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예상대로 유리는 내 계획을 듣고 굉장히 흥분했다.
그렇지만 다닐을 끼워주는 건 못마땅해했다.
다른 재수 없는 애들처럼(가령 왕재수 표도르나 뚱뚱보 안톤 말이다) 다닐이 실은 게네 엄마 아빠 친아들이 아니라서가 아니었다.
“걘 못 미더워, 쫄보 고자질쟁이잖아!”
그건 그랬다.
다닐은 툭하면 자기가 우리보다 많이 먹었다고 뻥 치는 주제에 무슨 일이든 금세 겁을 먹고 어른들한테 술술 부는 고자질쟁이였다.
문제는 걔뿐만 아니라 걔 동생도 고자질쟁이였다.
그래서 그 둘은 극심하게 서로를 증오했다.
아무튼 형제가 나란히 고자질쟁이가 된 이유는 게네 아빠가 엄청 무섭기 때문이었다.
맨날 한쪽 눈을 가리고 다니는데 옛날에 고문관이었다고 한다. 고문관이 뭔지 몰라도 굉장히 무시무시한 직업인 것 같았다.
솔직히 나라도 게네 아빠가 그 얼굴로 웃으면서 노려보면 다 말해버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애초에 비밀 기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준 건 다닐인데 따돌릴 순 없지 않나?
그리고 따돌림은 나쁜 짓이라고 그랬다.
“자자, 모두 집중하셔야 합니다.”
역사 선생님이 벽에 붙은 거대한 세계지도를 가리키며 지루한 설명을 반복하는 동안 우리 셋은 부지런히 쪽지를 돌리며 작전 계획을 짰다.
비밀 통로 지도는 역시 아무래도 본궁의 기밀 창고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냥 왕자의 명이라고 하면 들여보내 줄까?’
‘그것보다는 한번 구경시켜 달라고 귀엽게 졸라보는 건 어때?’
‘우웩, 그게 뭐야?’
‘팀을 나눠서 놈들 주의를 끌자. 나머지 한 사람이 들어가서 지도를 찾는 거야.’
‘근데 잘못 가지고 나오면 어떡해?’
선생님이 몇 번이나 헛기침하며 콧구멍을 벌름거렸지만 우리 모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수업이 끝나기까지 딱히 그럴싸한 수가 나오지 않았기에 결국 다 시도해 보기로 했다.
“다음 수업에는 쪽지 시험을 볼 겁니다, 특히 왕자님, 각별히 유의……!”
“가자! 선생님 다음에 봐요!”
마지막에 선생님이 뭐라고 외친 거 같은데 잘 안 들렸다.
우리 세 모험가는 그길로 목적지를 향해 정면돌파를 감행했다.
신나고 흥분되었지만, 막상 창고 근처에 다다르고 나니 가슴이 긴장으로 두근두근 떨리기 시작했다.
기밀 창고는 널따란 대리석 복도 제일 안쪽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커다란 검은 문 양쪽에 나란히 선 두 근위병 아저씨의 모습에 벌써부터 조금 겁이 났지만 꾹 참았다.
당당해야 했다. 난 왕자니까.
“왕자님?”
우리 셋이 다가가자 자기들끼리 뭐라고 떠들며 웃던 아저씨들이 흠칫하며 이쪽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딸기코를 한 아저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당당하게 요구했다.
“안을 구경하게 해줘.”
딸기코 아저씨가 옆의 콧수염 아저씨와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더니 뒤통수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송구하오나 안 됩니다, 왕자님.”
“왜?”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
“난 어린애가 아니야!”
침착하려고 했는데 그만 울컥해 버리고 말았다.
유리가 식식대는 내 어깨를 붙들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굉장히 이상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떠들었다.
“그냥 잠깐만 구경시켜 주면 안 돼요? 왕자님이 너무 궁금해하시는데.”
“송구합니다만…….”
“제발요. 네? 네?”
유리는 감기라도 걸린 걸까?
왜 갑자기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속이 불편해지려고 했다.
보니까 근위병 아저씨들 역시 속이 불편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다닐은 그저 겁먹은 표정으로 눈치만 살피고 있느라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역시 다닐이 사실은 우리보다 형이라는 말은 뻥인 것 같다.
역시 이 작전은 안 되겠다.
일단 물러간 뒤 다음 작전으로 넘어가야겠다고 마음먹는 찰나였다.
“여기서 뭣들 하십니까……?”
“흐엥……!”
다닐이 질겁하며 내 소매를 붙들었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상한 목소리를 내던 유리 또한 그대로 얼어붙었다.
맙소사, 하필 이럴 때 공포의 불곰 근위대장이 올 건 뭐야!
“왕자님? 그리고 두 분 공자, 지금 검술 수업 시간이실 텐데…… 여기서 뭐 하십니까?”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불곰 근위대장이 딸기코와 콧수염을 쳐다보았다.
딸기코가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의 행각을 일러바치는 동안 다닐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공포의 불곰 근위대장은 묵묵히 귀를 기울이더니 곧 우리를 엄격하게 노려보았다.
샛노란 눈동자가 번득거리는 모습에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나와 유리는 어느덧 서로 손을 꼭 맞잡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불곰 근위대장이랑 내 검술 선생님이 형제지간이라는 사실은 뻥인 것 같다.
“이곳은 함부로 출입하면 안 되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
“수업을 함부로 빼먹으시면 혼납니다.”
“웃기지 마!”
내 옆에서 와들와들 떨어대던 다닐이 다짜고짜 꽥 고함친 것은 그때였다.
하도 뜻밖이라서 나는 하마터면 감탄할 뻔했다.
다닐은 그대로 바닥에 양다리를 뻗고 주저앉아 엉엉 오열하면서 세상에서 자기를 혼낼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아빠뿐이라고 주장했다.
근위병 아저씨들이 뭐라고 끼어들려고 했지만 그 애 귀에 안 들리는 것 같았다.
목이 쉬고 얼굴이 불그죽죽해질 때까지 울부짖어대는 바람에 숨을 쉬고 있는지 걱정될 지경이었다.
하도 얼간이 같아서 나까지 눈물이 나려고 했다.
보니까 유리 역시 그만 그치라고 악을 쓰면서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그만 뚝 그쳐, 울보 자식아! 그러다 죽는단 말이야!”
“맞아! 아무도 우리한테 손대지 못해! 왜냐하면 난 왕자란 말이야!”
그렇다. 난 왕자다. 하지만 난 궁의 기밀 창고에 들어가 보지도 못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어마마마를 유치한 아바마마한테 빼앗긴 처량 맞은 신세다.
세상에 나만큼 비참한 처지의 왕자가 또 있을까?
다닐을 달래려고 용감하게 외쳤는데 갑자기 더 서러워져 버렸다.
“아, 아니 왕자님, 왕자님은 어째서…… 저어, 제발 울지 마십시오, 전하께서 아시면 저희는…….”
딸기코와 콧수염이 뭐라고 말하는지 잘 안 들렸다.
우리 셋 모두 똑같이 악을 쓰고 울부짖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곰은 아까부터 입을 바보처럼 벌린 채로 우리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난 불곰이 우리보다 더 크게 악을 지르려고 준비하는 걸 거라 짐작했지만, 불곰은 그러는 대신에 콧김과 한숨을 동시에 내뿜었다.
“정말 잠깐 구경만 하시는 겁니다.”
잠시 후 우리는 나란히 딸꾹질을 하면서 딸기코를 따라 비밀 서고 안으로 입장했다.
콧수염은 여전히 밖을 지키고 있었으나 불곰 근위대장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아무튼 성공했다.
심장이 기쁨과 흥분으로 다시 두근두근 뛰었다.
아주 잠깐일 뿐이었지만.
“이게 궁전의 기밀 창고야? 그냥 낡은 서재 같네.”
유리가 딸꾹거리면서 지껄이는 소리에 나는 자존심이 팍 상했다.
심지어 다닐도 딸꾹대며 거드는 것이 아닌가.
“그니까. 보석 같은 거라도 잔뜩 쌓여 있을 줄 알았는데.”
“보석은 보석 창고에 있어야지, 어두컴컴한 서고에 왜 있겠냐? 이 멍청이들아!”
짜증 나서 소리를 왁 질렀는데 신기하게도 내 목소리가 엄청 크게 웅웅 울려 퍼졌다.
우린 일제히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앞다투어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밖에서 보다 몇 배, 심지어 둘에 비해 보잘것없는 내 휘파람조차 연회장의 호각 소리처럼 웅장하게 울리는 것 같아 무척 신이 났다.
“떠드시면 아니 됩니다.”
여기 공기가 나쁜 탓인지 딸기코 아저씨는 갑자기 무척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우린 별로 아무렇지도 않은데, 어른들은 왜 그렇게 예민한 건지 모르겠다.
툭하면 먼지랑 환기 타령을 하면서 야단법석을 떨어대는 것만 봐도 희한했다.
“딸기코 아저씨, 휘파람 불어줄 수 있어?”
딸기코는 휘파람을 부는 대신 다짜고짜 양손으로 머리를 긁적대면서 요란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아, 역시 공기 때문인가 봐. 무리한 부탁이었나 보다.
좀 미안해지기도 했고 때마침 여기 온 본래의 목적도 떠올라서 나는 그를 내버려 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비밀 지도가 어떻게 생겼지?
“야, 저것 봐!”
휘파람을 멈추고 두리번거리던 유리가 퍼뜩 외치며 한쪽에 놓인 커다란 책상을 가리켰다.
우리는 일제히 우르르 거기로 다가갔다.
“우와!”
“이게 뭐야? 어른들 장난감?”
커다란 책상 위에 예쁜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둥그런 유리 새장 같은 온실에 입구가 달렸고 그 안에 작은 나무들이랑 꽃들이랑 분수들이 엄청 많이 있었다.
그런데 왜 사람은 하나도 안 보이지?
“이 문 진짜로 열리나?”
“함부로 만지시면 안……! 왕자님, 그것은 물의 정원의 복원도란 말입니다!”
뭐라고? 후다닥 달려온 딸기코를 보며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물의 정원은 어마마마 궁에 있는 엄청 크고 엄청 신비한 온실 정원이었다.
겨울에도 엄청 따뜻하고 꽃도 많고 숨바꼭질하기도 좋았다.
어마마마랑 거기서 다과 파티를 할 때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거짓말하지 마! 물의 정원은 이렇게 안 생겼어!”
“복원도라 하였습니다만, 위에서 보면 이렇게…….”
“복원도가 뭔데?”
딸기코 아저씨의 코가 아까보다 더 빨개지고 있었다.
어쨌든 딸기코는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니까 옛날옛날에, 내가 태어나기 오래전에, 아직 오메르타 가문의 공자였던 아바마마가 신부인 어마마마를 위해 공작저 뜰에 물의 정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두 분이 왕이랑 왕비가 되는 바람에 그걸 궁에 다시 짓느라 이 복원도를 만든 거라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는 딸기코는 어째서인지 갑자기 신나 보였다.
반대로 나는 심술이 났다.
뭐야, 그런 이야기였어?
물의 정원에 그런 전설이 있었는지 까맣게 몰랐다.
어마마마는 언제나 물의 정원에서 제일 예뻐 보였는데,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바보네, 그냥 옮겨서 심으면 되잖아!”
의기양양하게 코웃음을 치자 딸기코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기침하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딸기코도 뭘 찾고 있는 걸까?
“근데 정원을 어떻게 옮겨 심어?”
다닐이 머리를 긁적이며 묻는 말을 나는 무시했다.
딸기코가 복원도를 설명하는 틈을 타 혼자 책상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장난치던 유리가 슬그머니 다가와 내 옆구리를 쿡 찌른 것은 그때였다.
“나가자.”
“하지만 아직…….”
“이제 나가도 돼.”
은밀하게 속삭이는 유리의 눈동자가 자신만만하게 반짝였다.
그러면서 앞가슴을 탁탁 쳐 보이는 것이었다.
설마?! 하지만 대체 어떻게?
“우리 이제 나갈게. 별로 재미없어.”
“정말입니까?”
딸기코 아저씨는 조금 수상쩍다는 눈빛이었으나 흔쾌히 앞장서서 우리를 원래 왔던 문으로 안내했다.
이윽고 우리는 딸기코와 콧수염에게 고맙다고 손을 흔들어 보인 뒤 재빨리 안전한 아지트를 찾아 질주했다.
내 궁은 언제나 항상 듣는 귀와 보는 눈이 있을 거라고 유리가 말해줬다.
커튼 쳐진 발코니랑 후원조차 안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의 아지트는 매일 바뀌었다.
어른들도 종종 길을 잃곤 하는 별궁의 미로 정원이나 한적한 회랑의 커튼 뒤, 계단 밑, 한적한 시간의 대도서관 책장 속, 마구간 구석구석, 뜰의 나무 위 등등. 오늘은 계단 밑이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야?”
“간단해. 그냥 그 서랍 안에 있던데.”
유리는 별로 우쭐거리는 기색도 없이 품 안에서 돌돌 만 종이를 꺼냈다.
유리는 참 겸손하다. 툭하면 내 라이벌을 자처해서 짜증 날 때도 있지만 날 도와줄 때도 많았다.
유리가 고숙님보다 고모님을 더 닮아서 다행인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보니 그냥 평범한 종이라서 맞는 지도를 들고 온 건지 의심스러워졌다.
애초에 그런 중요한 지도를 그렇게 간단하게 찾을 수 있는 걸까?
보통 엄청 험난한 모험 끝에 간신히 발견하게 되는 법 아닌가?
나와 다닐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눈치챈 유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봐봐, 어떤 얼간이가 여기 떡하니 써놨어.”
“우와, 진짜네? 근데 글씨 진짜 못 쓴다.”
“응. 나보다 못 써.”
까끌까끌한 지도 맨 위에 누가 휘갈겨 쓴 글씨로 ‘지하통로 도면’이라고 써놨다.
글씨뿐만 아니라 그림도 엄청 지저분하고 얼룩덜룩해서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래도 눈을 가늘게 뜨고 열심히 들여다보자 ‘서리숲’과 ‘아지트’라는 단어는 알아볼 수 있었다.
아지트라니, 어른들도 우리처럼 아지트가 있는 건가?
우리는 잠시 머리를 맞대고 갸우뚱했다.
그 비밀 군사기지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아바마마랑 어마마마의 비밀 데이트 장소일까?
“그런데 다닐 너, 애초에 여기에 대해 어떻게 알아낸 거야?”
곰곰이 지도를 들여다보던 유리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자 다닐은 울 듯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말하기 싫어.”
“그렇게 말하니까 수상한걸.”
“뭐가 수상해?”
“왜냐하면 넌 고자질쟁이잖아.”
“난 고자질쟁이가 아니야! 내가 말하기 싫은 이유는 아픈 추억이 있어서란 말이야!”
“그게 뭔데 이 고자질쟁이야!”
다닐은 식식대면서 자신은 절대 비겁한 고자질쟁이가 아니라며 자기 동생의 목숨을 걸고 맹세했다.
하지만 다닐은 자기 동생을 처절하게 증오했기 때문에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엔 자기가 아기 때 살았던 수도원 원장님의 무덤에 대고 맹세했다.
그러고는 예전에 자기 아빠가 서리숲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도시락 바구니 안에 숨어서 따라가려다 들통나 된통 혼났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아서 물었다.
“왜 하필 거기 숨었어?”
“다른 데 숨을 만한 곳이 없어서…… 아무튼 그때 어른들이 하는 얘기 대충 엿들은 거라고. 무슨 엄청난 무기가 있는 것 같았어. 게다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엄청 재미있는 추억이 많았나 봐, 특히 너네 부모님.”
그래서 비밀 군사기지이면서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의 비밀 데이트 장소가 된 것이려나.
쳇. 내가 전부 망쳐주고 말겠어!
한참을 더 열중해서 지도를 살펴보았다.
워낙 엉망진창에 글씨고 그림이고 너무 난잡해서 뭐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걸로 우리의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
애초에 고난이 없다면 제대로 된 모험이 아니니까.
중간중간 몇 번이나 장소를 옮겨가며 궁리한 끝에 알아낸 건 어떤 ‘지하수로’를 통해 ‘아지트’의 근처로 이어지는 것 같다는 거였다.
지하수로가 뭔지는 나도 알았다.
문제는 어디서 어떻게 찾느냐는 거다.
“궁전 밑에 숨은 수로가 몇 개일까?”
우리는 올라갔던 포플러 나무 아래로 내려와 아무렇게나 축 주저앉아서 도무지 끝이 없는 것 같은 주변 풍경을 우울하게 바라보았다.
내 기분을 대변하듯이 사방에서 매미들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설상가상으로 다닐이 새 바지자락이 찢어졌다며 징징대기 시작했다.
“그냥 나랑 놀다 그랬다고 하면 되잖아.”
“그치만 수업 땡땡이친 거 들키면 어떻게 해?”
“어떻게 하냐고? 그냥 다 일러바쳐라, 이 고자질쟁이야!”
이젠 몰라, 될 대로 되라지!
버럭 쏘아붙이자 유리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다닐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멱살을 잡았다.
“넌 내 기분을 몰라, 이 나쁜 놈아!”
“너도 몰라!”
“아냐, 알아!”
“나도 알아!”
“네가 뭘 알아! 넌 너 괴롭히는 사람도 고자질쟁이 동생도 없잖아!”
유리가 낄낄 웃으며 바닥을 뒹굴었다.
나는 거기서 그만 짜증 내고 어마마마처럼 다정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유리가 얼간이처럼 웃는 모습을 보니 딱 고숙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친구들한테 짜증 내는 모습은 딱 아바마마 같을 거 같아서 갑자기 걱정스러워졌다.
아바마마처럼 유치한 사내가 되지 않을 거다.
“내 바지 빌려줄까?”
슬쩍 묻자 다닐은 여전히 식식거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외쳤다.
“정원이야!”
“바지 대신 정원에 가자고?”
“아니, 정원이라고! 정원 복원도가 놓인 책상 서랍에 지도가 있었잖아? 즉 물의 정원에 있는 수로가 틀림없어!”
나는 벌떡 일어났다.
혼자 자빠져 웃던 유리 또한 벼락이라도 맞은 듯 와락 일어섰다.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희한한 상상을 할 수가 있는 걸까?
말도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왠지 그럴싸했다.
잠시 후 우리는 유리 온실 입구에 다다라 있었다.
망할 전설을 들은 바람에 좀 그랬지만, 햇볓을 받아 무지개빛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정원은 역시 참 아름다웠다.
혹시라도 어마마마가 다른 누구랑 티파티를 열고 계시면 어쩌나 싶었는데 때마침 정원사 아저씨 말고 아무도 없었다.
“안녕, 하르 아저씨.”
“좋은 오후입니다, 왕자님.”
기다란 사다리에 올라선 정원사 아저씨는 무척이나 바빠 보였다.
뭘 저렇게 자르는 걸까?
게다가 무척이나 아슬아슬해 보인다.
우리는 일제히 사다리 밑으로 다가가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왕자님, 거기 그렇게 계시면…….”
“방해 안 해.”
“……다치실지도 모르니 저리 가서 노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왜 다치는데?”
“가지가 떨어질 테니까요. 제가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가지를 왜 자르는데? 불쌍하잖아!”
정원사 아저씨는 잠시 말없이 콧구멍만 벌름거렸다.
다닐이 내 팔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나는 불쌍한 가지를 잊기로 했다.
“아저씨, 이 밑에 지하수로가 있어?”
“그렇고말고요, 이 많은 분수 하며 당연하지요.”
역시 그렇구나!
나는 다닐의 상상력에 감탄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거기로 통하는 입구를 찾는 것이다.
우리는 사다리로부터 떨어져서 정원 여기저기를 기웃대며 지도를 다시 꺼내 들었다.
“그림 진짜 못 그렸다.”
“응.”
그래도 그다음부터는 허무할 정도로 쉬웠다.
얼룩덜룩한 계단 그림이랑 비슷한 걸 찾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폭포 분수와 장미 덤불 사이에 있는 작은 돌계단, 거길 따라 내려가자 노란 프리지아 꽃밭 너머로 비밀스러워 보이는 커다란 문짝이 나타났다!
심장이 엄청나게 빨리 뛰기 시작했다.
우리는 마른침을 꼴깍 넘기며 시선을 교환했다.
진짜일까?
조심스럽게 쪼그려 앉아서 두꺼운 철 손잡이를 잡고 소리 나지 않게 살짝 들어보았다.
그러자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과 저만치 희미한 불빛이 우리를 맞이했다.
“계단이 있어……!”
하, 둘만의 정원에 둘만의 비밀 장소로 이어지는 통로라니 그것참 아바마마답다! 유치하기도 하지!
어쨌든 마침내 비밀 통로를 알아냈다!
우리는 형언할 길이 없는 흥분과 희열에 휩싸여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깔깔 웃으며 정원 여기저기를 뒹굴다가 우르르 정원사 아저씨 밑을 지나쳐 밖으로 달려나갔다.
뒤에서 뭔가 쿵 하는 시끄러운 소리랑 함께 아저씨가 뭐라고 고함친 것 같은데 잘 들리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미친 듯이 질주하다가 마구간에 다다를 때쯤 간신히 진정하고 결전의 날을 잡기로 했다.
여태까지 지켜본 바로는, 아바마마랑 어마마마가 비밀 데이트하는 날은 일정치 않았으나 연회가 열리기 하루 전날 밤에는 꼭 사라지곤 했다.
그러니까 그 전에 해야 했다.
그래야 내 생일날 어마마마를 혼자 독차지할 수도 있을 테고.
“밤에 몰래 나오는 게 훨씬 어렵잖아? 차라리 내 생일 전날 낮에 잽싸게 다녀오는 거 어때? 그땐 어른들도 다 정신없을 테니까…….”
“대단한걸, 그거 괜찮은 거 같아!”
신나게 작전을 제의하자 유리 역시 눈을 반짝이며 호응했다.
다 잘 풀려가는 와중에 다닐이 갑자기 우물쭈물거리지만 않았다면 참 좋았을 것이다.
“근데 갔는데 누가 우릴 보면 어떻게 해?”
“국왕 전하 비밀 장소인데 누가 우릴 봐, 겁쟁아!”
“그렇지만 그쪽에 비밀 군사기지도 있다잖아. 지도엔 그냥 아지트라고만 써 있는데 정확히 어디인지 어떻게 알아?”
나와 유리는 잠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다닐은 역시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유리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야, 그렇게 무서우면 넌 그냥 빠져 이 쫄보야! 내가 뭐랬어, 알료샤. 애초에 이 자식은 끼워주면 안 된다고 했잖아!”
그렇지만 다닐이 없었으면 통로를 발견하지 못했을 건데.
그래서 나는 화를 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무서우면 빠져도 돼. 그래도 절교 안 할 테니까.”
“정말이지?”
“응.”
“성모님한테 맹세?”
“너 이거 고자질하면 진짜 절교할 거야, 겁쟁이 자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