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6/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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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맞이 축제와 연회 준비로 바쁜 건 왕비궁 또한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종일 찾아오는 방문객들 덕에 무척 북적거렸다.

연회를 앞두고 눈도장을 찍으러 온 이들을 비롯해 왕비의 눈에 드는 것은 즉 왕의 눈에 드는 것이라는 희한한 믿음을 품고 찾아오는 이들, 개인적으로 상담하러 찾아오는 이들 등등.

요즘은 잠깐 산책하러 나오는 시간도 사치처럼 느껴진다.

반쯤 완공된 정원의 팬지꽃 덤불 앞에 쪼그리고 앉은 채 루드베키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예전처럼 꽃을 꺾어서 화관을 만드는 짓은 그만둔 지 오래였다.

그때는 좋아서 하는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종종 그런 어린애 같은 충동이 이는 것이 희한하게 느껴졌다.

꽃향기를 맡으며 햇볕을 쬐는데 문득 가벼운 어지러움이 일었다.

갑자기 아까 두고 나온 초콜릿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초콜릿 생각도 자주 났다.

유아퇴행이라도 하는 걸까?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거리는 찰나였다.

“뭐 해?”

“아…….”

미처 일어서기도 전에 익숙한 체온이 등 뒤에서부터 홱 감싸왔다.

그 바람에 땅을 딛고 있던 발이 발라당 넘어갔다.

그녀는 그대로 그의 허벅다리 위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무 말 못 들었는데-”

“아, 내가 조용히 하라고 했거든. 한데 또 혼자 산책 중이셨나?”

“어차피 다 보이는 정원인걸요.”

“그래도 혼자 있으면 안 된다니까.”

“그럼 당신이 오면 되잖아요, 지금처럼.”

마음이야 굴뚝 같다만.

수풀 위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왕은 잠시 서글프게 머리를 긁적였다.

“젠장,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결혼에 방해꾼들이 너무 많은 거 같은데…….”

“원래 결혼은 시련의 연속이래요.”

“그런가……?”

저 좋을 대로 받아들인 이스케가 냉큼 그럴싸하다는 눈빛을 짓는 가운데 루드베키아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애써 삼켰다.

“오늘도 아침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었겠어요.”

“조만간 내 정신머리와 돼지 포포리의 정신머리를 등가교환하고 싶을 정도야.”

“포포 정신머리는 왜요?”

“걘 정신 사나운 거 좋아하잖아. 식사는?”

“아까 엘렌이랑 했어요. 마침 갈라르 경도 오셔서 같이…….”

“그 곰탱이 자식은 대체 왜 요즘 자꾸 여길 들락거리는 거지?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말이야.”

“연애 상담 때문에요. 이번에 혼담 들어온 영애가 제법 마음에 드나 봐요.”

지들 연애는 지들이 알아서 할 것이지 왜 그걸로 남의 마누라를 붙들고 늘어지는가?

이스케는 퍽 불쾌해졌으나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에 자신의 어깨 언저리를 툭툭 털어주는 루드베키아의 가느다란 손목을 쥐고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왜 그렇게 봐요?”

“그냥, 변함없이 가늘구나 싶어서.”

처음 만났을 때와 비하면 살이 붙었다고는 하지만…… 이스케는 이제 그녀의 손목을 놓고는 금빛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곧 축제네.”

“응, 그러네요.”

“둘이서 축제 거리 구경 같은 거, 언젠가는 할 수 있으려나.”

“자유를 상실한 기분이셔요, 폭군 전하?”

“폭군이라니, 내가 얼마나 관대한데 그래. 누가 뭐래도 짐은 관대하다.”

한편, 왕과 왕비가 모처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온실 정원 바깥.

왕비님이야 그렇다 쳐도 저 인간이 저러고 있는 건 진짜 못 봐주겠군.

그놈의 선물 타령으로 허구한 날 우릴 들들 볶는 주제에 양심은 어디다 뒀는지, 원.

진저리를 치면서 카뮤는 양 팔뚝을 벅벅 긁어댔다.

“온몸에 닭살이 돋아서 미칠 지경이다.”

“나도다.”

무뚝뚝하게 동조하는 갈라르의 솥뚜껑 같은 손에는 웬 앙증맞은 디자인의 편지지 한 묶음이 들려 있었다.

조금 전 성사된 연애 상담의 결과물이었다.

“근데 그건 대체 뭐냐?”

“아까 왕비님께서 하사하셨다. 연서를 보내려면 편지지부터 바꿔야 할 것 같다고 하시면서…….”

“…….”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냐?”

“……아냐. 아무튼 전하 놈이 지금 또 무슨 원대한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 몰라도 속히 저지해야 한다. 자칫 여름 축제가 대참사로 변모할지도 모른다고.”

그 전하놈의 누이께서 계신 자리에서 내뱉기에는 퍽 대담한 발언이었으나 갈라르도 엘레니아도 카뮤의 무엄함을 지적하지 않았다.

두 팔라딘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눈빛으로 정원 쪽을 응시하고 있던 엘레니아가 나직하게 혀를 찼다.

“왕이 저토록 이중적이어서야 북부의 앞날이 걱정되는군요.”

“…….”

“저는 차마 더는 못 봐주겠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고 몸을 홱 돌리는 엘레니아를 두 팔라딘이 말없이 빤히 응시했다.

새삼 놀란 것 같기도 하고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기도 한 표정들이라 엘레니아는 일순 멈칫했다.

“왜 그리들 보십니까?”

“……예?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신 듯합니다만.”

“…….”

“뭡니까?”

“실은…….”

카뮤와 갈라르는 잠시 주저하는 시선을 교환했다.

따라서 엘레니아는 절로 의아해졌다.

“경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유감스러운 말씀입니다만…… 아이반 녀석이 공녀님과 함께 있는 걸 볼 때마다 저희 기분이 지금의 공녀님 기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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