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여름 축제의 결말
바야흐로 아름다운 북부의 여름이었다.
창문 밖으로 황금빛 태양이 뜰의 초록빛 전경을 반짝반짝하게 물들였고, 사방에서 쓰르라미가 짝을 찾아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도 거리 곳곳은 설레는 마음으로 여름 축제를 준비하는 이들과 청춘을 불태우러 나온 이들로 북적였다.
그리고 왕은 기분이 몹시 저조했다.
“전하, 오늘이야말로 연회 예산을 승인해 주십사…….”
“전하, 축제 치안 인력 증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전하, 예상 사절단이 또 추가되었으니…….”
“전하, 전하! 현재 서리숲 기밀 구역의 공사 현장에서 갑작스러운 소란이…….”
“전하!”
“즈언하!”
상큼한 여름 아침부터 광분한 서리늑대 떼 같은 참모들에게 휩쓸려 눈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거의 몇 달 전부터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고 있었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아무튼 간에 왕은 기분이 저조했다.
왕께서 오늘따라 유독 기분이 안 좋으신 것 같다는 소문이 오전 무렵부터 궁내로 쫙 퍼지는 바람에 왕은 모처럼 점심 식사와 회의를 동시에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도 왕은 여전히 기분이 저조했다.
여느 때 같으면 냅다 왕비궁으로 달려갔을 터인데 오늘은 꿈쩍도 하지 않고 앉아서 허공만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왕의 상태를 전해 듣고 온 이들이 모처럼 사이좋게 한자리에 들이닥쳤을 때 왕은 변함없이 그 상태였다.
“여, 전하. 웬일로 왕비궁에 안 가셨습니까?”
“…….”
“저기요, 전하.”
“…….”
“너 설마 아직도 결정 못 한 거냐?”
멍 때리고 있는 왕에게 대가리 속이 온통 꽃밭인 친구 놈이 따지듯 이죽거렸다.
왜 꽃밭이 됐느냐 하면 결혼식을 코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누구는 일에 시달리느라 이 좋은 계절에 마누라랑 데이트다운 데이트도 제대로 못 하고 있거늘.
이스케는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아이반의 밉살스러운 낯짝을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엘렌한테 조언을 구했다.”
“그런데?”
“나더러 결혼기념일을 축하하고 싶은 건지 이혼당하고 싶은 건지 묻더군.”
“대체 이번엔 무슨 선물을 생각해 냈길래…….”
“실물하고 똑같은 다이아몬드상. 아니, 그냥 대리석도 아니고 퍽 괜찮지 않아?”
아이반은 대꾸하는 대신에 성호를 그으며 기도문 비슷한 말을 중얼거렸다.
‘신이시여, 이 새끼를 구원하소서!’.
그리고 카뮤는 혀를 끌끌 찼다.
“갈수록 태산이군. 예전에는 그럴싸한 거 잘만 생각해 내는 것 같더니 왜 이렇게 됐냐?”
“나의 비이자 북부의 어머니한테 어떻게 공자비 시절이랑 똑같은 수준의 선물을 주냔 말이다!”
펼치는 논리가 하나같이 저런 식이었다.
거기다 실물 크기의 조각상이라니, 재료가 다이아몬드든 돌덩이든 뭐가 다르겠냔 말이다.
차라리 지난번처럼 아예 궁을 새로 하나 짓는 게 어떠냐고 염병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이젠 옆에서 조언해 주기도 이상한 선물 뜯어말리기도 슬슬 지쳐간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이었다.
“제기랄, 어지간한 보석 같은 건 도마뱀 녀석 때문에 비교가…….”
“야야, 됐고 일단 보고부터 받아.”
“하는 것도 없는 주제에 웬 보고.”
“닥치시고 저기나 좀 봐봐.”
이스케는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아이반이 가리키는 대로 따라 열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연무장 쪽이 시끌시끌했다.
“쟤들이 왜.”
“새로 들어온 애들인데 영 맘에 안 들어서. 반은 근위대 지원이고 반은 우리 후배들이 될 건데 하나같이 비리비리하단 말이야. 그래서 우리끼리 꽤 좋은 최종 테스트를 생각해 냈거든?”
이스케는 그게 뭐냐고 묻는 대신 이번엔 또 뭐냐고 다그치는 눈빛으로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아이반은 어깨를 위풍당당하게 펼치고는 신명 나게 떠들었다.
“바로 신참 녀석들을 우리 철부지 도마뱀 녀석이랑 대면하게 하는 거다. 거기서 지리는 놈들은 다 탈락인 거…….”
“입단시키기도 전에 국가 기밀 군사 지역에 들이시겠다? 어느 놈 대가리에서 나온 생각이냐?”
“난 아니다. 말 엉덩이 너였냐?”
“아니. 저놈 아니었냐?”
“아, 그래, 저놈이었어.”
다들 일제히 ‘저놈’을 돌아보았다.
이 와중에도 언제나처럼 유유자적 싱글거리는 낯짝을 하고서 서 있던 루브가 머리를 갸웃했다.
“왜들 쳐다보냐?”
“……넌 뭐 좋은 아이디어 없냐?”
“글쎄, 난 워낙 무식해서. 내가 전하라면 그다지 걱정하지 않을 텐데.”
“어째서냐?”
“전하는 그 유명한 물의 정원도 생각해 냈잖아. 지금 너무 긴장한 거 아닐까?”
오메르타 성의 유명한 온실 정원으로 말하자면 그것과 비슷하면서 좀 더 큰 규모의 복제품이 왕비궁 뜰에 세워지고 있었다.
그 아래의 지하 수로와 현재 기밀 군사 기지로 알려진 어떤 장소를 연결하는 작업도 동시에 하는 중이다.
이스케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면서 머리를 싸쥐었다.
“젠장할, 도저히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는데 어떻게 긴장을 풀 수 있겠느냐고!”
“애초에 저놈한테 물어본 게 잘못 아니냐? 허구한 날 긴장이 너무 빠져서 뺀질뺀질 쪼개고 다니는 놈한테 뭘 바라냐?”
통렬하게 비웃으며 코웃음을 치는 카뮤를 향해 루브가 뺀질뺀질 살갑게 웃는 낯짝으로 입을 열었다.
“목젖 찢어버리기 전에 닥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미처 반격할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입만 뻐끔대던 카뮤가 간신히 고개를 돌려서 이스케를 바라보았다.
이스케는 여전히 머리를 싸쥔 채 끙끙대고 있었다.
“전하, 저대로 놔둘 거야?”
“뭐를.”
“감히 어전에서 폭언을…….”
“남부 얘기가 나온 김에, 아이반 너 아까 로마냐 쪽 친구들한테 재미있는 얘기 들었다고 하지 않았어?”
감히 어전에서 폭언을 내뱉은 당사자가 빠르게 화두를 돌렸다.
입 더럽기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주제에 새삼스레 턱을 벌리고 있던 아이반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엉? 아, 그래. 전하, 우리 친애하는 남쪽 친구들에 관한 애매하게 웃기는 소식을 들었는데…….”
“네 정신 상태가 애매하다는 뜻이냐?”
“네가 할 소리는 아닐 텐데. 아무튼 곤팔로니에레 기억하지? 지금 놈 말고 돌아가신 분.”
죽은 곤팔로니에레가 왜 갑자기 나오는가.
이스케는 그제야 머리를 천천히 들고는 아이반을 바로 보았다.
아이반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넌 만나본 적 없었지만 워낙 유명한 난봉꾼이었던 거 기억하지? 여기서도 도착하자마자 거하게 속 썩였잖아.”
“죽기 전에 사고라도 쳤다더냐.”
“대충 그래. 그것도 현 교황 성하의 오른팔인 바살로메 추기경의 조카딸이랑. 이야, 하여간 난 친구라니까!”
사후에도 길이 이어지는 난봉꾼 곤팔로니에의 유지여!
잠시 모두의 눈앞에 항아리처럼 풍만한 바살로메 추기경이 사지를 부들부들 떨며 털썩 주저앉는 풍경이 스쳐 갔다.
“에렌딜에 오기 전에 저지른 모양이군.”
“아니, 그보다 좀 전이래. 영애 쪽 부모가 요양 핑계로 시골 별장에 보내서 은밀히 처리했던 모양이야. 문제는 이번에 바살로메 추기경이 렘브란트 쪽 귀공자랑 혼담을 주선하는 바람에 양심이 찔린 영애가 고해성사 겸 옛일을 불었다나.”
“설마 렘브란트 쪽 귀공자가 그 고자 녀석 사촌 놈이냐? 얼마 전에 장가갔다고 나한테 편지 보낸?”
“……맞긴 한데, 그 인간이 왜 너한테 편지를 보내?”
“내가 아냐, 같이 검투 경기 참석한 사이 아니냐며 자꾸 추근대던데. 하여튼 새신랑의 신부께서 바로 그 조카딸이라 이 얘긴가?”
“정확히 그래. 로마냐 쪽은 쉬쉬하고 있지만 그런 대형 가십거리가 안 새어나갈 리가 없지, 워낙 심심한 동네잖냐. 한동안 미쳐 날뛰는 바살로메 추기경을 달래느라 성전이 난리 난리도 아니었다더군. 기도문 읊다가도 갑자기 혼자 벌떡 일어나서 왜 하필 그 보르히아 놈이냐는 둥 이미 죽은 양반을 어떻게 하겠다는 둥 그 애새끼라도 찾아 아비의 죄를 묻겠다는 둥 발작을 해대는 통에…….”
알 만했다.
그러나 발랄하게 킬킬거리는 친구들과 달리 이스케는 그다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표정이 아니었다.
“그래서?”
“엉? 그래서라니…….”
“그래서 문제의 애새끼를 찾아내서 아비의 죄를 물었다더냐?”
“아, 설마. 찾고 봤더니 아직 아장거리는 코찔찔이라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판이래.”
하염없이 기다리다 누가 먼저 꼴까닥 할지 의문스러울 수밖에.
좌절한 바살로메 추기경은 식식대면서 로마냐에서 제일 악명 뛰어난 수도원 부속 고아원의 서류에 사인했다고 한다.
“그렇게 안 봤는데 덩치랑 달리 쪼잔한 양반이군.”
“내가 다녀올까?”
뜬금없이 울린 질문 덕분에 잠시 정적이 내렸다.
도무지 맥락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말이었기에 다들 한참을 물끄러미 어떤 긴장 빠진 놈의 실실대는 낯짝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이스케가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어디를.”
“그야 로마냐를.”
“뭐 하러.”
“전하가 신경 쓰이는 문제를 해결하러.”
“짐이 신경 쓰이는 문제가 무엇인지 어찌 알아내셨는지?”
“왜 갑자기 끈적하게 구냐? 당연히 왕비님 문제겠지, 왕비님이 이딴 걸로 괜한 신경 쓰거나 옛일 떠올리게 만들고 싶지 않은 거잖아.”
“그거야…….”
“그래도 사생아일지언정 왕비님 조카일지도 모르는 애새낀데 좀 괜찮은 데서 살게 해줘야 마땅하다 생각하는 거 아냐? 그러니 내가 가서 직접 처리하고 오겠다고. 로마냐 구경도 제대로 할 겸 이쪽 귀가 짜증 나게 밝다는 것도 알려줄 겸.”
그야말로 청산유수가 따로 없다.
이스케는 그만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너 이 자식…… 이제부터 짐의 일등 충신이다.”
“지ㄹ…… 아니, 웃기고 자빠졌다!”
멀거니 사태를 지켜보던 아이반이 꽥 외쳤다.
카뮤 역시 만만찮게 기가 막힌 표정이었다.
저 안대 고문관 새끼가 갑자기 약이라도 빨았나?
“무슨 독심술 게임 하냐?! 그리고 네놈이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적극적이었냐? 왜 갑자기 어전에서 살랑거리고 난리야?”
“속지 마, 전하! 저 자식 요즘 아무래도 작정하고 권력욕을 불태우는 것 같다. 야망을 감추고 있는 게 틀림없어. 탐관오리 같은 자식!”
“말 잘했다, 말 엉덩이. 이 탐관오리 자식아! 애초에 네놈이 이런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부터가 심히 수상쩍다!”
“이봐, 물론 웬 애새끼 안위야 내 알 바 아니긴 하지만…….”
“이것 봐, 전하! 저 자식 말하는 꼴을 좀 보라고! 애초에 저놈한테 그런 인류애적인 임무를 맡긴다는 것 자체가 비상식적이라니까?”
“맞아, 맞아! 저놈은 그 고아원인지 수용소인지 내키는 대로 도륙하고 오고도 남을 놈이라고!”
“……이딴 것들도 동료라고.”
앞다투어 쏟아지는 동료 놈들의 근본 없는 비난에 루브는 나직하게 한탄했다.
그리고 왕은 그 비난을 깔끔히 무시했다.
“서두르면 축제 전에 돌아올 수 있겠군.”
“그러겠지. 간 김에 원래 고민에 보탤 만한 특산물 좀 찾아볼까, 시간이 남는다면.”
“과연 짐의 일등 충신이다.”
이러다 둘이 뜨겁게 손잡고 의형제라도 맺을 기세였다.
아이반은 그만 다짜고짜 외쳤다.
“그럼 소신도 함께 전하의 밀명을 받들겠사옵나이다!”
“너는 왜?”
그러게? 무작정 끼어든 아이반은 일순 당황했으나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나쁘지만은 않을 거 같다, 희귀한 남부 지역 특산품을 사랑스러운 피앙세의 선물로 가져올 수도 있을 테고…….
“그야 당연히 저놈 혼자는 도저히 못 미더우니 말이지.”
“난 그러는 네놈이 더 못 미덥다.”
이스케가 삭막하게 내뱉었다.
쿠궁! 막대 과자로 칼싸움하던 시절부터 우정을 나누던 친구의 배신에 아이반은 잠시 커다랗게 휘청거렸다.
“뭐 마음대로 해라. 따로 필요한 건?”
“없다. 그럼 난 채비하러 먼저 이만.”
살갑게 손을 흔들어 보인 뒤 자리를 뜨는 루브의 뒷모습을 다들 잠시 물끄러미 응시했다.
“난 왜 저 새끼가 갈수록 소름 끼치지?”
“확실히 소름 끼치게 놀랍더군. 저 녀석이 이토록 사려 깊으며 충성스러운 친구인지 미처 몰랐다. 그나저나 제기랄, 마땅한 선물이 안 떠올라서 미치겠다, 진짜.”
카뮤는 이스케의 멱살을 붙들고 짤짤 흔들며 ‘정신차려엇!’ 하고 악을 쓰고픈 충동을 가까스로 자제했다.
대신에 가까스로 충격에서 벗어나고 있는 아이반을 노려보았다.
“너 진짜 같이 갈 거냐?”
“사내로서 한 번 뱉은 말은 주워담지…….”
“됐다, 됐어. 뭐 조심해라.”
“왜 이간질하고 그래, 새끼야. 안 어울려. 우리 고문관이 그동안 우리랑 얼마나 많은 모험을 함께했는데.”
“난 그것도 참 신기하다. 저놈하고 에스겔은 원래…… 에스겔이야 원래 저놈이 하자는 대로 무조건 하는 놈이니 그렇다 쳐, 저놈은 대관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아무래도 카뮤는 아까 목젖 어쩌고 하는 폭언에 제대로 반격하지 못한 것이 어지간히 분한 모양이었다.
하여간 뒤끝 쩌는 놈. 쓴웃음을 삼키며 아이반은 시선을 돌렸다.
“그럼 전…….”
“그거야.”
“엉?”
“그거야.”
이스케는 어느덧 푹 수그렸던 고개를 홱 쳐들고는 매섭게 번득거리는 시선으로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실로 소름 끼치는 형상에 흠칫한 두 친구가 이번엔 또 뭘 떠올린 거냐고 다그치기도 전에 이스케는 이미 폭풍처럼 뛰쳐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