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7/136)

* * *

“오빠 미쳤어?”

엘레니아가 입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차분한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붉은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리는 모양새가 그녀 또한 충격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스케는 뻔뻔하게도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거 반어법이냐?”

“아니.”

“넌 왜 항상 토만 다는 거냐? 좀 객관적으로 감상을 들려주면 어디가 덧나냐?”

“…….”

“젠장, 앤디 네 생각은 어떠냐?”

불쌍한 앤디미온은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에 흔들리는 동공을 움직여 맞은편 별궁의 모습을 재차 바라보았다.

별궁이라기보다는 장식용 건물에 가까웠지만, 전 왕가까지만 해도 무슨 별실로 쓰였다고 하나 워낙 작고 위치도 애매해서 지금은 임시 폐쇄 상태였다.

폐쇄 별궁 자체가 충격적일 이유는 없다.

정문 주변에 모여 부지런히 작업 중인 인부들의 풍경 또한 딱히 충격적이라 할 수는 없다.

여름 축제를 맞이해 장식용 건물을 배경 삼은 분수를 만든다 한들 문제 될 이유는 전혀 없지 않은가.

문제가 있다면 오직 왕께서 분수에 무슨 짓을 하려느냐는 거였다.

앤디미온은 가까스로 신음을 흘렸다.

“좀…….”

“좀?”

“크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왕비님께서 초콜릿을 좋아하신다 쳐도…….”

“왜? 한번에 다 어쩌란 것도 아니고 생각날 때마다 즐길 수 있도록 하려는 건데.”

“그렇지만…….”

급기야 앤디미온은 도움을 호소하는 눈빛으로 엘레니아를 쳐다보았다.

엘레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오빠는 물의 정원을 만들면서 평생 쓸 머리를 다 쓴 모양이네.”

“말이 좀 심하군. 애초에 넌 내가 그 정원 만들 때도 떨떠름하게 굴었잖아.”

“그때야 오빠가 곧 죽을 사람처럼…… 아니, 차라리 지난번에 말한 그 왕비님 조각상인지가 낫겠어. 이거 그만두고 차라리 그걸로…….”

“싫다. 그건 안 돼.”

“……오빠가 생각해도 좀 아니긴 했나 보지?”

“그건 아니다만 그걸 세워두면 다른 녀석들이 자꾸 쳐다보고 다닐 거 아니냐.”

“…….”

할 말을 잃은 두 사람을 향해 이스케는 역시 이래서 동생들은 철천지원수라고 하는 거라는 둥 종자 놈 키워봤자 소용없다는 둥 투덜투덜하더니만 바빠 죽겠다면서 횅하니 가버렸다.

그 뒷모습을 노려보는 두 사람의 창백한 얼굴 위로 짙은 암운이 드리워졌다.

“말려야 합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앤디미온 경처럼 상식적인 분을 종자로 데리고 있었으면서 왜 저 지경이 됐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군요.”

“제가 보기엔 전하께서 요즘 인내심과 이성이 동시에 바닥나고 계신 듯합니다.”

“그냥 더위 먹은 거 아닐까 싶습니다만. 하여튼 이대로라면 큰일입니다.”

“예, 아무리 왕비님께서 천사 같은 분이라 해도…….”

벌써부터 루비가 가엾게 느껴진다.

내 오빠 놈 같은 남자 안 만나서 어찌나 다행인지, 원.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엘레니아는 문득 앤디미온이 갑자기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것을 느끼고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아뇨, 아닙니다. 아무튼 이를 어쩌면 좋지요?”

* * *

국왕으로부터 내린 비밀 임무라 쓰고, 은밀한 남부 관광이라 읽는 여정의 기대가 아이반은 내심 많이 컸다.

새 시대를 맞이한 황금빛 성도의 평화로운 풍경, 예술가들과 사기꾼들로 북적이는 거리, 각종 신기한 상점들과 무엇보다도 아리따운 피앙세에게 결혼 선물로 선사할 특산품 등등.

그러나 정작 로마냐에 도착하고서 그런 한가한 기대 따위는 일찌감치 날아가 버렸다.

일단 임무부터 후딱 해치우고 보자고 판단한 것까진 좋았다.

다만 그들의 목적지인 수도원이 낭만적인 중심지와는 한참 떨어진 외곽에 자리해 있는 바람에 도착하자마자 신성한 도시의 숨겨진 이면을 제대로 봐야 했다.

거기다 명색이 성도 주제에 소매치기와 거지들이 왜 이리 많은지 모를 일이었다.

미로처럼 얽힌 수상쩍은 골목들과 게토 빈민가를 지나는 동안 아이반은 그야말로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

어느 도시나 마찬가지라 한들 적어도 에렌딜에서는 어린아이 강도를 보기 힘들었다. 어린아이 자경단이라면 모를까.

마침내 도착한 수도원 또한 이미 더럽혀진 기분을 더더욱 더럽히는 데 크게 일조했다.

건물 자체는 주변 풍경과 어울리지 않게 쓸데없이 웅장했는데 아름답다거나 멋지다기보다는 무슨 거대한 수용소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내 저 그림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두 북부인의 신분을 확인한 수사가 이마의 땀방울을 훔치며 나간 뒤 아이반은 잠시 한쪽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

사탄의 하수를 물리치는 성모…….

“이거 그 그림 아니냐? 전하가 꿍쳐두고 가끔 혼자 보는 그?”

“……왕비님이 하도 경악하신 바람에 없애버리겠다고 난리 난리 떤 주제에 말이지.”

“이야, 이렇게 보니까 왠지 반갑다. 도마뱀 새끼 쓸데없이 잘생겼는데?”

키들거리며 팔짱을 끼고 그림을 바라보는 루브를 아이반은 잠시 물끄러미 노려보았다.

루브는 당황했다.

“뭐냐, 너도 전하 놈 닮아가냐?”

“……닮아간다니 뭐를.”

“도마뱀 질투하는 거.”

“지랄 집어치우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라. 내가 왜 이러는지.”

“글쎄다, 배고파?”

이 새끼가 언젠가 말한 고문관의 참뜻이 바로 이런 거였나?

아이반은 잠시 깊게 심호흡을 했다.

후아 후아, 힘내라. 내 도화선이여.

난 곧 결혼할 몸이다.

“너 대체 왜 이 일 자원한 거냐?”

“딱히 별 이유는 없는데. 마침 심심하기도 했고 전하한테 잘 보일까 싶어지기도 했고.”

“그 개소릴 나더러 믿으라고?”

“입걸레 주제에 짱구 굴리네. 내가 무슨 수상한 음모라도 품고 있을까 봐? 이제 와서 갑자기 의심스러워?”

낮게 이죽거리는 루브는 전혀 상처받은 표정이 아니었다.

아이반은 일순 당황했으나 재빨리 평정을 되찾았다.

“아니, 난 누가 뭐라 하든 네놈이 참된 전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말이야, 네놈 새끼가 여태 보인 꼴을 감안하면 도저히 이 임무와 네놈의 갑작스러운 자원 행위를 연결지을 수가 없단 말이다.”

“야, 내가 뭘 어쨌는데?”

뭘 어쨌느냐고? 뭘 어쨌느냐고?

아이반은 자신이 성격이 더럽다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적어도 북부의 팔라딘이자 국왕 전하 놈의 충신으로서 코딱지만 한 코찔찔이 소매치기쯤은 그냥 눈감아줄 아량 정도는 있다고 생각했다.

굳이 툭툭 걷어차고 다닐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아가 외국 땅에서 어느 얼빠진 건달 무리가 상대 못 가리고 부비적 댄다 한들 굳이 피를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 나사 빠진 놈은 낭만도 감성도 없는지 도무지 곱게 끝내는 법이 없는 것이었다.

거기다 딱히 욱해서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기에 사소한 걸로 일일이 욱하지 좀 말라고 핀잔하기도 뭐했다.

차라리 다른 놈들처럼 발끈해서 날뛰는 놈이었다면 더 나았을 것 같다.

“……좀 융통성 있으며 대범한 마음가짐을 갖출 수는 없는 거냐?”

“그러려 했는데 성가시게 하잖아, 갈 길도 바쁜데.”

“성가셔서 그랬…… 성가신 것쯤은 그냥 넘기면 되잖아!”

“왜?”

왜냐고? 아이반은 그만 다시 당혹감에 사로잡혀 잠시 버벅거렸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엾은 고아를 돕는 보람찬 일을 하러 왔으니까? 보람차고 관대한 기분에 젖어보자 이거지.”

“희한한 논리네, 그거. 난 그런 기분으로 온 거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

“X발, 됐다, 됐어!”

바로 그때 아까 그 수사가 돌아와 둘을 응접실 밖으로 안내했다.

아이반은 나사 빠진 동료 놈에게 눈을 부라리는 채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브는 마지막까지 반가운 그림 쪽을 돌아보며 실실대느라 여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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