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화 (129/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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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여름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국왕 부부의 성혼기념일을 축하하는 무도회 당일.

모처럼 활짝 열린 앙그반궁의 성문을 통해 브리타냐의 온갖 내로라하는 귀빈들을 비롯해 각국의 사절단이 나름 심혈을 기울여 고른 선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속속히 도착해 왔다.

개중엔 이 마물 천지 북부 땅에 기어이 기린을 선사하고 말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사절단도 있어서 근위대가 고생 좀 했다.

물론 근위대뿐만 아니라 궁 내부의 모든 이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왕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간만의 대연회의 주인공인 만큼 남들을 기다리게 해야 마땅하다 한들 그만큼 특별히 더 신경 써서 준비해야 했다.

몇 주 전부터 몇 번이나 미리 점검하고 확인했는데도 막상 당일이 되자 우왕좌왕 정신없는 건 언제나 마찬가지인 듯했다.

거의 나절에 걸쳐 이리 저리 휩쓸리며 꽃단장을 마치고 나자 그야말로 진이 쏙 빠지고 말았다.

열린 창 밖으로 따스한 초여름의 바람이 들어왔다.

배가 고파왔다.

다만 진이 빠져서 그런 건지 그냥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요즘은 시도 때도 없이 허기졌으니까.

루드베키아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거울을 바라보고 있을 무렵에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방해했다.

지금쯤 연회장에 있을 오메르타 대공이 보낸 근위병이었다.

근위병은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왕께서 갑자기 사라지셨길래 여기 오신 줄 알았다고 털어놓았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대공과 함께 사절단을 상대하고 있었는데 연회장이 열리자마자 온데간데 사라졌다는 거다.

기념 연회가 곧 시작이거늘 왕이 사라졌다는 게 말이 되는가?

당장 왕이 사라진 상황에서 왕비 혼자 입장하는 건 영 그림이 그렇다.

“걱정 마십시오, 왕비님. 저희가 목숨을 바쳐 빠르게 찾아내겠습니다.”

“…….”

비장하게 다짐하는 근위병을 배웅한 뒤 루드베키아는 잠시 머리를 짚었다.

‘내 이 한결같은 인간을 그냥.’

중요한 날에 초를 치는 데 비상한 재능이라도 있는 거냐, 남편 놈아!

지금 배고파 죽겠단 말이야.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슬슬 그런 걱정이 들 무렵 또다른 인물이 슬쩍 찾아왔다.

이번에는 다름 아닌 엘레니아의 시녀 중 하나였다.

의아해하는 루드베키아에게 시녀는 조심스러운 얼굴로 왕께서 어디 계신지 안다며 좀 와보셔야 할 것 같다고 속삭였다.

한편, 왕께서 의도치 않게 행방불명이 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애초에 이스케는 갑자기 사라질 마음 같은 건 없었다.

정확히는 남들이 눈치챌 정도로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마음은 없었다고 해야겠다.

그랬다, 왕은 단지 잠깐 확인하려 한 것뿐이었다.

오늘 밤 왕비에게 선물을 공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확인하려 한 것뿐이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웬 수상쩍은 녀석들이 남의 소중한 선물 주변에 진을 치고서 수상쩍은 짓거리를 하려 들고 있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이게 감히 뭐 하는 짓이냐고 따지기도 전에 미친 듯이 들러붙는 바람에 오도 가도 못 하게 되어버렸다.

“즈언하! 아니 되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때려치시옵소서!”

“내가 부탁할게 오빠. 언제 내 입에서 부탁한다는 말 들어본 적 있어?”

“아무리 끔찍한 왕이라 해도 결혼기념일에 차이는 못난 꼴은 차마 보고 싶지 않단 말이다!”

결코 친구 잘 되는 꼴 못 보는 친우놈들과 은혜라곤 모르는 옛 종자놈과 인생에 도움 안 되는 동생 녀석이 나란히 합심해서 밑도 끝도 없이 아우성을 쳐대는 꼴이라니.

이스케는 새삼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회한이 이는 것을 느끼며 나직하게 한탄했다.

“이건 불충죄다.”

“천만에, 충심에서 우러나와 하는 짓이거든 이 진정한 충신도 몰라보는 폭군 자식아!”

“그런가, 충성스러운 카뮤 경, 그래봤자 짐의 일등 충신은 루브놈이야.”

“그, 그 애꾸자식 얘기가 갑자기 왜 나와?!”

“어어, 맞다 전하, 근데 그러고 보니까 루브 걔 왜 아이반이랑 둘이 밀월 여행 간 거야?”

“밀월은 뭔 밀월 밀명이겠지! 무식한 티 내고 앉았네, 에스겔 넌 이 상황에서 그딴 질문이 나오냐, 이 더럽게 수동적인 새끼야! 애꾸자식이 네 서방이라도 돼?!”

“전하가 미쳐 날뛸 줄 알았는데 어째서 카뮤 네가 미쳐 날뛰는 거냐.”

이스케의 앞을 배고픈 불곰처럼 굳건히 가로막고 선 갈라르가 의아하게 물었다.

잠시 조용해진 카뮤 대신에 엘레니아가 나섰다.

“그러고 보니 오빠 우리가 결혼을 앞둔 이 시기에 내 약혼자를 대체 어디로 보낸 거야? 그 얘기 아직 안 한 거 같은데.”

“그 얘기가 왜 여기서…….”

“왜긴 왜야, 오빠가 우리 얘길 귓등으로도 안 듣고 있으니까 하는 소리지. 그거 안 따질 테니까 이거 때려치우라고, 루비는 워낙 천사 같아서 오빠가 미처 선물 준비 못 했다고 싹싹 빌면 그럭저럭 용서해 줄지도…….”

“아니, 대체 이게 뭐가 어떻다고 이 야단법석을…….”

“제발 소신들의 간절한 충언에 귀를 좀 기울이소서, 즈언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니옵니다! 진짜 더위라도 드셨습니까?!”

“애, 앤디 너 말이야…….”

바로 그때였다.

“다들 여기서 뭐 하세요?”

일순 정적이 내렸다.

필사적으로 왕을 저지하려 애쓰고 있던 이들이나 열렬히 자신에게 매달린 충신들을 뿌리치려 애쓰던 왕이나 잠시 다같이 사이좋게 얼어붙어 버렸다.

그런 그들의 뭐 같은 모습에 천천히 다가온 루드베키아의 표정은 점점 더 의아해졌다.

“무슨 일이 생겼나요?”

“……그게…….”

“저건 대체 뭔가요?”

루드베키아가 머리를 갸웃하며 그들 뒤쪽을 바라보았다.

‘저건’ 다름아닌 별궁이었다.

정확히는 작은 건물 정면의 새로 지은 분수를 가리고 있는 거대한 휘장.

“별궁을 개조하신단 말 들은 것 같긴 한데, 저기에 뭐가 있는 거죠?”

“…….”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이스케가 미처 대답할 말을 생각해 내기도 전에 루드베키아는 이미 빠른 걸음으로 그들을 지나쳐 휘장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모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루비!”

“왕비님……!”

아직 안 되는데!

이스케는 곧바로 자신에게 들러붙은 녀석들을 뿌리쳤다.

정확히는 그러려 했다.

한데 어찌 된 셈인지 다들 알아서 먼저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게 도대체 뭐길래……. 어머?”

루드베키아가 휘장을 홱 젖힘과 동시에 갓 완공된 분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건물 정면에 앉은 아기자기한 조각상들이 거대한 디저트용 퐁듀 접시를 앞에 둔 듯한, 제법 그럴싸한 작품이었으나 이스케의 눈에는 그저 흉물스러운 뼈대로 보일 뿐이었다.

일단 뭔가 솟아야 말이지.

“분수를 만든 거예요?”

“큼, 그게…….”

콰지직.

뭔가가 터지는 듯한 파열음이 울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달콤한 내음이 풍기기 시작하더니만 그야말로 순식간에 사방을 에워쌌다.

초콜릿 냄새였다.

일제히 넋이 나가버린 모두의 눈앞에서 달콤한 초콜릿액이 보호 신성이 걸린 분수대 층층을 채우며 콸콸 흘렀다.

“망했다…….”

앤디미온이 중얼거렸다.

망한 건 자신인데 어째서 저놈이 망했다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이스케는 앤디미온을 노려보았다.

“아, 아무래도 아까 우리가 파이프를 잘못 건드린 거 같사옵니다…….”

“…….”

이스케는 이 자리에서 이것들을 전부 죽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일은 다음으로 미루어야 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멍하게 분수를 바라보고 있던 루드베키아가 갑자기 손으로 입을 가리며 상체를 푹 수그렸기 때문이다.

“우, 우우에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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