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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허구한 날 혼자냐? 친구도 없나 보구나.”
“경은 왜 허구한 날 혼자이십니까? 따돌림당하십니까?”
“가만, 이건 대체 무슨 고기야? 냄새가 심상치 않은데.”
“기린 고기랍니다. 렘브란트 사절단이 신선한 걸로다 공수해 왔다나…….”
“웩, 그것들은 별걸 다 먹네.”
카뮤와 앤디미온은 사이좋게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사방이 온통 시끌벅적했다.
화려한 연회장을 채운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이 동시에 웃고 떠들고 싸우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댄스 플로어 근처에서 알짱대고 있는 어떤 우람한 놈이 하는 짓거리가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영애…….”
갈라르가 입을 열었다.
롱기누스 기사단의 전설적인 불곰은 더없이 비장한 기세로 씨근덕거렸다.
그 앞에는 어떤 가여운 사슴 같은 영애가 겁에 질린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네?”
“그…… 받으셨습니까?”
“뭐를 말인가요?”
“제가, 정성 들여 쓴…….”
“네?”
“그, 노란색 편지지였는데…….”
“네? 아아, 그 수상한 편지! 설마 그게 경께서 보내셨던 건가요?”
“…….”
차마 눈 뜨고 봐줄 수가 없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카뮤는 왠지 슬슬 화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보니까 앤디미온 역시 갑자기 퍽 불쾌해진 눈빛이었다.
“제 형님이라지만 정말로 전혀 지능이 발전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엔 다 머저리들밖에 없는 거냐? 저 불곰 새끼가 저러고 있는 거 보니까 진짜 죽을 때 다 됐다 싶어진다.”
“저도요. 차라리 제 눈을 찌르고 싶어지는군요.”
“아서라, 그래도 아직까진 아이반 새끼보단 낫지 않냐.”
두 사람은 일제히 아이반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반은 비교적 한적한 창가 자리에 엘레니아와 딱 붙어 서서 뭐라 뭐라 열심히 속닥거리고 있었다.
누가 곧 새신랑 아니랄까 봐 아주 싱글벙글한 꼴이 진짜 한 떨기 꽃이 따로 없다.
“짜증 난다.”
“좀 그렇긴 합니다.”
“저딴 가증스러운 놈들한테도 짝이 있는데 말이야.”
“살다 보니 세상이 그렇더군요. 그래도 힘내십시오, 아직 카뮤 경만 혼자이신 게 아니잖습니까?”
“어린놈이 네 걱정이나 해라. 누굴 약 올리려 드냐? 나머지 두 놈이라 해봤자 지들끼리 붙어먹을 것들이라고.”
“저야 뭐 알아서…… 한데 에스겔 경도 곧 버림받게 생겼던데 그쪽이랑 잘해 보시지 그러십니까.”
“뭐?”
“루브 경이 짝 대신 웬 아기를 만나버리셨다면서요? 아기는 못 이깁니다. 따라서 에스겔 경도 곧 헌신짝 신세겠지요.”
“젠장, 진짜 미친놈들 잔치 같잖아 이거.”
“그걸 이제 아셨습니까?”
“너 원래 이렇게 능글맞은 놈이었냐? 아무튼 아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우리 가증 최고봉인 전하 놈의 정신 나간 선물이 딱 묻혀버리게 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아, 진짜 천만다행입니다. 경사스럽기도 하고요. 다들 계획된 통보라고 믿는 것 같긴 하지만…….”
“아무렴 어떠냐. 어휴, 그 자식은 대체 뭘 먹고 그리 운이 좋은 건지 모르겠군.”
하고 두 사람이 다시 나란히 바라본 곳은 이번엔 왕비가 있는 쪽이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쏟아지는 축하 인사에 화답하느라 바쁜 왕비.
“어쩐지 오늘따라 더…….”
앤디미온이 어렴풋이 뒷말을 흐렸다.
카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내심 동의했다.
막 경사스러운 소식이 알려진 탓일까, 혹은 단지 여름 저녁 파티의 열기 때문이려나.
화사한 물빛 여름 드레스에 싸인 루드베키아는 오늘따라 유독 더 아름다워 보였다.
마치 만개한 것처럼, 연푸른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났고, 물결치는 금빛 머리카락과 뺨에는 따스한 생기가 돌았다.
그녀 자신은 그다지 인지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지만.
“왕비님.”
북적거리는 사람들로부터 마침내 잠깐 빠져나와 숨을 돌리는 루드베키아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뜻밖의 인물을 올려다보는 연푸른 눈이 동그래졌다.
“루브 경?”
“이런, 아무 일 없으니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그렇게 드러나 보였나요?”
“농담한 겁니다. 아무튼 인사가 늦게 되어버렸습니다만, 경하드립니다. 모처럼 기쁜 소식이더군요.”
하면서 넌지시 미소 짓는 루브의 모습에 루드베키아는 일순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딱히 놀랄 이유야 없었지만, 이 사람한테서 이런 식의 말을 듣는 것이 왠지 생소하게 느껴져서였다.
“고마워요, 정말로…….”
“별말씀을 다. 부디 전하 놈 말고 왕비님을 닮은 분이길 빌어야겠군요.”
“아하하, 다들 자꾸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진심 같은걸요. 저어, 그런데…….”
“예?”
“루브 경이 먼저 아버지가 되어버리셨다 들어서요.”
“아, 그거요. 하긴 벌써 들으셨겠군요. 혹 제 재치 없는 아버지가 왕비님까지 성가시게 하셨습니까?”
“아뇨, 아니에요. 단지 경이 왜 갑자기 그런 결정을 하셨나 궁금해져서요.”
물론 제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하고 덧붙인 왕비가 두 눈을 순진하게 깜박거리며 안대의 기사를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에 천진한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것을 잠시 물끄러미 마주 보던 루브는 이내 다시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별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제가 갑자기 그러고 싶어진 거니까요.”
“……그렇군요.”
역시 알 수 없는 분이다.
하고 생각한 루드베키아가 머쓱하게 눈길을 돌리는 찰나였다.
언제나처럼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루브가 불쑥 몸을 낮추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럼 일등충신은 여기까지. 부디 몸조심하시길.”
미처 인사를 되돌려줄 틈도 없었다.
손등에 내린 짧고도 정중한 입맞춤을 끝으로 안대의 기사는 그대로 휑하니 물러나 가버렸다.
진짜 속 모를 양반이다.
게다가 이 갑작스러운 작별 인사 같은 태도는 또 뭔가?
의아함에 잠시 넋이 나가 있는 루드베키아의 등 뒤로 으스스한 으르렁거림이 다가왔다.
“루비, 괜찮아?”
“아, 이스…….”
“저놈이 미쳤나.”
“봤어요?”
“봤지 그럼. 저놈더러 일등충신이라던 거 취소다. 내-”
“일등충신 얘기가 그 얘기였군요. 방금 그런 소릴 하시던데…….”
“그래? 충성 맹세라도 그런 식으로는 안 했으면 하는데.”
“의외로 전통을 고수하는 분인가 봐요.”
“어이가 없지만 왠지 저놈이라면 가능할 법도 하네. 저게 지만 기사인 줄 아나.”
투덜거리는 이스케의 험악한 낯짝을 루드베키아가 웃으면서 쳐다보았다.
따라서 이스케는 당황했다.
“왜, 왜 그렇게 웃어?”
“아뇨, 그냥.”
“그냥이 아닌 거 같은데. 뭔가 수상…….”
“이스, 나 배고파요. 바람도 쐬고 싶고.”
하여간 한결같은 놈 같으니. 그래도 한결같아서 좋구나…….
속내를 삼키는 동안 맞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연회장의 2층 발코니로 나왔다.
어느덧 밤이 무르익고 있었고, 저만치서 광장에서부터 터뜨리는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시종들이 간이 테이블에 요리 접시를 나르는 동안 루드베키아는 벤치에 앉아 불꽃에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와, 예쁘다…….”
“예쁘네.”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이스케는 하늘 대신 딴 곳을 보고 있었다.
루드베키아는 불꽃을 감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여기서 나갈까.”
“네?”
“라고 하고 싶지만, 다음 기회를 노려봐야겠지.”
지금은 왕비의 상태 때문이라지만, 평소에도 빌어먹을 도마뱀 자식 보러 가는 건 자유인데 야외 데이트는 자유롭지 못하다니 이 얼마나 부조리한가.
투덜거림을 삼키는 이스케의 어깨에 곱슬거리는 금빛 머리가 기대왔다.
“아기 이름 미리 생각해 두려고 하는데, 뭐가 좋을까요?”
“사내놈…… 큼, 왕자일지 공주일지 아직 모르잖아. 난 공주였으면 하지만.”
“둘 다 정해놓으면 되지요.”
오색빛깔의 불꽃이 여름 밤하늘을 계속해서 물들였다.
축제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