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6화 (136/136)

‘비 내리는 숲속에서 날뛰는 광란자들~ 비만 내리면 다들 사이좋게 미쳐 돌아서~’

나는 고모님한테 가서 광란자가 뭐냐고 물어보았다.

고모님은 심술궂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대신에 내 앞에서 그런 노래를 불렀다며 고숙님의 등을 아주 세게 때렸다…….

잠깐,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지?

“포, 포, 포, 포, 포…….”

“알겠지, 죽으면 안 돼, 알료샤! 네가 없으면 우리는…….”

“아, 좀 시끄러. 너희 둘 다!”

꽥 고함을 쳤더니 그제야 둘 다 울부짖기를 뚝 멈추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는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쉿’ 신호를 했다.

“포, 포, 포, 포…….”

“들려……?”

“저, 저거 대체 무슨 소리야……?”

“나도 몰라.”

“포, 포, 포, 포, 포…… 포!”

세찬 빗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이상한 목소리.

누가 콧노래를 흥얼대는 거 같기도 하고 작은 동물이 내는 소리 같기도 하고 알쏭달쏭했다.

숨죽여 바짝 귀를 기울이자 점점 더 가까워지는 거 같더니만 어느 순간 갑자기 뚝 멎어버렸다.

가버린 걸까? 대체 뭐였을까?

“포?”

“흐아악!”

굴 앞에 누군가가 불쑥 나타난 바람에 우리는 깜짝 놀라서 창피함도 잊고 서로한테 매달렸다.

다짜고짜 나타난 웬 커다란 녀석은 그런 우리가 퍽 흥미롭다는 듯이 빤히 쳐다보았다.

우리 역시 녀석을 빤히 쳐다보았다.

“대, 대왕 너구리다…….”

“아냐, 대왕 토끼야…….”

내가 봤을 땐 다닐도 유리도 틀렸다.

너구리도 좀 닮은 거 같고 토끼도 좀 닮은 거 같았지만 털이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무지 통통했다.

뚱보 안톤보다 훨씬 배가 나온 거 같았다.

한 팔에 웬 커다란 나뭇잎 우산을 들고 있었는데 머리 꼭대기만 빼고 다 젖어 있었다.

솔직히 아까 그 큰 새들이랑 비교하면 그다지 무섭게 생기지 않았다.

나는 다닐이 내 옷깃을 붙드는 것을 뿌리치고 엉금엉금 기어서 구멍 밖으로 몸을 반쯤 내밀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까 입이 무지 컸다.

이빨도 클까? 왠지 이빨이 있을 거 같진 않은데.

“포, 포?”

녀석이 나뭇잎 우산을 흔들면서 커다란 입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다른 쪽 팔을 파닥대며 나를 가리켰다.

무슨 말을 하고픈 건가 싶어 열심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런데 녀석이 갑자기 뒤뚱대면서 내 이마를 찰싹 때리는 것이 아닌가?

“아얏!”

“알료샤!”

솔직히 하나도 아프지 않았지만 깜짝 놀랐다.

꽥 고함을 지른 유리가 와서 내 얼굴을 보고는 갑자기 자기 머리를 긁적거렸다.

뭐지? 나는 더듬더듬 손을 움직여 이마를 만져보았다.

“뭐가 붙은 거야, 여기?”

“나, 나뭇잎 붕대……? 뭔가 특별한 나뭇잎 아닐까? 너 피나지 말라고 줬나 봐.”

진짜 특별한 나뭇잎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꽤 다정한 행동이었다.

역시 아까 괜히 겁먹었었나 보다.

나는 되도록 미안해 보이려고 애쓰면서 뚱보 너구리 토끼를 바라보았다.

우리 말을 알아듣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있잖아, 고마워.”

“포, 포 포!”

“근데 넌 누구야? 혹시 이 굴 주인이야?”

“포, 포!”

녀석이 몸을 양옆으로 뒤뚱뒤뚱 흔들었다.

맞다는 건가, 아니라는 건가?

“포, 포 포 포 포, 포, 포오!”

뚱보 너구리 토끼는 왠지 몹시 들떠 보였다.

좀 전처럼 짧은 팔을 파닥대면서 나랑 자기를 번갈아 가리켰다.

그리고 갑자기 춤추는 것처럼 양팔을 파닥대며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저 몸집으로 그럴 수 있는 게 신기했다.

우리가 멍하게 쳐다보고 있자 이번에는 한 팔을 허공에 홱홱 파닥대는 시늉을 했는데, 생김새랑 안 어울리게 뭔가를 새침하게 뿌리치는 거 같은 동작이라 퍽 우스꽝스러웠다.

그때 유리가 불쑥 소리를 질렀다.

“나 쟤가 뭐 하는 건지 알 거 같아!”

“뭔데, 뭐야?”

“이거야, 이거!”

유리는 몹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더니 다짜고짜 양손을 어깨 너머로 펄럭대는 시늉을 했다.

마치 긴 머리카락이 달린 누군가가 머리를 홱 넘길 때랑 비슷해 보였다.

“근데 쟤는 머리카락 없잖아?”

“그러니까 쟤도 지금 누굴 흉내 내는 거라고. 어쩌면 우리가 아는 사람일지도 몰라.”

듣고 보니 꽤 그럴싸했다.

하지만 대체 누굴 흉내 내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래서 뚱보 너구리한테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다닐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혹시 왕비님 아닐까?”

“뭐? 야, 웃기지 마, 너네 엄마겠지!”

어이가 없어서 소리를 꽥 지르자 다닐은 우물쭈물하면서 자기 어머니가 그렇게 춤추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유리 역시 자기 엄마도 마찬가지라며 끼어들다가 내가 째려보자 입을 다물었다.

물론 우리가 아는 어른 중에 한 발로만 서서 멋지게 빙글빙글 돌 줄 아는 사람은 어마마마뿐이었다.

그렇지만 그게 대체 어떻게 방금 그거랑 비슷하단 말인가?

그리고 난 어마마마가 그런 식으로 머리카락을 홱 하는 걸 본 적 없었다.

새침데기 레아 누나나 다른 어른들이 그러는 건 봤어도.

내가 분개해서 식식거리자 다닐은 곧 자기가 착각한 거 같다며 사과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소낙비가 그쳤다.

우리는 냉큼 굴 밖으로 빠져나왔다.

뚱보 너구리가 즐거운 듯 뒤뚱대며 들고 있던 나뭇잎 우산을 홱 내던졌다.

“포, 포!”

“우와아……!”

높은 나무들 위로 알록달록하고 커다란 무지개가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엄청 가까이 보여서 진짜 예쁘고 신기했다.

뚱보 너구리랑 같이 나란히 무지개를 바라보고 있자니 아까까지만 해도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던 숲이 갑자기 친근하게 느껴졌다.

여전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긴 했지만.

뚱보 너구리가 내 배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나를 쳐다보았다.

“큼, 점심을 조금밖에 안 먹어서 그…… 우앗!”

깜짝 놀랐다.

뚱보 너구리가 나를 붙잡더니 다짜고짜 자기 머리 위로 홱 던진 것이었다.

그 바람에 나는 반사적으로 이 뚱보 너구리인지 뚱보 토끼인지의 뾰족한 귀를 꽉 움켜잡았다.

그랬는데도 뚱보 너구리 토끼는 화내기는커녕 오히려 더 즐거운 거 같았다.

“포, 포 포 포!”

“저 녀석이 알료샤를 납치하려고 해!”

앞다투어 달려든 유리랑 다닐이 곧이어 자기들도 태워달라며 마구 떼를 써댔다.

맘씨 좋은 뚱보 너구리는 걔들이 제멋대로 자기 몸에 매달려도 내버려 두었다.

“포 포!”

“우와아아앗!”

나는 양손에 힘을 꽉 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바람이 세차게 얼굴을 때렸고, 발밑에선 뚱보 너구리의 양팔에 대롱대롱 매달린 두 얼간이가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조금 후에 용기를 내서 눈을 떠보자 의외로 굉장히 신이 났다.

“야호!”

가만 보니까 뚱보 너구리는 아까 빙글빙글 돈 것도 그렇고, 보기랑 다르게 무척 날쌘 모양이었다.

주변 풍경이 엄청 빨리 홱홱 지나갔는데 어른들이랑 같이 말을 탈 때보다 더 빨리 지나는 거 같았다.

얼마나 달렸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머지않아 빽빽한 나무들이 사라지고는 거대한 절벽과 울퉁불퉁한 바위투성이가 펼쳐졌다.

뚱보 너구리가 고무공처럼 바위들 위를 통통 튀어가는 바람에 몸이 들썩들썩했다.

흥겹긴 했는데 좀 어지러워져서 도로 눈을 감았다.

“우아아아아앗!”

“포, 포, 포오!”

빙글빙글 도는 것 같다가 어딘가를 주르륵 타고 올라가는 거 같다가 다시 쭉 똑바로 달리더니 마침내 멈추었다.

뚱보 너구리는 우리를 내려놓고는 혼자 바깥으로 통통 뛰어갔다.

우리는 멍하게 바닥에 주저앉아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무슨 엄청 큰 동굴 같은 곳에 들어온 거 같았다.

더운 날씨임에도 갑자기 엄청 시원한 기분이 들었는데, 위를 올려다보자마자 그 이유를 알았다.

천장에 고드름이 잔뜩 붙어 있었던 것이다.

한여름에 고드름이라니! 게다가 이만큼 커다랗고 예쁜 고드름은 처음 봤다.

겨울 축제 때 열린다는 지역 고드름품평회에 내놓으면 무조건 일등일 거 같았다.

내가 신기해하며 떠드는 동안 유리도 다닐도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둘 다 얼굴이 유독 새하얬다.

아무래도 멀미를 한 거 같은데 애써 참고 있는 거 같았다.

먼저 토하는 녀석이 지는 거였다.

가만 보면 참 쓸데없는 걸로 경쟁한다니까.

“여기가 뚱보 너구리 집일까?”

“…….”

“저 안쪽에 뭐가 있는지 가보자.

먹을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

“…….”

“근데 걔는 뭐 먹고 살지? 열매 같은 거 따먹으려나……?”

그렇게 말하자마자 내내 조용하던 녀석들이 갑자기 앞다투어 자기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유리는 뚱보 너구리가 생긴 거랑 다르게 육식일지도 모른다며 작은 동물이나 새를 한입에 왕 씹어 삼킬 거라고 주장했다.

다닐은 걔가 곰처럼 생선을 잡아서 한입만 먹고 버리는 미식가일 거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다닐이 생선 얘기를 하자마자 유리가 토했다.

“우, 우웨에엑!”

“우애애액!”

유리가 토하자마자 즉시 다닐이 따라 토했다.

그 한심한 꼴을 보자 그만 나까지 토할 거 같아져서 동굴 안쪽으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녀석들이 혼자 어딜 가느냐며 쫓아왔다.

따라오지 말라고 악을 쓰며 질주하는데 그때 갑자기 쭉 뻗은 길이 끝나더니 웬 여러 갈래로 뻗은 내리막길들이 나타났다!

내리막길인지 구멍인지, 아무튼 한눈에 봐도 수상쩍고 위험해 보였다.

“멈춰!”

나는 끼익 아슬아슬하게 멈춰 섰다.

내가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바짝 쫓아오던 유리가 등 뒤에서 세차게 부딪혀 왔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다닐 녀석이 발이 미끄러진 건지 뭔지 멍청하게도 세차게 우리를 덮쳤다.

“야우아악!”

우리 모두 사이좋게 사람 도미노가 되어 중간의 가장 넓은 통로로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그대로 정신없이 빠르게 쭉쭉 미끄러져 내려갔다!

안에 기름 바른 미끄럼틀이라도 타는 거 같았다.

거기다 그냥 미끄럼틀도 아니고 꾸불꾸불 제멋대로 소용돌이쳐대는 미끄럼틀이었다.

“끼야아아아아아아아!”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고 심장은 터질 거 같았다.

이러다 어디 잘못 부딪혀서 머리가 날아가거나 할까 봐 죽도록 겁이 났다.

아니, 그 전에 먼저 머리털이 죄다 뽑힐 지경이었다.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가고 나면 그다음부턴 아무것도 하나도 안 무서울 거 같았다.

기절할 만큼 무섭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 조금 알 거 같았다.

물론 나는 기절하지는 않았다.

왕자는 기절 같은 거 하지 않는 법이니까.

좀 아슬아슬할 뻔했을 뿐이다.

다행히 그 순간에 끝이 없을 거 같던 통로가 갑자기 끝나면서 우리를 대포 쏘듯이 토해냈다.

우리는 부웅 공중을 가로질렀다가 어딘가에 나란히 통통통 떨어져 뒹굴면서 마침내 미친 질주를 멈추었다.

서로 질세라 내지르던 비명 역시 동시에 뚝 멎었다.

온통 어질어질했고 온몸이 얼얼했다.

우리는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뻗은 채 드러누워서 숨을 세차게 몰아쉬었다.

여긴 대체 어디일까? 그냥 지하 동굴 같다는 거 말고는 하나도 모르겠다.

단 내가 상상했던 지하 동굴과는 달리 엄청 어둡진 않았다.

컴컴하긴 했으나 앞이 안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왜 그러나 싶었는데 어질거리던 눈앞이 마침내 똑바로 보이자 이유를 깨달았다.

동굴 천장과 벽 군데군데 달라붙은 얼음 덩어리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빛나는 얼음도 있나? 진짜인지 아닌지 몰라도 신기하고 예쁘게 느껴졌다.

“애들아, 저거 보여?”

맞은편에서 유리가 끙끙대며 일어나 앉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또 토할 것처럼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고함을 꽥 질렀다.

“너 때문에 다 죽을 뻔했잖아, 머저리 자식아!”

“내가 뭘 어쨌다고?!”

내 옆쪽에 뻗어 있던 다닐이 벌떡 일어나 앉으며 꽥 마주 고함쳤다.

유리는 또다시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대신에 얼이 나갈 만큼 온갖 무시무시한 욕설을 마구잡이로 퍼붓기 시작했다.

솔직히 거의 처음 들어보는 거라서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도 힘들었다.

그런데도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만일 고모님이 이 자리에 계셨다면 유리 엉덩이에 불이 났을 거였다.

나는 다닐이 울음을 터뜨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닐은 그러는 대신에 똑같이 온갖 듣도 보도 못한 욕으로 맞받아치기 시작했다.

난 이 녀석들이 이렇게 욕을 잘하는지 몰랐다.

만일 다닐네 아빠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다닐 종아리가 부러졌을 거였다.

점점 듣고 있기 힘들어졌다.

“다음부터 너희랑 같이 안 다녀!”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힘껏 외치자 서로 죽어라 욕을 퍼붓던 녀석들이 잠시 멈칫했다.

멍청하게 돌아보는 모습에 그만 짜증이 확 났다.

“뭐……?”

“뭐긴 뭐야, 너희랑 같이 안 다닌다니까!”

“가, 갑자기 왜 그…….”

“너네랑 노는 거 재미없어졌어! 같이 모험 왔으면서 계속 싸우기만 하고 서로 그런 욕이나 하고, 이런 건 우정이 아니야!”

희한하게도 말을 할수록 더 화가 나는 기분이었다.

나는 식식대면서 홱 돌아앉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멍하게 날 쳐다보던 다닐이 갑자기 훌쩍훌쩍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난 도무지 쟤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빤히 노려보고만 있자 유리가 안 하던 짓을 했다.

쩔쩔매면서 다닐의 등을 두드려 주기 시작한 것이다.

“야…… 넌 또 왜 갑자기 울고 그래? 뚝 그쳐, 바보야! 알료샤가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닐 거야!”

유리의 어울리지 않는 다정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다닐은 계속해서 서럽게 흐느꼈다.

나는 기가 차서 콧방귀를 뀌었다.

“진심으로 한 말이거든?”

“하, 하지만 우린 영원한 라이벌이잖아!”

“너처럼 못돼먹은 라이벌 둔 적 없어!”

“야……! 미안, 미안하다니까, 다시는 안 싸울…….”

“나한테 그러지 말고 너네끼리 화해해!”

유리는 한바탕 헛기침을 하고는 다닐을 향해 조그만 목소리로 사과의 말을 건넸다.

다닐은 코를 훌쩍대면서 자기도 욕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둘이서 나더러 아까 한 말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하, 언제부터 한 편이었다고! 물론 진짜 진심이었던 건 아니었다.

잠시 후 우리는 다시 나란히 사이좋게 모여 앉았다.

“빛나는 얼음은 처음 봐.”

“나도.”

“나도.

아까 그 너구리 괴물이 한 걸까?”

하고 다닐이 말하자마자 유리가 걘 너구리가 아니라 토끼 괴물이라고 주장했다.

또 한바탕 시작하려나 싶었으나 다닐은 웬일인지 반박하는 대신에 바닥이 시리다며 몸을 웅크렸다.

한여름에도 얼음이 얼어붙은 장소이니 시린 게 당연했다.

가만히 앉아 있자 더 차가워지는 거 같아서 나는 두 발로 일어섰다.

일어서서 보니까 지하 동굴이 더 크게 느껴졌다.

어마어마할 정도로 컸다.

어두워서 안 보이는 걸지도 몰랐지만 벽의 끝이 보이지 않는데다 천장도 엄청 높았다.

이 숲에선 살아 있는 생물이고 뭐고 죄다 거대한 것들뿐인 모양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두리번거리자 저만치 위에 아까 우리가 떨어져 내린 터널 구멍이 보였다.

저 거리를 날아서 여기로 떨어졌다니, 그러고도 멀쩡하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우리가 대체 어디에 서 있는 거지?

그냥 얼어붙은 바위 둔덕인 건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까 그랬으면 크게 다쳤을 거 같았다.

발밑을 살펴보려고 애썼으나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한쪽 다리를 쿵쿵 굴러보았다.

옆에서 보고 있던 유리가 따라서 다리를 굴렀다.

거칠거칠한 것치고는 의외로 발이 별로 아프지 않았다.

거기다 느낌이 좀 특이했다.

침대 위에서 점프하는 거랑 비슷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훨씬 딱딱하긴 했지만 말이다.

유리 역시 나랑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양발을 모아서 자기가 제일 못하는 재주를 시도했다.

제자리 뛰기 말이다.

“알료샤, 봐봐!”

“와!”

침대에서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높이 솟아올랐다.

우리 둘은 잠시 열중해서 폴짝폴짝 제자리 뛰기를 했다.

그러는 동안 다닐은 어찌 된 영문인지 어정쩡하게 서서 우릴 지켜보기만 했다.

유리가 너도 해보라고 외쳐도 가만히 있었다.

왜 그러나 싶어서 잠깐 멈춘 나는 뒤늦게 뭔가가 좀 이상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설마 다리 다쳤어?”

“……아니.”

“그럼 걸어봐. 여기서 저기까지.”

다닐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다친 건 아닌데 발목이 좀 아픈 것뿐이라고 중얼거렸다.

천하의 엄살쟁이한테 어울리지 않는 태도였다.

그리고 다닐은 정작 진짜로 아플 때는 엄살을 떨지 않았다.

좀 긁히거나 넘어진 상처 가지고는 죽는 시늉을 하는 주제에.

갑자기 겁이 와락 났다.

“얼마나 아픈데? 아예 못 걸을 정도야?”

“아니, 그냥 좀…… 잘 모르겠어.”

진짜 많이 아픈가 보다.

큰일 났다 싶어졌다.

마찬가지로 제자리 뛰기를 멈춘 유리가 접질리거나 삔 거 아니냐고 아는 체를 하며 물었다.

다닐은 고개를 가로젓다 말고 도로 바닥에 웅크려 앉았다.

그러더니 기어이 다리를 부여잡은 채 끙끙대기 시작했다.

우리는 잠시 어쩔 줄을 모르고 호들갑을 떨었다.

“설마 부러진 건 아니겠지?”

“그랬으면 서 있지도 못했을걸. 역시 아까 떨어질 때 접질린 게 분명해!”

“그럼 어떡하면 돼?”

유리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건 자기도 잘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자 다닐이 차라리 아는 체를 말라며 버럭 쏘아붙였다.

죽을 만큼 아파도 싸울 힘은 있는 모양이었다.

나 역시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평소 어디가 아프거나 다쳤을 땐 그냥 어른들한테 가면 됐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우리밖에 없는 데다 정체 모를 지하 동굴 안이었다.

어쩌면 좋지?

“뚱보 너구리라면 무슨 방법을 알지도 몰라. 나한테 나뭇잎 붕대도 해줬잖아?”

퍼뜩 떠오른 생각을 말하자 유리도 다닐도 동의했다.

문제는 걔가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알아내고 와줄까 하는 거였다.

“지, 징그러워…….”

다닐이 끙끙 칭얼거렸다.

보니까 왼쪽 다리가 그새 엄청나게 부어올랐다.

돼지 너구리가 우릴 찾아낼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 없을 거 같았다.

위로 돌아가서 알려야 했다.

하지만 아까 우리가 떨어진 터널 입구는 너무 높았고, 거길 다시 타고 올라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입구가 있다면 출구도 있지 않을까?

나는 열심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워낙 크고 어두워서 주변이 분간이 되지 않았지만 잘 찾아본다면 출구를 발견할지도 몰랐다.

“둘이 잠깐 기다려 봐. 내가 한번 이 안을 샅샅이…….”

뒤져보고 오겠다고 하려는데 몸이 갑자기 옆으로 홱 쏠리는 바람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다닐은 주저앉은 채로 벌러덩 자빠졌고 유리는 그 위로 넘어졌다.

다닐이 곡소리를 내며 욕을 퍼부었지만 다들 똑같이 꽥꽥대고 있어서 들리지 않았다.

우리가 올라선 둔덕이 갑자기 움직였다.

무슨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우릉우릉 흔들리더니 갑자기 한쪽으로 홱 기울어졌다!

“뭐, 뭐야. 갑자기이!”

우리가 형편없이 밑으로 굴러떨어지게 된 건 당연했다.

그러고도 바닥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바닥 전체가 뒤틀리고 있는 거 같았다.

파도 태우는 것처럼 출렁출렁하면서 여기로 기울었다 저기로 기울었다 하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몇 번이나 찧었는지 몰랐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동굴이 폭발이라도 하려는 걸까?

나는 데굴데굴 구르다가 어떤 움푹한 지점에 콱 처박혔다.

그때 세상이 온통 난리가 난 것처럼 우르릉대던 소리가 갑자기 멎으면서 마구 일렁이던 움직임 또한 뚝 멈추었다.

머리가 핑핑 돌면서 오른쪽 팔이 빠질 것처럼 욱신거렸다.

그리고 눈앞에서 별들이 반짝거렸다.

별이 하나, 둘…… 근데 별이 좀 많이 큰 거 같았다.

게다가 둥그런 별도 있나?

“아우우, 코 깨지겠…….”

코를 박은 채 엎어져 있던 유리가 몸을 반쯤 일으키다 말고 멈칫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른팔이 자꾸만 아파왔다.

보니까 다닐이 내 오른쪽 팔을 세게 꽉 붙들고 있었다.

아까보다 더 힘을 주면서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게 뭐야……?”

“뭐가? 너도 별 보여?”

“별이 아니야, 똑바로 봐봐…….”

왠지 주위가 아까보다 좀 환해진 거 같았다.

대왕 별들이 반짝거려서일까?

나는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고서 똑바로 보려고 했다.

금색 바탕에 빨간색이랑 검은색 가루를 뿌린 거 같은 별 두 개.

그러나 그건 별이 아니었다.

눈동자였다.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머리에 달린 눈동자.

그게 우릴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거였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서.

아까 본 큰 괴물 새들이랑 비교도 안 됐다.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자 거대한 콧구멍 같은 것이 실룩이더니 찬바람이 훅 끼쳐왔다.

콧구멍은 우리 쪽을 향해 위협적으로 뻗은 거대한 주둥이 끝에 달려 있었다.

저걸 벌리면 얼마나 클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이렇게 커다란 녀석이 이런 데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까 우리가 떨어진 터널은 이 녀석이 사용하기엔 너무 좁았다.

도저히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요, 용이야…….”

“아냐, 와이번일지도 몰라. 맨날 용 흉내 내고 다니는 그 바보.”

유리가 거들먹거리는 말투로 속닥거렸다.

어이가 없었다.

허풍쟁이 와이번 이야기를 모르는 녀석도 있나?

게다가 쟤는 책에서 나온 용이랑 아주 비슷하게 생겼다.

와이번이라면 훨씬 작고 못생겨야 했다…….

아무튼 진짜 용이 틀림없었다.

묵묵히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진짜 용은 유리가 아는 척하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든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갑자기 무시무시한 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크르르르르…….”

“히익!”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섰다.

용은 새파랗게 질린 우리를 향해 위협적으로 으르렁대면서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었다.

그대로 우리를 한입에 먹어치울 기세였다.

나는 무작정 용감하게 외쳤다.

“지, 진짜 용이라면 왕자를 먹을 수 없어!”

진짜 용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심술 맞게 콧구멍을 실룩대기만 했다.

그러다 갑자기 목에 뭐가 걸린 것처럼 캑캑대면서 주둥이를 홱 돌렸다.

이윽고 커헉 하는 웅장한 트림 소리와 함께 웬 하얀 거품 덩어리가 저만치 날아갔다.

아무래도 속이 안 좋았던 모양이다.

한바탕 시원하게 토한 용이 이제 긴 목을 한쪽으로 구부리고는 자기 배를 핥기 시작했다.

온통 삐죽삐죽한 비늘투성이인데 배 부분만 좀 달라 보였다.

그때 나는 깨닫고 말았다.

“아, 어떡해. 아까 우리가 떨어진 데가 쟤 배였나 봐.”

“뭐? 진짜?”

나는 머리를 강하게 끄덕였다.

우리가 배 위에서 막 뒹굴고 뛰어대서 속이 안 좋아진 게 틀림없었다.

알고 그랬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몹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큼, 미안해.”

뒤늦게 사과의 말을 건네자 용이 거칠게 콧방귀를 뀌었다.

역시 단단히 기분이 상한 모양이다.

그럴 만도 했다.

좀 더 정중하게 사과해 보려고 했으나 용은 갑자기 좀 피곤한 거 같았다.

커다란 주둥이를 다시 이쪽으로 들이대더니 기껏 깨끗하게 핥은 배를 풀썩 깔고 엎드렸다.

그러고 우리를 게슴츠레 쳐다보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불빛이 담긴 듯한 두 눈 사이에 굵은 주름이 져 있었다.

왠지 서글퍼 보이는 표정이었다.

많이 아픈 걸까? 조심스럽게 묻자 엉뚱한 녀석이 대꾸했다.

“다, 다리 아파서 진짜 죽을 거 같아…….”

다닐이 와락 눈물을 터뜨렸다.

여태 긴장해서 꾹 참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제 살펴보니 발목이 아까보다 훨씬 부어올라서 보기 무서울 정도였다.

유리가 힉 하는 소리를 냈다.

“어, 어쩌면 좋지?”

“쟤한테 도와달라고 해볼까? 무슨 재주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용이니까.”

“하지만 쟤도 아파 보이는걸.”

그건 그랬다.

용은 이제 우리가 코앞에서 시끄럽게 떠들든 말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저 녀석도 만만치 않게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역시 빨리 뚱보 너구리를 찾아와야겠다.

거기다 뚱보 너구리라면 저 용이랑 아는 사이일지도 몰랐다.

그럼 다닐뿐만 아니라 용도 도와주겠지.

“유리, 여기서 얘들이랑 같이 기다려. 내가 가서 돼지 너구리 찾아올게.”

“뭐? 안 돼!”

유리는 곧장 펄쩍 뛰면서 나 혼자 보낼 순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픈 녀석들끼리 놔두고 갈 순 없지 않은가? 그리고 유리보다는 내가 가는 게 나을 거였다.

왜냐하면 아까 뚱보 너구리가 머리 위에 태워준 사람은 나였으니까.

그렇게 말하자 유리는 울상을 짓더니 용 녀석이 자기들을 물면 어떡하냐고 물었다.

기가 막혔다.

거기에 다닐까지 한몫 보탰다.

“가지 마, 알료샤! 무섭단 말이야!”

“야! 무섭긴 뭐가 무서워, 너넨 왕자 친구잖아! 그리고 쟨 우리 때문에 아픈 거란 말이야!”

단호하게 호통치자 다닐은 그게 아니라 유리가 또 허튼소릴 해서 용이랑 싸우게 될까 봐 무서운 거라며 되지도 않는 평화주의자 흉내를 냈다.

유리는 당연히 버럭했다.

나는 둘이 꽥꽥대도록 내버려 두고 몸을 일으켰다.

조심스럽게 걸음을 딛자 발밑이 출렁거렸다.

그 바람에 약간 흠칫했다.

그러나 용은 내가 자기 꼬리 부분을 밟으면서 지나가는데도 잠깐 실눈을 뜨고 볼 뿐 도로 맥없이 곯아떨어졌다.

나가는 쪽이 어디일까?

용이 눈을 감는 바람에 주변이 다시 어두워졌다.

나는 손으로 벽을 짚어가며 아까 우리가 떨어진 터널 입구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안이 생각보다 훨씬 크고 복잡한 거 같았다.

얼마나 그렇게 벽을 따라 혼자 걸었는지 모르겠다.

어느덧 애들이 떠드는 소리도 용이 코 고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뒤를 힐끔 돌아보자 시커먼 어둠 속에서 꾸불꾸불한 돌벽들의 띠만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겁이 찔끔찔끔 났으나 나는 용기를 내려고 애썼다.

어쨌든 다닐이랑 유리를 이곳까지 오게 한 건 나였으니까.

전부 내 바보 같은 모험 계획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다닐이 다친 것도 용이 아픈 것도 따지고 보면 전부 내 책임이다.

그리고 왕자는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게 무슨 일이든 간에.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 열심히 발걸음을 옮기는 도중에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휘파람 소리 비슷하기도 하고 호각 소리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상한 소리였다.

“……휘요오, 피요오오…….”

소리는 저만치 앞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거기다 왠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거 같았다…….

갑자기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발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앞에 뭐가 있는지 볼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 수도 있었지만 솔직히 그러기 너무 무서웠다.

저게 대체 뭐야? 귀신? 악령? 마물? 아니면 그냥 나쁜 사람?

온갖 상상이 떠올라서 턱이 덜덜 떨렸지만 그래도 멈출 순 없었다.

내가 여기서 뒤돌아 도망치면 저 앞에 있는 녀석이 나를 쫓아 애들 있는 데까지 갈 거 아닌가?

그래서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기도문을 외우며 계속 걸었다.

자애로운 성모님, 앞으로 절대 말썽 안 피울게요, 몰래 모험도 안 할게요, 아바마마랑 어마마마 훼방도 안 놓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도와주세요…….

“읏……!”

성모님이 내 기도를 듣기라도 하신 걸까? 주위가 갑자기 환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며 눈을 뜨자 저 멀리 탁 트인 출구를 통해 쏟아지는 햇볕과 바깥 풍경이 보였다.

그리고 내 바로 앞쪽에는 아까의 큰 새가 있었다.

멍청한 카나리아 같은 그냥 큰 새 말고, 멋진 독수리를 닮은 더 큰 새 말이다.

걔가 동굴 천장을 날면서 왠지 다그치는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왠지 갑자기 화가 치밀어서 냅다 악을 썼다.

“어쩌다 또 말썽이나 피우게 됐냐고?! 알면 어쩌게 이 닭대가리야!”

“말썽 피운 건 알아서 다행이구나.”

응? 새가 말을 한다? 그것도 내가 아는 사람 목소리를 흉내 내서?

“알료샤.”

당연히 새가 말을 할 리가 없었다.

갑자기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눈을 깜박거리며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자 그제야 내가 아슬아슬하게 발을 딛고 서 있는 툭 튀어나온 벽면과, 그 밑에 서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아바마마였다.

아바마마가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망했다는 생각이 하염없이 들었지만 나는 침착하게 굴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내 원래 계획은 실패했으니까 비밀로 하면 될 일이었다.

물의 정원에서 놀다가 우연히 수로 입구를 발견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하면 어른들이 알 게 뭔가?

하지만 막상 입을 열자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흐, 흐아아아앙!”

별안간 눈물이 와락 터지면서 몸이 저절로 확 기울었다.

덥석 나를 받아 든 아바마마가 뭐라고 투덜거렸으나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주위에 다른 아저씨들도 있는 거 같았지만 다들 뭐라고 말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엉엉 우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유리랑 같이 안 오길 참 잘한 일이었다.

나는 아바마마한테 안긴 채 바보처럼 흐느끼면서 어떻게 된 건지 무작정 털어놓았다.

말할 작정은 눈곱만큼도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까 죄다 불어버렸다.

아바마마랑 어마마마의 비밀 데이트 장소를 망치려고 했던 거랑 기밀 창고에서 지도를 훔친 것도 전부 다.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 또한 떠오르는 대로 아무렇게나 쏟아냈다.

난 아바마마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바마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 동굴까지 오게 됐지는 설명하려다가 힐끔 올려다보니 표정이 몹시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아, 어떡하지! 눈물이 아까보다 더 많이 쏟아졌다.

아무래도 그냥 화난 정도가 아닌 거 같았다.

나한테 매우 실망한 게 분명했다.

머지않아 어마마마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모님을 상대로 그러한 사악한 음모를 꾸몄으니 당연한 벌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어마마마가 나한테 실망하는 모습을 상상하자 확 죽고 싶어졌다.

아니, 어쩌면 이미 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몰래 궁을 빠져나간 걸 안 순간부터 말이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이 콱 메어서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때 등이 갑자기 얼얼하면서 딸꾹질이 나오지 않았다면 난 질식해 죽었을지도 몰랐다.

“히끅……!”

“정신이 좀 드시나, 왕자님?”

나는 딸꾹질을 하면서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약간의 시간이 걸린 뒤에야 어째서 고숙님의 웃는 얼굴이 보이는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보니까 고숙님뿐만 아니라 다닐네 아빠까지 함께 있었다!

내 등을 두드리고 있던 아바마마가 고숙님을 밀치고는 나를 한쪽에 있는 바위 위에 내려놓았다.

아바마마는 잠시 나를 보면서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윽고 한숨 쉬는 듯한 말투로 카뮤 아저씨-말엉덩이 아저씨 말이다-덕분에 우리가 궁을 빠져나온 걸 알아냈다고 말했다.

역시 말엉덩이 아저씨한테 들켰던 게 발단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다음 어마마마는 아직 우리가 여기까지 나온 걸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정말로? 믿을 수가 없었다.

어안이 벙벙해서 눈을 휘둥그레 뜨자 아바마마는 웃는 건지 찡그리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애초에 왜 그런 얼토당토 않은 계획을 짰느냐고 물었다.

말문이 막혔지만 달아날 방법이 없었다.

솔직하게 대답하는 수밖에…… 두 분 데이트를 망쳐서 단단히 화가 난 어마마마가 나랑만 같이 놀아주길 바랐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외로워진 아바마마 또한 어쩔 수 없이 나랑 더 놀아줄 수밖에 없게 될 거고, 그럼 난 매일매일 아주 즐거워질 거고, 그러다 보면 더 이상 두 분이 나만 빼고 몰래 사라져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까 봐 무서워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이다.

막상 전부 털어놓고 보니 몹시 한심하고 멍텅구리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난 아바마마가 날 비웃을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아바마마는 웃는 대신에 매우 이상한 표정으로 날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너무 바보 같아서 웃음도 안 나오는 걸까 싶어졌다.

딸꾹질과 눈물이 동시에 쏟아졌다.

“히끅, 히끅……!”

“……나 원, 피는 못 속인다더니.”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아바마마가 나를 향해 너털웃음을 흘렸다.

“너 계속 그렇게 울다간 눈 퉁퉁 부을 거다. 어마마마가 걱정하는 건 싫지 않아?”

“히, 히끅…….”

“너만 놔두고 우리끼리 어디로 떠나는 건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구나. 그건 네 어머니도 싫어할 거고, 나도 싫거든.”

정말? 진짜로 그럴까?

“정말이에요? 아바마마도 싫어요?”

“그렇다니까.”

“진짜 절대로 저만 두고 떠나지 않을 거죠?”

“대체 요즘 무슨 책을 읽는 거냐……?”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아 연거푸 확인하는 내 머리를 아바마마가 손바닥으로 마구 헝클어뜨렸다.

좀 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아졌다.

아바마마는 이제 다른 애들은 어디 있느냐고, 왜 나 혼자 저 위에 서 있었던 거냐고 물었다.

어느덧 고숙님이랑 다닐네 아빠가 가까이 다가와 있었는데 둘 다 웃는 표정이긴 했지만 눈은 꽤 심각해 보였다.

나는 얼른 아무도 죽거나 실종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고숙님이 요란하게 기침을 했다.

“크흠, 그건 좀 전에 잘 알려주셔서 뭐…….”

그랬었나? 그래도 다닐이 발목을 접질린 건 말 안 했던 거 같은데.

그리고 다닐이 시계를 잃어버린 것도 말 안 했던 거 같다.

다닐네 아빠는 내가 자꾸만 자기 눈치를 살피는 걸 알아챈 거 같았다.

아바마마 바로 옆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제게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왕자님?”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이 아저씨랑 이렇게 가까이서 얘기하는 건 처음이라 바짝 긴장됐다.

불곰 근위대장처럼 무섭게 생긴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무서운 건지 모르겠다.

아바마마가 없었다면 아예 입이 떨어지지도 않았을 거였다.

솔직히 나도 뭐가 뭔지 잘 몰랐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뭔가 잘 말해야 할 거 같았다.

안 그러면 다닐이 정말로 집에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그게에…… 사실 다닐이 실수로 발목을 약간 다쳤는데요, 사실 제 잘못이에요.”

다닐네 아빠는 잠깐 아바마마랑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런 일은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어라? 조금 놀라웠다.

내 잘못이라고 말해서 그런 걸까?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나를 향해 다닐네 아빠가 이상한 미소를 지었다.

“또 뭐가 있습니까?”

혹시 내 생각이 들리는 걸까?

“그게, 사실 걔가 지금 좀 많이 걱정하고 있거든요. 왜냐하면 실수로 회중시계를 잃어버려서…….”

“무슨 시계요?”

난 약간 당황했지만 얼른 생김새를 묘사했다.

어째서인지 다들 마구 기침을 해댔다.

“큼, 전 그게 없어진 줄도 몰랐습니다만…… 그런 걸로 그 앨 혼내는 일도 없을 거고요. 그러니 걱정 마시고 어디 있는지 알려주셔도 됩니다.”

진심일까? 솔직히 믿어도 될 거 같았다.

하지만 그럼 다닐은 왜 허구한 날 야단법석이지?

“알료샤, 왜 그래?”

내가 자꾸 미적대자 말없이 보고만 있던 아바마마가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왠지 갑자기 또 눈물이 나올 거 같아져서 나는 애써 더듬거렸다.

“사, 사실 그 멍텅구린 집에 돌아가지 않으려고 할지도 몰라요…….”

“예?”

“왜냐하면, 자기가 없어지면 다들 기뻐할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녀석이 그렇게 말했습니까?”

나는 머리를 끄덕이다 말고 그만 얼어붙었다.

다닐네 아빠가 갑자기 엄청 무서운 표정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녀석이 정말로 그런 멍청한 소릴 했단 말이지요.”

아, 어떡해, 아무래도 내가 일을 더 망쳐 버린 거 같아!

그만 좌절해서 엉엉 울음을 터뜨리자 아바마마가 나를 안아 올렸다.

그러고는 왜 남의 아들을 울리냐며 다닐네 아빠의 무릎을 세게 찼다.

다닐네 아빠는 헛기침을 좀 하다가 다가와서 자기가 말실수를 한 거 같다며 사과했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닐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영문을 모르겠으니 나더러 좀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엉엉 우느라 제대로 말한 거 같지도 않았다.

아무튼 확실한 건 어른들은 역시 바보가 맞다는 거였다.

왜냐하면 잠시 후 셋이 똑같이 이렇게 신음했기 때문이다.

“그걸 다 알고 있었다고……?!”

난 갑자기 한심한 기분이 들어서 며칠 전의 앤디미온 경도 딱 이랬다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고숙님이 다짜고짜 앤디미온 경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놈은 대체 왜 그런 중대 사항을 보고를 안 해!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나사가 빠져가지고는……!”

어이가 없었다.

아바마마 역시 어이가 없었는지 혀를 차며 핀잔했다.

“엄한 데 화풀이하지 좀 마라. 아무튼 이제 어쩔래?”

“어쩌긴! 큼, 왕자님, 저 좋아하시지요?”

불쑥 내 쪽으로 고개를 들이민 고숙님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어른들이 이런 질문을 할 때면 대부분 뭔가 함정이 있게 마련이다.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고숙님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다닐네 아빠 역시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쩌면 되겠습니까, 왕자님?”

잠시 후, 다닐네 아빠가 이번 일 가지고 다닐을 혼내지 않겠다고 나랑 몇 번이나 손가락을 걸고 약속한 뒤에야 우리는 다 같이 애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아까 나올 때는 엄청 어둡고 복잡하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엄청 단순한 길로 보였다.

갑자기 신이 나서 아바마마의 손을 놓고 앞장서서 달려가자 아까의 지하 동굴 방 모습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때문이야!”

“……포, 포!”

“임마!”

어라? 뜻밖의 풍경에 나는 잠시 주춤했다.

왜 다 같이 여기 모여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까 그 멋진 큰 새는 그렇다 쳐도, 내가 찾으려고 나갔던 뚱보 너구리를 포함해서 말엉덩이 아저씨까지 다 함께 있는 것이 아닌가?

뚱보 너구리는 나를 보고는 몹시 반가운 듯 팔을 파닥거렸다.

반면에 무시무시한 말엉덩이 아저씨는 머리 꼭대기까지 화난 표정이었다.

다만 나한테 화가 난 게 아니라 원래 화가 난 상태였던 거 같았다.

유리가 나를 향해 외쳤다.

“알료샤, 돼지 너구리 자식이 말엉덩이 아저씨 데려왔어!”

“포, 포!”

“시끄러, 돼지 너구리 자식아!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말엉덩이 아저씨를 데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하냐! 젠장할, 누가 아이반 놈 아들 아니랄까 봐……!”

말엉덩이 아저씨가 호통을 쳤다.

어찌나 위협적인 기세였는지 유리가 한 번만 더 그 별명을 입에 담으면 허리춤에 달린 검집으로 유리의 엉덩이를 흠씬 패줄 거 같았다.

그나저나 뚱보 너구리 녀석, 말엉덩이 아저씨 데리러 갔던 거였어? 둘이 아는 사이라고?

“근데 다닐은 어디 있어?”

“저기 숨어버렸어, 아까 말엉덩이 아저씨가 와ㅅ…….”

유리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을 땐 이미 늦었다.

말엉덩이 아저씨는 조용히 검집을 빼 들더니 왠지 호통보다 더 으스스하게 느껴지는 조용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이 시건방진 조그만…….”

“오오, 말엉덩이 대가리 너도 와 있었냐?”

날 뒤따라온 고숙님이 쩌렁쩌렁 반갑게 외쳤다.

잠시 후, 말엉덩이 아저씨가 고숙님한테 달려들었다.

아바마마랑 다닐네 아빠는 어린애처럼 뒹굴고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쳐 왔다.

“크르르르릉…….”

아바마마가 나타나자마자 아까 모습 그대로 심드렁하게 드러누워 있던 용이 다짜고짜 고개를 들고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나는 겁이 와락 났으나 아바마마는 오히려 그렇게 자기가 보고 싶었냐는 둥 오늘도 못생겼다는 둥 알 수 없는 소리만 골라서 했다.

그러고는 대담하게도 다가가 손바닥으로 용의 콧등을 툭툭 건드리기까지 했다!

그런 짓을 하는데도 용은 으르렁대기만 할 뿐 가만히 있었다.

희한한 건 용뿐만이 아니었다.

뚱보 너구리랑 큰 새도 좀 이상했다.

아무래도 이 녀석들 전부 어른들이랑 아는 사이가 분명했는데, 특히 아바마마랑 뭔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뚱보 너구리가 자꾸 내 쪽을 가리키면서 아바마마한테 뭔가 자랑스럽게 떠드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일단 다닐부터 찾기로 했다.

유리가 말한 구석을 봐도 보이지 않았다.

또 어디로 숨은 거지?

“다닐, 어디 있어?”

“여, 여기…….”

조그만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다가간 나는 곧 말문이 막혔다.

다닐은 바위 두 개가 언덕처럼 맞물린 아래에 머리만 집어넣은 채 웅크려 누워 있었다.

“거기서 뭐 해?”

“…….”

다닐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차라리 처음부터 대꾸하지 말던가!

아마 아빠들이 오자마자 재빨리 여기로 숨은 거 같았다.

다만 숨은 방식이 좀 문제가 있었다.

머리만 감춘다고 안 보이는 게 아니었으니까.

나는 아바마마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다닐네 아빠는 내가 하는 짓을 전부 보고 있었던 모양인지 곧바로 다닐이 숨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유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쳐다봤지만 괜찮을 거 같았다.

그러는 사이 말엉덩이 아저씨랑 싸움을 끝낸 고숙님이 손을 털며 다가왔다.

고숙님은 유리를 보고는 꼴이 왜 그 모양이냐며 혀를 끌끌 차더니 별안간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 비웃지 마요! 이게 전부 다 저 말엉덩이 아저씨 때문이라고요!”

왈칵 짜증을 낸 유리가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들먹였다.

말엉덩이 아저씨는 눈을 부라려 보이기는 했지만 아까처럼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아바마마한테 용이 아바마마랑 아는 사이냐고 물었다.

“아니. 난 이런 놈 모르는데.”

“크르르르르…….”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실은 네 어머니 친구라서.”

난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런데 뚱보 너구리랑 큰 새도 전부 어마마마 친구라는 거다!

그래서 원래 다 사이가 나빴는데 어쩔 수 없이 친하게 지내게 됐다는 거였다.

잘 이해가 가지 않아서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알기론 아바마마랑 다른 아빠들은 원래 전부 팔라딘이었다.

그럼 이 녀석들은 뭐지?

아바마마는 나를 번쩍 들더니 돼지 너구리는 포포리라는 마수이고 큰 새는 그리핀이라는 마수라고 알려주었다.

마수는 마물 같은 거라고.

용 역시 마물에 속한다는 거였다.

난 지금까지 마물이라고 하면 뭔가 악령 같은 무시무시한 괴물을 상상했는데, 이 녀석들은 전혀 그렇게 생기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 용이 킁킁하고 거대한 콧구멍을 실룩거렸다.

아바마마는 나를 용과 마주 보게 하고는 왠지 한탄하는 것 같은 말투로 덧붙였다.

“사실 이 녀석은 너와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란다.”

“어째서요?”

“네 어머니와 내가 이 시건방진 녀석을 손수 키워줬기 때문이지.”

그저 놀라워서 입이 헤벌어져 바라보자 용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혹시…… 오늘 쟤들이 우리 알아본 거예요? 내가 누구인지 알았을까요?”

“당연히 알았지. 네가 네 어머니 안에 있을 때부터 봐왔으니까.”

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날 알고 있었다니…… 여러모로 참 신기하고 놀라운 사실이었다.

보니까 유리 역시 몹시 놀란 표정이었다.

이 신기한 사실을 다닐한테도 얼른 알려줘야 하는데…….

“잘 끝났나 보네.”

나는 아바마마가 갑자기 말을 건 방향을 바라보았다.

다닐네 아빠는 ‘덕분에’라고 대답하면서 나를 향해 씩 웃었다.

한쪽 어깨에 다닐을 안고 있었는데 다닐은 그 야단을 떨어놓고는 뻔뻔하게도 뭐가 먹고 싶다는 둥 뭐가 갖고 싶다는 둥 온갖 어리광을 피우고 있었다.

나도 유리도 문자 그대로 기가 막혀버렸다.

여태 돌아가는 꼴을 대강 지켜본 용 녀석 또한 어이가 없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다짜고짜 속이 뒤틀린 듯 구역질을 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캑캑대지도 않고 곧장 쿠웨에엑 하며 요란하게 토를 했다.

이번에 나온 건 아까의 하얀 거품 덩어리가 아니었다.

훨씬 작고 단단한 거 같았다.

그게 챙챙 소리를 내면서 바닥을 굴러가다 고숙님의 발치에 멈춰 섰다.

다들 잠시 그것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거 네 그 시계 아니냐?”

고숙님이 다닐네 아빠를 향해 물었다.

잽싸게 달려간 유리가 확인하더니 우리를 돌아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가 미처 뭐라고 나서기도 전에 다닐이 발끈해서 용한테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용은 거대하게 트름할 뿐이었지만 이번엔 내가 발끈해서 다닐한테 따졌다.

자기가 잃어버린 걸 용이 찾아준 셈인데 왜 용한테 욕을 해!

그러자 유리가 맞는 말이라고 내 편을 들었다.

우리가 동시에 마구 악을 써대는 바람에 조용했던 동굴이 엄청 시끄러워졌다.

한 손으로 귀를 문지르던 아바마마가 불쑥 몸을 홰 돌리는 바람에 난 더 이상 다닐을 볼 수 없어졌다.

대신에 용이 보였다.

눈을 끔벅거리며 날 쳐다보는 용은 왠지 당황한 표정이었다.

걔 머리 위에 사이좋게 앉아 있는 그리핀이랑 포포리는 갑자기 좀 피곤해 보였다.

아바마마는 식식대는 내 등을 문지르면서 그만하라고 달랬다.

“워낙 반짝거리는 걸 좋아해서 종종 이렇게 오해를 사곤 하는데……. 이쯤이면 네가 자기 편들어준 걸 이 녀석도 알지 않을까?”

아직 분이 다 풀리지 않았지만 그만하겠다고 약속했다.

다시 앞을 보게 되자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있던 말엉덩이 아저씨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말엉덩이 아저씨는 갑자기 몹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왜 그러나 했는데 알고 봤더니 유리가 고숙님한테 꿀밤을 맞아서였다.

친구들 싸움을 말리는 대신에 합세했다고 말이다.

그리고 유리는 얼얼한 이마를 문지르면서 잘도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냐하면 다닐이 자기보다 더 혼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왕자님한테 할 소리냐? 네가 잃어버려놓고 그게 할 소리야?!”

“아, 알료샤한테 그런 게…… 으아아아앙! 잘못했어요!”

오! 참으로 오싹하고도 통쾌한 장면이었다.

하, 다리가 다친 걸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야 할걸!

솔직히 아저씨가 나와의 약속을 어긴 셈은 아니었기에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우리는 전부 돌아가는 길로 향했다.

용한테 또 보러 오겠다고 인사했더니 용은 한숨으로 대꾸했다.

숲을 빠져나가는 동안 그리핀이랑 포포리가 나란히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말엉덩이 아저씨랑 아빠들은 가는 길 내내 계속 끊임없이 떠들었다.

전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뿐이었는데 중간에 말엉덩이 아저씨가 자기는 아들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던 거 같았다.

난 왠지 심술이 나서 아저씨 별명이 왜 말엉덩이가 됐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고 한참이나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다닐은 자기 아빠랑 자기 집으로 가고 유리는 고숙님이랑 자기 집으로 가기로 했다.

중간에 헤어지고 나자 말엉덩이 아저씨랑 아바마마와 나만 남았다.

내려가는 길에 처음 보는 신기한 꽃이 잔뜩 피어 있었다.

노란색 꽃봉오리 같으면서도 반쯤 투명한 빛깔이었다.

“아바마마, 저거 따가서 어마마마한테 드리면 안 돼요?”

아바마마가 곤란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찰나 말엉덩이 아저씨가 옆에서 뭐라고 말했다.

그러고 둘이 무슨 말을 나누더니 잠시 후 아바마마가 신기한 꽃을 한 아름 잘라와서 내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혹시 어마마마가 이거 어디서 났느냐고 물으면 카뮤 아저씨가 줬다고 말하라고 일렀다.

아, 하긴.

미처 그 생각을 못 했구나.

난 왠지 고마워져서 말엉덩이 아저씨한테 아까 그런 질문을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말엉덩이 아저씨는 조금 웃더니 나더러 왕비님을 닮아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거기서 내 첫 서리숲에서의 모험이 끝났다.

아바마마랑 같이 궁전으로 돌아와서 비밀 모험의 흔적을 전부 지우고 나자 어느덧 해가 져 있었다.

난 어마마마가 내 궁에 들를 시간을 낼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가 마침내 오셨을 때 꽃다발을 드렸다.

“어머, 너무 예쁜 꽃이구나.”

어마마마는 몹시 기뻐하면서 나를 꼭 껴안고 볼에 입을 맞춰주었다.

처음 계획은 실패했지만 그것보다 훨씬 보람찬 하루가 된 거 같았다.

게다가 아바마마는 정말로 확실히 나의 비밀을 지켜준 거 같았다.

그건 솔직히 좀 멋졌다.

대왕 큰 새랑 뚱보 너구리랑 심술쟁이 용이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만큼이나.

<완결>

남편을 내 편으로 만드는 방법

4권

냥이와향신료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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