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두근두근 떨리는 가슴을 안고 결전의 날을 맞이했다.
내일이면 내 생일이다.
게다가 연회 전날은 아무 수업도 없었다.
어른들도 무척 바빠서 우리가 뭘 하고 놀아도 내버려 두었다.
어마마마한테 유리랑 같이 점심을 먹고 물의 정원에서 놀아도 되냐고 졸랐다.
어마마마는 웃으면서 너희끼리 얌전히 놀아준다면 참 고마울 거라고 허락해 주셨다.
일이 술술 풀려서 신이 났다.
최종 목적지가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 아직 몰라서 뭘 준비해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단 어디서든 낙서는 필수이므로 알록달록한 오일 파스텔 몇 개를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작년 성탄절에 할아버지가 선물로 준 주머니칼이랑 사탕도 챙겼다.
당연히 지도도 빼먹지 않았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 유리랑 점심을 먹으러 후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다닐이 같이 와 있었다!
안 간다더니 어떻게 된 걸까?
“얘도 같이하겠대.”
유리가 말했다.
나는 의아하게 다닐을 쳐다보았다.
수프 접시를 마구 휘젓고 있는 다닐은 오늘따라 매우 우울해 보였다.
“왜?”
“몰라. 지금 집에 끔찍한 친척들이 몰려왔대.”
“그래서 우리랑 놀겠다고? 언제는 겁나서 싫다고 하더니.”
둘보다는 셋이 훨씬 재미있다.
그래도 냉큼 다시 끼워주려니 좀 심통이 나서 혀를 끌끌 찼다.
유리가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다닐은 탁 소리 나게 스푼을 내려놓으면서 나를 쏘아보았다. 그러더니 눈물을 글썽거렸다.
“절교 안 할 거라며!”
“아직 절교한 거 아니야, 멍텅구리야!”
시종 아저씨들이 밥 먹으면서 소리 지르면 소화가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어쨌든 여긴 듣는 귀가 많았으므로 우린 그쯤 하고 배를 채웠다.
디저트로 커다란 산딸기 파이가 나왔는데 유리가 내 머리 쪽으로 산딸기를 튕겼다. 그래서 나도 똑같이 했다.
다닐도 따라 했다. 하얀 테이블보가 순식간에 얼룩덜룩하게 물들었다.
먹는 걸로 장난치면 안 된다고 타이르는 시종 아저씨들은 갑자기 매우 피곤해 보였다.
그래서 더는 장난 안 치기로 마음먹고 얌전히 바로 앉았는데, 산딸기가 전부 날아간 파이의 모양이 엄청 징그럽게 생겨서 비명이 꽥 나왔다.
“징그러워!”
“이게 뭐야!”
우리가 일제히 울며불며 비명을 질러대는 바람에 근처에 있던 근위병 아저씨들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왕자님?! 맙소사, 대체 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요?”
난 시종 아저씨들이 우리처럼 울기 시작할 줄 알았는데 아저씨들은 어른이라 그런지 울지 않았다.
이윽고 우리는 파이 대신 나온 생강 쿠키를 물고 물의 정원을 향해 달음박질 쳤다.
정원 주변에는 아저씨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으나 그다지 문젯거리가 되지 않았다.
이 안에서 우리가 술래잡기를 하든 숨바꼭질을 하든 잘 모를 테니까.
그러니 평소처럼 노는 척하다가 슬쩍 수로 입구로 들어가면 된다.
“저녁 식사시간 전까지 돌아와야 해.”
막상 일을 감행하려고 보니 역시 긴장이 되었다.
일단 다 같이 챙겨온 비품들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유리는 멋진 새총이랑 요요, 그리고 껌 한 통이었다.
다닐은 아무것도 안 가져왔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아주 멋스러운 회중시계를 가져왔다.
나는 감탄했으나 유리는 크게 콧방귀를 뀌었다.
“바보냐? 시계를 대체 어디다 써?!”
“어디다 쓰냐니, 시간을 확인하는 데 쓰지!”
“너 그거 잃어버리고 우리 탓이나 하지 마! 고자질쟁이 주제에 너네 아빠 시계 훔쳐올 배짱은 있었냐?”
“후, 훔친 거 아니야! 잠깐 갖고 놀려고 하는 거야!”
“그게 그거지 뭐야, 이 도둑놈아!”
사실 나도 다닐한테 그런 배짱이 있는 줄 몰랐다.
이번 일로 다닐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다.
의외로 멋진 모험 동료가 될 것 같아.
그런 말을 하려고 하는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다닐이 갑자기 유리의 따귀를 힘껏 쳤다.
나는 그야말로 깜짝 놀랐다.
유리 역시 너무 놀라서 화내는 것도 까먹은 거 같았다.
그런데도 다닐은 마치 자기가 얻어맞은 것처럼 다짜고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자기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도둑질을 한 적이 없다며 자기가 아기 때 살았던 수도원 원장님의 무덤에 대고 맹세했다.
난 솔직히 다닐이 그 원장님 얼굴이나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는 왠지 머쓱해져서 순순히 알겠다고 했다.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나는 근위병 아저씨한테 안 괜찮으니까 우리랑 같이 숨바꼭질을 하자고 졸랐다.
아저씨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지금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가버렸다.
잠시 후 우리 셋은 비밀 통로로 통하는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난 솔직히 지하 수로가 엄청 어둡고 으스스할 거라고 상상했다.
막 거미줄도 엄청 많고 금방 유령 같은 게 튀어나올 것 같은 그런 장소 말이다.
그래야 비밀 통로답지 않은가?
하지만 막상 직접 보니 너무 상상 밖이라 김이 팍 샜다.
일단 지하 수로 주제에 별로 어둡지 않았다.
벽에 달린 불빛 때문이었다.
통로도 넓고 깨끗해서 전혀 모험하는 기분이 안 났다.
하긴 아바마마가 어마마마랑 데이트하는데 지저분하고 기분 나쁜 장소를 오갈 리가 없지.
왜냐하면 아바마마는 안 그러는 척하면서 엄청 멋있는 척하니까.
“근데 이 방향이 맞는 거야?”
“지도대로 가고 있으니까 맞겠지.”
“저쪽으로 가보면 뭐가 나올까?”
“그냥 막혀 있는 거 아냐? 아무것도 안 써졌잖아.”
보니까 유리랑 다닐도 나만큼이나 실망한 게 분명했다.
나는 지도를 든 채 앞장서다 말고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
어쨌든 지금쯤 우리가 없어진 걸 눈치채고 여기까지 찾아볼지도 모를 일이니까, 얼른 빠져나가는 게 좋겠지.
“맨 뒤에 오는 놈 얼간이!”
“야, 갑자기 치사하게!”
냅다 소리친 뒤 달리기 시작하자 두 녀석 또한 흥분해서 쫓아왔다.
와다다다다.
그러고 보니까 여기서도 우리가 내는 소리가 엄청 크게 울려 퍼졌다.
그 기밀 창고에서보다 더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으와아아아!”
“와아아아악!”
우리는 고함을 왁왁 질러대면서 한참을 신나게 뛰다가 걷다가 뛰다가 했다.
얼마나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러다 보니 드디어 통로가 끝나고 어떤 거대한 방 같은 게 나타났다.
“우와, 저게 뭐야?”
다닐이 얼간이 같은 소리를 지껄였다.
계단 처음 보나?
물론 이만큼 커다란 계단은 나도 태어나서 처음 봤다.
궁에 있는 별의 탑만큼은 아니지만 아무튼 무지 높았다.
우리 앞에서부터 시작해서 저 위 까마득한 천장까지 꾸불꾸불하게 이어져 있었다.
목이 빠져라 위를 올려다보던 유리가 휘파람을 불었다.
“꼭 뱀 같다.”
“아니야, 소용돌이야.”
“뱀이야!”
“소용돌이야!”
“얼간이들아, 이건 그냥 계단이야!”
꽥 호통을 치자 유리도 다닐도 바보같이 다투는 짓을 멈추었다.
이윽고 우리는 앞다투어 계단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단숨에 올라가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힘들어서 중간중간에 좀 쉬어야 했다.
다들 땀이 나고 목이 타서 내가 가져온 알사탕을 하나씩 나눠 먹었다.
다음에 모험할 때는 반드시 병 같은 것도 챙겨야겠다.
왜냐하면 그래야 물이 있을 때 담아둘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수로에서 흐르는 물을 마셔도 되나?
“으아아!”
마침내 꼭대기에 다다르자마자 우리는 우르르 바닥에 널브러져서 한참을 헐떡거렸다.
지쳐 죽을 것 같았지만 원래 모험이란 험난한 법이라서 뿌듯했다.
“저거 봐, 우리가 저 많은 걸 다 올라왔어!”
우리는 잠시 승리감에 젖어 나란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보니까 그다지 거대한 거 같지도 않다.
그런데 그때 다닐이 갑자기 아래로 떨어질 것 같다면서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제 와서 집에 가고 싶다며 산통 깨는 소리만 골라 해댔다.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유리가 벌떡 일어나서 다닐의 멱살을 잡았다.
유리는 정말 머리끝까지 화가 난 것 같았다.
“가려면 혼자 가 이 겁쟁이 배신자야! 그다음부턴 너랑 절교할 줄 알아!”
“하, 하지만 알료샤가 절교 안 할 거라고…….”
“그건 네가 우리의 모험을 더럽히기 전의 이야기지! 앞으로 너랑 같이 안 놀 줄 알아! 같이 수업도 안 들을 거고 아는 체도 안 할 거고 네 편도 안 들어줄 거야! 그리고 너 대신 네 동생 끼워줄 거야!”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다닐의 재미없는 동생 녀석이랑 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건 사실 유리도 마찬가지일 거였다.
그 앤 콩알만 한 주제에 툭하면 어른스러운 체를 해서 꼭 한 대 때려주고 싶게 만들었다.
게다가 자기 형보다 더 심한 고자질쟁이였다.
하지만 어른들은 거의 다 그 애를 좋아했다.
어른들은 바보였다.
아무튼 다닐은 더 이상 집에 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식식거리는 유리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저것 봐.”
저만치 보이는 벽에 커다란 둥근 문이 달려 있었다.
이윽고 모두들 입을 다물고 나란히 그 앞으로 다가갔다.
문 밖에는 뭐가 기다리고 있을까?
가슴이 다시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나는 다닐을 돌아보았다.
“네가 열어.”
“내, 내가?”
“왜냐하면 그래야 또 배신 안 할 테니까.”
유리가 맞는 말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다닐은 문고리에 손을 얹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더니 숨을 몇 번이나 크게 들이마신 다음 힘껏 당겼다.
“우왁……!”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우리는 잠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방이 온통 키 큰 나무로 뒤덮여 있었다.
키가 얼마나 컸는지 하늘이 거의 안 보일 지경이었다.
바로 앞에는 처음 보는 꽃들이랑 열매가 마구 핀 언덕과 작은 오솔길이 있었다.
우리는 침을 꼴깍 넘기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설마 고작 이게 그 ‘아지트’는 아니겠지?
“저기에 뭐가 있는지 볼까……?”
언덕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고작 이게 모험의 끝이라면 정말 실망할 것 같다.
겨우 이걸 보자고 그 많은 계단을 올라왔다니, 그게 말이 되냐고?
이름 모를 풀꽃들 따위는 전혀 신기하지도 흥미진진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내 궁의 후원이 여기보다 멋지겠다.
“갑자기 맛있는 냄새 난다.”
절망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유리가 갑자기 어디서 샌드위치 냄새가 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배가 고프다고 칭얼댔다.
헛소리 집어치우라고 하려고 했는데 왠지 진짜인 거 같았다.
“여기에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열매라도 있나 봐.”
“아니야, 이건 틀림없이 칠면조 샌드위치 냄새야. 그리고 구운 사과 냄새도 나는 거 같아.”
유리는 이제 샌드위치와 구운 사과뿐만 아니라 초콜릿이랑 자기 아빠가 마시는 이상한 음료수 냄새까지 난다고 주장했다.
그러는 바람에 나랑 다닐까지 배가 고파졌다.
급기야 다닐이 똥개처럼 킁킁대지 좀 말라고 짜증을 냈다.
그러자 유리가 너야말로 겁먹은 똥개처럼 징징대지 말라고 맞받아쳤다.
다닐은 발끈해서 자기가 언제 그랬냐고 따졌다.
유리는 콧방귀를 뀌면서 더러운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다.
다닐이 유리한테 덤벼들었다.
“당장 취소해!”
“웃기지 마!”
“그만해 이 멍텅구리들아……! 야악!”
둘을 말리려다가 그만 나까지 같이 엉켜서 바닥에 넘어져 버렸다.
우리는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서로 비키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그러다 언덕 맞은편 쪽으로 사이좋게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으아아아악!”
별로 아프지는 않았지만 어지러워서 토할 지경이었다.
마침내 굴러내리기를 멈추자마자 유리가 곧 죽을 사람처럼 콜록대면서 자기 엄마를 찾아댔다.
그 바람에 나도 어마마마가 간절히 보고 싶어졌다.
다닐은 자기 옷이 찢어진 거 같다며 어떻게 할 거냐고 울먹거렸다.
“어떻게 할 거냐고? 네 동생한테 뒤집어씌울 거다, 이 울보 자식아!”
“……와, 왕자님?”
내가 호기롭게 외치자마자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우리 모두 깜짝 놀라서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얼어붙었다.
왜냐하면 바로 앞에 커다란 신발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긴 의자에 기대서 샌드위치를 먹던 아저씨들 역시 딱 우리처럼 얼어붙은 것처럼 보였다.
진짜 샌드위치가 있었다니.
점심을 먹은 지 얼마 안 됐는데도 배가 꼬르륵거렸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맙소사, 어른들이잖아! 그것도 까만 갑옷 입은!
최악은 멍하게 우리를 노려보는 아저씨 중 하나가 꽤 낯이 익다는 점이었다.
그럴 수밖에,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아빠들의 친구니까.
샌드위치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일어선 아저씨가 천천히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다닐이 와들와들 떨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 역시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망했다.
망한 걸까?
“다들, 이게 대체…….”
“……으아아아, 도망쳐! 말엉덩이 아저씨야!”
“뭐라고?!”
다음 순간 우리는 말엉덩이 아저씨의 다리 사이를 쏙 지나쳐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아저씨들이 미친 듯이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길을 등지고 무작정 덤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어두운 숲속 아무 방향으로 도주했다.
거대한 나무뿌리 밑을 지나고 바위를 넘고 우리 키만 한 덤불과 수풀을 헤치며 돌진하고…….
“……으, 우아아악!”
“아, 알료샤?! 왜 그…… 아아악!”
“끄아악!”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뭔가가 내 발목을 홱 붙드는 바람에 그대로 볼썽사납게 고꾸라져 버렸다!
내 비명을 듣고 돌아보던 유리 또한 갑자기 우스꽝스럽게 자빠졌다.
동시에 바로 뒤에서 다닐이 비명을 질렀다.
난 순간 우리가 무슨 덫이나 올가미 같은 거에 걸려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끼야아아아아악!”
다짜고짜 다리를 움켜쥔 정체 모를 무언가가 우리를 냅다 질질 끌고 가기 시작하는 바람에 비명이 미친 듯이 터져 나왔다.
발버둥을 쳐보았자 속도가 너무 빨라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수풀이 얼굴을 마구 스치면서 따갑고 어지럽고 토할 거 같았다.
이젠 우리 모두가 옷이 엉망이 되어버리게 생겼지만 옷 걱정 같은 거야 아무래도 좋았다!
우리가 악쓰는 소리랑 저만치서 아저씨들이 악쓰는 소리가 같이 섞여서 엄청 시끄러웠으나 아저씨들의 소리는 금방 멀어져 버렸다.
“이게 뭐야아아악!”
“몰라아아악……!”
갑자기 사방이 밤이 된 것처럼 깜깜해지더니 우리를 무시무시한 속도로 끌고 가던 자식이 잠깐 멈추었다.
아주 잠깐, 내가 미처 용기를 발휘해 종아리에 휘감긴 넝쿨 같은 놈에게 손을 대기도 전에 놈이 다시 세차게 움직였다!
“우와아아아아아악!”
순식간에 주위가 다시 환해지면서 이번엔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키 큰 나무들보다 훨씬 더 높이, 파란 하늘을 향해 높이 높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넝쿨 괴물한테 단단히 붙들려 있던 다리가 어느새 자유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우리는 그대로 형편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우리가 여기서 으깨진 치즈 덩어리 같은 꼴로 죽어서 발견된다면 어른들은 뭐라고 할까?
좀 슬퍼하다가 ‘언젠가 이럴 줄 알았지, 그 말썽꾸러기들’ 하면서 혀를 끌끌 찰지도 몰라.
아니면 지난번에 내가 표도르들이랑 싸웠을 때 걔들 엄마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그때 누가 먼저 ‘당신 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고 외쳤는지는 기억 안 난다-자기들끼리 싸워댈지도 모른다.
어마마마랑 아바마마가 싸우는 건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그래도 나 때문에 두 분이 싸운다고 상상하자 슬퍼졌다.
제발 이번 한 번만 살려달라고 성모님한테 기도하려고 하는데 그때 엉덩이가 갑자기 얼얼해지면서 뭔가에 푹 파묻혀 버렸다.
귀는 왜 이렇게 멍멍한 걸까, 하다가 그제야 우리 모두 여태 똑같이 얼간이처럼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시 비명이 뚝 멎었다.
그러자 이번엔 코가 간지러웠다.
여긴 대체 뭐지? 덤불 속인가?
나는 재채기를 하면서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에엣취! 다, 다들 무사해?”
“……아, 알료사?! 어디야?!”
“유리?! 나 여기야, 여기!”
“조금만 참아, 나의 라이벌이여! 내가 금방 구해줄 테니까!”
잠시 후 알게 된 사실인데, 유리가 나를 구해주기 위해 한 일이라곤 깃털과 지푸라기 더미를 파헤친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유리는 꽤나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어쨌든 살아남아서 다행이었다.
“괜찮아?”
“응. 여기 대체 어디야?”
“모르겠어.”
우리는 나란히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런 풍경은 정말이지 처음 보았다.
주변이 온통 웬 커다란 깃털이랑 지푸라기 더미로 뒤덮여 있었는데 덕분에 우리가 으깬 치즈 신세를 면한 것 같았다.
머리 위쪽으로는 벼랑 같아 보였고, 한쪽에서 희미한 무지개가 걸린 물줄기가 우리가 있는 곳을 지나치며 떨어지고 있었다.
“다닐은?”
“저쪽에.
근데 불러도 대꾸가 없어.”
다닐은 저만치 좀 떨어진 부근에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다.
어디 아픈가?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다가가자마자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러면서 툭하면 우리보다 많이 먹었다는 뻥은 왜 치는 걸까?
“야, 왜 또 그래?”
“……어졌어.”
“뭐?”
“시계가 없어졌어.”
훌쩍대면서 우릴 돌아보는 다닐의 얼굴은 몹시 창백했다.
거기다 대고 유리가 한심한 질문을 했다.
“뭔 시계? 설마 너네 아빠 회중시계 말이야?”
“그럼 그거 말고 또 뭐가 있어, 이 멍텅구리야!”
다닐이 우스꽝스럽게 쉰 목소리로 꽥 고함쳤다.
유리 또한 지지 않고 꽥 맞받아쳤다.
“사람이 헷갈릴 수도 있지 왜 짜증 내고 난리야! 그깟 시계 하나 좀 잃어버린 게 뭐가 큰일이라고 안달이냐?”
“이게 어떻게 큰일이 아닌데? 너네야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난 아니거든?!”
“그래서 어쩌라고, 애초에 몰래 갖고 나오질 말던가, 이 쫄보 자식아!”
만약에 우리 중 자기 아빠 시계를 훔쳤다가 잃어버린 바보 녀석이 유리였다면 저렇게 안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숙님은 가끔 바보 같긴 해도 고작 그런 걸로 화낼 사람이 아니니까.
만약 나였더라면 역시 별로 안달할 것 같지 않았다.
아바마마는 자주 유치하긴 해도-가령 나랑 놀아주기 귀찮아서 피곤한 척할 때라든가 어마마마를 뺏어가려고 할 때라든가-그런 식으로 유치한 사람은 아니니까.
솔직히 지금 장신구 하나 잃어버린 것보다는 우리의 모험이 망쳐졌다는 사실이 더 큰일이었다.
말엉덩이 아저씨가 우릴 봐버린데다 여기가 대체 어디인지도 모르겠다.
옷도 죄다 엉망이었고, 덥고 배도 고팠다.
그런데도 유리랑 다닐은 힘들지도 않은지 계속 싸워댔다.
“이게 다 너네 때문이야!”
“이 비겁한 자식 보게, 따라오겠다고 졸라서 끼워줬더니 이제 와서 우리 탓이야? 야, 됐으니까 너 혼자 집에 가! 이제부터 너랑 안 놀 거야!”
집에 가고 싶어도 갈 방법을 알아야 할 거 아닌가?
나는 둘 다 작작 좀 하라고 외치려고 했지만 다닐이 갑자기 와락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그럴 틈을 놓치고 주춤했다.
유리는 왠지 더 약이 오른 것 같았다.
“왜 또 울고 난리야! 다 커서 창피하지도 않냐?!”
“이, 이젠 집에 못 가! 아니, 안 갈 거야!”
“뭐? 왜?”
다닐은 엉엉 목놓아 울면서 어차피 아무도 자기를 안 찾을 거라는 둥 자기가 없어지면 다 기뻐할 거라는 둥 이해할 수 없는 말만 골라 해댔다.
그냥 혼나기 무서워서 그러는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자기가 이렇게 타락한 걸 알면 자기 아빠도 자기한테 질리고 말 거라면서 돌아가 봤자 내쫓길 거라고 주장했다.
시계 좀 잃어버린 게 그렇게 큰 죄가 되나?
난 이해가 잘 가지 않아서 유리를 쳐다보았다.
유리는 팔짱을 끼며 제법 어른스러운 투로 쏘아붙였다.
“그건 실수지 타락이 아니야.”
“도둑질은 타락 맞아! 너도 아까 나한테 도둑놈이라고 했잖아!”
“그건 장난이라고 했잖아 바보야! 그리고 자식이 부모의 물건에 손대는 건 죄가 아니랬어!”
매우 일리 있는 말이었으나 다닐은 자기는 주워온 애니까 죄가 된다고 떼를 써댔다.
그러면서 다들 자기 아빠한테 그러게 자기들이 말하지 않았느냐고 으스댈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아예 팔다리를 뻗고 드러누워 얼굴이 불그죽죽해지고 딸꾹질을 할 때까지 오열해 댔다.
대체 누가 뭘 어떻게 으스댄다는 건지 몰라도 괜히 나까지 서러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만 뚝 그쳐! 다 같이 말씀드리면 아무 일 없을 거야, 왜냐하면 너네 부모님도 알료샤 부하니까! 안 그래?”
호기롭게 외친 유리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생각을 해내다니, 맞는 말이긴 한데 좀 당황스러웠다.
내 친구들 부모님들이 내 부하라는 사실은 내게 있어 어려운 문제였다.
게다가 고숙님이나 다닐네 아빠는 아바마마 말도 잘 안 듣는 거 같았다.
그런 주제에 맨날 아바마마더러 폭군이라고 투덜거렸다.
나도 폭군이 되어야 할까? 사실 폭군이 뭔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다닐은 울음을 그쳤다.
그치긴 그쳤는데 이젠 배가 고프다며 칭얼거렸다.
나 역시 배가 고팠다.
마침 제 주머니를 뒤적대던 유리가 자기 껌도 없어졌다고 투덜거렸다.
껌을 씹어봤자 별로 도움 될 것 같진 않았지만 아쉬웠다.
어디 뭐 먹을 거 없나? 주변을 둘러봐도 온통 지푸라기랑 깃털뿐이었다.
“유리, 이렇게 큰 깃털 본 적 있어?”
“아니. 있잖아, 여기 혹시 둥지 아닐까? 무지무지하게 큰 새가 사는.”
“그만큼 큰 새가 진짜 있을까? 아기 새도 새알도 안 보이는걸.”
“어미 새가 안 보이게 가려놨을 수도 있잖아.”
우리는 일어나서 거대한 둥지 여기저기를 기웃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한쪽으로만 유독 지푸라기가 두껍게 쌓여 있는 게 눈에 띄어서 다가가 손으로 마구 헤쳐 보았다.
희고 누런 깃털이 흩날리면서 재채기가 자꾸 나왔다.
그때 내 옆쪽에서 딸꾹거리며 거들던 다닐이 불쑥 소리쳤다.
“와, 진짜야! 이것 봐!”
“뭔데, 아기 새라도 있어?”
“아니, 새알이야!”
진짜 새알이 있었다니!
그러나 후다닥 달려들어 바라본 새알의 모습에 나는 반쯤 어리둥절하고 말았다.
궁전 뜰에서 놀다가 새집을 발견한 적은 몇 번이나 있었지만 이렇게 큰 알은 정말이지 처음 봤다.
크기가 거의 우리랑 비슷했다.
거기다 색깔도 좀 이상했다.
무슨 알 색깔이 얼룩덜룩한 보라색일까?
“이게 알이라고? 무슨 알이 이래?”
기다란 지푸라기를 주워 들고 온 유리가 이상한 알의 껍데기를 쿡쿡 찔렀다.
알이 있을 거라고 주장한 건 자기였으면서.
“그만둬, 그러다 깨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먹으면 되지 않을까?”
“알을 그냥 먹을 수도 있어?”
“몰라, 근데 책에서는 다 그렇게 하잖아.”
분명 책에서 나오는 모험가들은 그랬던 거 같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아기 새가 산 채로 들어 있는 이상한 새알은 먹고 싶지 않았다.
“그만두라니…….”
나는 거기까지만 말했다.
다닐이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아무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손을 뻗어서 여전히 알을 쿡쿡 찔러대고 있는 유리의 팔을 잡았다.
유리가 나를 쳐다봤다.
나는 말없이 유리의 뒤쪽을 가리켜 보였다.
이윽고 우리 모두 나란히 그것을 보게 되었다.
그건 바로 큰 새였다.
유리가 말한 대로 무지무지하게 큰 새.
문제는 어딘가 좀 이상했다.
부리가 엄청 길고 뾰족하다는 거 빼면 표도르가 기르는 멍청한 카나리아를 닮았는데 다리가 네 개였다.
그런데 뒷다리 두 개는 아무리 봐도 새 다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저건 꼬리 아닌가?
마치 누가 변종 카나리아랑 점박이 고양이를 반반 잘라서 붙여놓은 다음 크기만 키워놓은 듯한 수상쩍은 생김새였다.
그리고 수상쩍은 큰 새는 왠지 몹시 화가 나 보였다.
“우와, 큰 새다!”
유리가 멍청하게 외침과 동시에 큰 새가 우리한테 덤벼들었다!
우리는 비명을 내지르면서 무작정 알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납작 웅크린 머리 위로 세찬 바람이 불었다.
“꾸꽤애애애액-!”
큰 새가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가래가 끓는 듯한 소리라서 좀 우스꽝스러웠으나 너무 무서워서 전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잠시 위에서 빙빙 돌던 큰 새가 공포스러운 부리를 겨누며 다시 돌진했다.
그대로 내 머리를 찍어버릴 작정인 모양이었다.
“으아아아아악!”
우리는 거의 한 덩어리로 구르다시피 하며 둥지 밖으로 떨어져 나왔다.
사실 그래봤자 멀리 가진 못했을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위에서 퍽 하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큰 새가 다시 악을 썼다.
“꽤애애액!”
“우아아아, 더 큰 새다!”
유리가 미친 듯이 감탄했지만 이번만큼은 멍청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나 다짜고짜 끼어든 더 큰 새는 멍청한 카나리아를 닮은 큰 새랑은 또 달랐다!
예전에 책에서 본 멋있는 독수리랑 표범을 반반 붙여놓은 것처럼 생겼다.
아무튼 걔랑 부딪힌 그냥 큰 새가 공중에서 공중제비를 돌다가 둥지 한쪽으로 떨어졌다.
큰 새는 좀 어지러운 거 같았다.
비틀비틀 일어서더니 잠시 누구든 눈에 띄면 가만 안 두겠다는 기세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더 큰 새는 그 앞에 마주 내려와서 점잖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큰 새가 마침내 정신을 차렸다.
“꾸꽤애액!”
“푸르르릉, 푸릉…….”
“꽤애액, 꽥!”
“푸르르르릉!”
뭐 하는 걸까?
쟤들 정체가 뭔지 몰라도 지금 모습만 보면 큰 새가 더 큰 새한테 뭐라고 마구 따지는 거 같았다.
신기하게도 덤벼들지는 않았다.
“쟤, 쟤들 뭐 하는 거야?”
“모, 몰라. 같은 편은 아닌 거 같은데…….”
수상쩍은 괴물 새들이 다투는 틈을 타 우리는 슬금슬금 일어서서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아까는 몰랐는데 이제 보니 한쪽으로 숲을 향해 길이 터져 있었다.
꾸꽤애애액!
큰 새가 상대방을 강하게 비난하는 소리를 신호로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려서 우거진 수풀 속으로 뛰어들었다.
“저기야!”
거의 우리 키만 한 수풀들을 뚫고 나와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고민하는데 마침 거대한 나무 둥치에 파진 굴이 눈에 띄었다.
우리는 일단 나무 굴 안으로 들어가 가쁜 숨을 돌렸다.
가슴이 여전히 세차게 콩닥거렸다.
컴컴한 굴속에 나란히 웅크려 앉아서 숨을 고르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사실 말 꺼낼 기운도 없었다.
공포에 질리고 지치고 배가 고팠다.
그리고 어마마마가 보고 싶었다.
“있잖…….”
우르릉, 꽝!
다닐이 나한테 뭐라고 말을 검과 동시에 밖에서 무시무시한 천둥이 쳤다.
하도 갑작스러워서 우리 모두 잠시 얼어붙어 버렸을 정도였다.
아, 여기서 소낙비까지 만날 줄이야!
아무리 모험가의 길이 험난하다 해도 그렇지 이건 진짜 너무했다.
내 옆에 바짝 달라붙어서 웅크리고 있던 다닐이 다시 조그맣게 속삭였다.
“알료샤, 비가 와.”
“소나기니까 금방 그칠 거야.”
“진짜 그럴까? 안 그러면 어떡해?”
어떡하긴, 왕자라 해도 비님한테 별수 있나? 지쳐서 그런지 짜증도 나지 않았다.
그런 나 대신에 유리가 자꾸 징징대지 좀 말라고 짜증을 냈다.
그러자 다닐은 훌쩍대면서 머리를 긁힌 거 같다고 털어놓았다.
“다쳤다고? 어떻게?”
“몰라, 근데 피가 나.”
어두워서 자세하진 않았으나 다닐의 머리는 완전히 멀쩡해 보였다.
거기다 놀다가 어디 좀 까지거나 하는 건 심심하면 벌어지는 일이었다.
우리 모두 그런 거 가지고 울 나이는 지났다.
가만 보면 다닐은 엄살도 제일 심했다.
유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이죽거렸다.
“야, 너 솔직히 털어놔, 우리보다 많이 먹었다는 거 다 뻥이지?”
“뻥 아니거든? 그리고 내가 아니라 알료샤 말한 거야!”
“뭐야?!”
유리가 곧장 나한테 덤벼드는 바람에 나는 뒤로 벌러덩 자빠질 뻔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고함을 꽥 쳤더니 되레 진짜 피가 난다며 자기가 더 크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아무 데도 안 아픈데 대체 어디가?”
“여기, 여기 만져 봐!”
“너네 뻥이면 다…… 어라? 진짜네.”
오른쪽 이마에 손을 대고 문지르자 그제야 약간 따끔거렸다.
손가락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역시 피가 맞았다.
아마 아까 도망치다 어디에 긁힌 거 같았다.
다만 어째서 나보다 유리랑 다닐이 더 호들갑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유리는 날 와락 껴안고는 먼저 가면 안 된다는 둥 내가 없으면 자기를 상대할 라이벌이 누가 있겠냐는 둥 듣도 보도 못한 소리를 해댔으며 다닐은 다닐 대로 훌쩍훌쩍 흐느껴댔다.
뭐라고 말해 보려고 했지만 녀석들 귀에 안 들리는 거 같았다.
어둡고 축축한 굴속에서 이러고 있자니 눈이 핑글핑글 도는 듯했다.
다들 갑자기 어디가 잘못된 걸까?
문득 예전에 비 오던 날 고숙님이 창가에 서서 흥얼거렸던 노래 구절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