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136)

* * *

발치 주변에는 서리꽃들과 더불어 마기를 먹고 자라는 꽃들이 옹기종기 피어 있었다.

오랜만에 재회한 우리 부부가 동산 중앙의 평평한 바위에 나란히 걸터앉은 가운데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정확히는 헛기침 소리만 울렸다.

“큼, 크흠.”

“이스, 감기 기운 있어요?”

“……아니.”

“그럼 좀 으슬으슬한가?”

“…….”

“역시 안 되겠어요, 이 망토는 당신이…….”

“괘, 괜찮다니까!”

슬그머니 어깨에 둘러진 망토를 벗는 시늉을 하자 여태 내내 지평선을 노려보며 헛기침만 해대던 녀석이 그제야 황급히 나를 돌아보았다.

거참, 오늘따라 안 어울리는 짓만 골라 해대는구나.

왜 자꾸 웃음이 나오는 거지.

“그래요? 당신이 자꾸 기침을 하길래 역시 옷이 추운가 보다 싶었지요.”

모처럼 놀려먹을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기에 슬쩍 너스레를 떨자마자 우리의 한결같은 남편 놈은 곧장 약이 올라 나를 잡아먹을 듯 쏘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만 한참 만에 당당하게 한다는 소리가 고작 이거 아닌가.

“난 북부 최고의 팔라딘인데.”

“……그래서요?”

“몸이 추울 일은 없다 이거지.”

“…….”

“마음이 춥다면 몰라도.”

“마음이 왜 추워요?”

“그야 당연히 겨울내내 독수공방하고 있었으니까 그렇지.”

내 귀를 의심 중인 나와는 대조적으로, 참 뭐 같은 소리를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잘도 해대는 이스케였다.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자각은 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또…….”

“또?”

말끝을 아련하게 흐린 이스케가 잠시 머리를 긁적이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참 어색해 보이기도 하고 겸연쩍은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수줍은 것 같기도 한 모습.

흠, 아무리 오랜만이라 해도 이건 좀 이상한데.

앤디미온이 말한 그 비장한 각오라는 게 대체 뭐지?

이 소풍 바구니는 아닐 테고.

나는 도무지 꿍꿍이를 알 수 없는 남편 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녀석이 가져온 바구니에 담긴 샌드위치 포장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웬일로 이런 아기자기한 걸 다…….

“큼, 그나저나…….”

“네?”

“그게……. 밥은 먹었어?”

“지금 당신이랑 먹고 있잖아요?”

북부 최고의 팔라딘은 잠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보세요, 이스케 반 오메르타 씨.

한결같이 잘나신 주인공께서 왜 이러시나.

“몸은 좀 어때?”

“괜찮다고 아까도 말하지 않았어요?”

“그야 그렇지만…….”

“세르게이 씨한테 이미 들었을 거면서.”

“돌팔이 말은 미덥지 못해서…….”

“미덥지 못해서 여태 내내 독수공방했고요? 마음이 춥다면서 머리털 한 번 안 비치고?”

“아니, 그건…….”

“알아요, 알아. 게다가 엄청 바빴을 거란 거 말 안 해도 아니까.”

무려 북부의 왕이 될 분이니 말이지.

이 대사 어디서 많이 들어본 거 같은데.

웃음을 삼키며 음식을 베어 물려는 내 팔을 이스케가 덥석 붙든 것은 그때였다.

그 기세가 몹시 비장하여 나는 지레 흠칫했다.

“그게, 그런 게 아니란 말이야.”

“응?”

“난 솔직히…….”

두서없이 말을 잇는 녀석의 시선이 엉뚱하게도 내 샌드위치 쪽으로 미끄러져 갔다.

정확히는 샌드위치를 들고 있는 내 왼손을 보았다.

“이게 후회가 돼.”

하도 결연하고 차분한 음성이라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내 손이요?”

“아니! 반지가.”

“…….”

“반지뿐만 아니라 결혼식까지 전부.”

나는 잠시 입을 벌린 채 강퍅한 루비색 눈동자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래, 결혼식도 대리결혼에, 결혼반지도 로마냐에서 준비했던…… 그러나 그때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지난 일이었다.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될 운명이었으니까.

갑자기 불안한 기분이 일기 시작하는데.

만약 이스케가 나와의 관계에서 체시아레와 관련된 흔적을 전부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거라면…….

“하지만 이스, 그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

“아니, 아니, 그런 말이 아니야! 아, 이런 제기랄! 난 대체 왜 이 모양이지?”

언제 사람 불안하게 만들었나 싶게 갑자기 혼자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학을 해대는 녀석을 지켜보고 있자니 정신이 다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하여간 한결같이 오락가락하는 녀석일세.

“나랑 결혼한 게 후회된다는 뜻이 아니면, 뭐가 후회된다는 건데요?”

“……젠장, 꼭 후회된다는 뜻은 아니었어. 그러니까 뭔가를 다시 시작하겠다는 얼빠진 소리 같은 걸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그럼?”

“뭐랄까, 반성에 가깝지.”

“…….”

“그래, 맞아. 오히려 너야말로 후회되지 않는 걸까 하고 묻고 싶을 때도 있으니까.”

하고 재차 머리를 긁적거리는 그의 눈가에 쓰라리고도 달콤한 빛이 아른거렸다.

나는 그저 멍하게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랬다가, 한참 만에 겨우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하면 어떻게 해주게요?”

“……꿈도 꾸지 마!”

“푸하하하하!”

아니나 다를까, 언제 그랬냐는 듯 곧장 무저갱의 사신처럼 안광을 활활 번득이는 모습에 나는 그만 배를 부여잡고 폭소하고 말았다.

그런 나를 멀거니 바라보는 이스케의 낯짝이 서서히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왜 웃는 거야?”

“당신, 푸하하하! 차라리 말이나 못하면……!”

“너 말이야, 지난번부터 사람 진지하게 말하는데 자꾸…… 아 웃지 마! 내가 원래 이런 놈인데 어쩌라고! 애초에…… 루비!”

아, 깜짝아.

아주 가관인 표정으로 으르렁대던 남편 놈이 불쑥 한쪽 팔을 뻗어오는 바람에 나는 일순 간이 콩알만 해졌다.

몇 초가 흐른 뒤에야 내가 정신없이 웃다가 아래로 쓰러질 뻔했다는 민망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샌드위치가 수풀 위로 떨어졌다.

“……어머, 당신이 또 나를 구해줬네요?”

“좋단다.”

이스케가 혀를 끌끌 차며 나를 끌어당겨 무릎 위에 앉히는 동안 나는 애써 머쓱한 웃음을 유지했다.

순식간에 입장이 뒤바뀌어 버렸다.

이대로 질 순 없는데.

“역시 나의 기사님-”

“그만해.”

“왜요? 나의 기사님, 나의 왕이시여-”

“아, 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피하는 놈의 귓가가 새빨갛게 물든 모양새가 아주 흡족했다.

대체 왜 이런 거에 약한지 모르겠다만.

“후회 같은 거 있을 리가 없잖아요, 바보. 그래서 왕좌에 오를 각오는 되셨습니까, 전하?”

“그건 내가 먼저 해야 할 질문 같은데…….”

응? 이건 갑자기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래?

그대로 멈칫한 나를 그가 마침내 천천히 돌아보았다.

종일 어색하게 요동치던 시선이 마침내 내가 아는 깊고 견고한 그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문득 지난번 언젠가, 둘이 함께 롬의 동굴 안에서 성장통을 앓는 서리용을 돌보았던 그 오후가 떠올랐다.

내 친정을 향한 분노와 제 숙부를 향한 분노를 억누르면서 무언가를 열망하기 시작하는 듯하던 그의 모습이.

“애초에 네가 아니었다면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

“넌 후회가 없다 쳐도, 우린 결혼식도 제대로 치르지도 못한 사이인 데다, 처음부터 엉망진창에 너한테 제대로 해주지도 못했으니…….”

“…….”

“넌 오메르타의 공자비로서 북부에 왔어. 그런데 지금은…… 게다가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우리가 네 친정을 전부 없앤 셈인데 덥석 떠맡길 수는 없지.”

으음,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건지 영 알 듯 말 듯한데.

알쏭달쏭한 내 표정을 흘긋 살펴본 녀석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내 손목을 살짝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시선이 저절로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대로 얼이 빠졌다.

“그러니까 내가 하려는 말은……. 나의 왕비가 되어줘.”

너 설마 종일 내내 고민하던 게 그거였니?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깜박였다.

투박한 손바닥 안에서 찬연하게 빛나는 두 쌍의 금반지.

유독 선명하게 느껴지는 붉은 보석 세공이 눈에 띈다.

저거 설마…….

“이거 설마…….”

“설마 맞아. 사탄의 하수의 찬사. 워낙 커서 남은 걸로 다른 것도 만들 수 있겠던데.”

“대체 언제 이런 걸…… 그보다 이래도 되는 거 맞아요?”

최강 신성 소유 가문 출신에다 북부 최고 팔라딘 출신인 왕의 결혼 반지가 서리용이 꿍쳐뒀던 보석을 세공한 거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하긴 나부터가 아이러니 덩어리다만.

“원래는 네 보관 만들려고 했는데 역시 관만큼은 그 시건방진 녀석한테 양보할 수가…… 큼, 마음에 들어?”

그걸 질문이라고 하니?

나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눈을 흘기는 시늉을 했다.

슬슬 내 안색을 살피고 있던 녀석이 약간 흠칫했다.

“이것 때문에 종일 그렇게 뜸 들이고 있던 거였어요?”

“종일은 아니고…….”

“꼭꼭 숨어서 나타나지도 않고?”

“딱히 숨어 있던 건 아닌데…….”

긁적긁적.

그가 연신 뒤통수를 긁적이며 얼굴을 붉혔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신성 코어 대신 암굴 용의 심장이 박혀 있고, 포포리랑 그리핀이 가출 친구고 서리용이 같이 놀자고 졸라대는 여자가 브리타냐의 왕비여도 괜찮겠어요?”

“그렇게 치자면 나부터가 서리용 타고 교황청 박살 낸 놈이잖아. 다들 오해하고 있긴 하지만 덕분에 이래저래 건드리면 재미없는 줄 알고 있기도 하고.”

“…….”

“어둡고 흥미진진한 비밀은 모든 왕실의 기본 소양이라지.”

그럴싸하군.

부부는 닮는다던가? 말은 청산유수라니까.

나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는 손가락을 쭉 폈다.

손목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조심스럽게 손으로 옮겨왔다.

원래의 묵은 반지가 빠지고, 그 자리를 새 반지가 차지하는 감촉…….

그 감촉이 기쁜 만큼 원래의 반지 또한 소중히 보관할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 덕분에 우리가 만났으니까.

어둡고 흥미진진한 비밀이라 앞으로 또 무슨 일들이 벌어질지 조금도 짐작이 가지 않고, 원래 알던 것과는 딴판으로 변해버린 이 세계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내게 이런 것이 허용된 것인지 아직까지도 가늠조차 할 수 없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두렵지 않아.

약지에 끼워진 보석이 맑고 깊은 붉은빛으로 반짝거렸다.

내 손을 잡고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는 그의 눈 또한 같은 빛깔로 반짝이고 있었다.

또 허를 찔려버렸다.

불현듯 가슴이 세차게 뛰는 느낌에 나는 괜스레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영광이네요, 왕이시여.”

그가 내 손을 놓고 양팔로 나를 꽉 끌어당겨 안았다.

몸이 완전히 폭 파묻혔다.

“내가 왕이라면 너는 내…….”

홧홧한 속삭임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맹세에 가까웠다.

눈을 돌려 봄 하늘을 바라보는 내 입가에 미소가 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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