에는 안 나왔던 그의 귀염뽀짝 한 어린 시절을 잠시나마 덕질했으니 제법 만족스러운 삶이었노라.
먼발치에서나마 내 최애의 아름다 운 자태를 훔쳐보며 눈물 흘리고, 가 끔 최애와 꼭 어울릴 듯한 잇템을 사들여 조공하고, 최애의 스케줄을 따라 부지런히 발품을 파는 삶.
내 묘비에는 꼭 그리 적어 달라.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에서 27년, 그리고 책 속 나라 크레센타에서 3 년, 도합 30년의 인생을 살아온 ‘덕질 장인’ 아이샤 에스클리프의 아름 다운 인생이었다고!
“줄기차게 따라다녀, 비싼 선물 공 세에, 이제는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 고 혈혈단신으로 북부까지 올라오다 니…….”
“미안합니다. 할 말이 없네요.”
“그래, 내가 졌어.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는 정성이야.”
“……역시 제가 좀 그렇죠? 제가 생 각하기에도 이만한 정성이 없어요.”
“좋다고 따라다니는 여자들은 꽤 됐지만, 영애만큼 집요한 사람은 본 적이 없어. 놀라울 정도야. 하지, 결혼. 빠른 시일 내에.”
“하아…….”
“…….”
“예, 받아들이겠습니다.”
“…….”
“아니, 예?! 뭐라고요?”
쾅!
딱총 맞은 새가 날개를 푸드덕거리는 것처럼 전율한 순간, 내 몸에 닿은 테이블이 휘청거렸다.
넘실거리던 찻물이 기어코 넘쳐흘 렀다.
……시방 이것이 뭔 소리라니?
죽을 운명임을 확인받는 것이 마음 아파 흘려듣고 만 공작의 대사를 다시 재생시킬 필요가 있었다.
빠른 시일 내에…… 그 앞에, 결혼 어쩌고 요상스러운 말을 웅얼거렸던 것 같은데?
죽어, 영애.
가자, 사형.
뭐 이런 말을 잘못 들은 게 분명하 겠지?
그러나 공작은, 멍해진 내 얼굴을 바라보며 피식 웃더니 제대로 확인 사살을 해줬다.
“해주겠다고, 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