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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놔, 저 븅신 새끼가 진짜…….”
롬의 동굴로 이어지는 음산한 골짜기, 블루베리 동산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바위 더미 뒤쪽에 옹기종기 움츠린 이들 가운데 누군가가 통렬하게 중얼거린 소리였다.
이에 슬그머니 점잖은 꾸짖음이 뒤따랐다.
“입조심 좀 해라, 그래도 곧 있으면 우리 군주로 모셔야 한다고.”
“심하기는 X발, 지금 웃음 참느라 뒈질 것 같구먼.”
“그건 그래. 저 흉포한 새끼가 대체 뭐 하는 꼬라지냐, 진짜. 내가 다 쪽팔려 죽겠다.”
“저어, 다들 목소리 좀 낮추셔야 하지 않을까요?”
“으헉!”
뒤쪽에서 불쑥 울리는 끽끽대는 음성에 사이좋게 주거니 받거니 하던 아이반도 루브도 일제히 벼락이라도 맞은 듯 흠칫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두 팔라딘의 시선이 이어 사납게 번득였다.
“뭐냐 너, 넌 언제 잽싸게 끼어들었냐?”
“저는 이스케 경의 종자로서 이 희대의 명장면을 두고 보고 본받아 언젠가 유용하게 써먹을 때가…….”
“하! 귓가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가 지금 뭐라는…….”
“나도 있다. 내 아우 건드리지 마라.”
“아씨……! 뭐야, 곰탱이 넌 또 언제 따라온…….”
“우리도 왔다. 이 좋은 구경을 니들만 하게 놔둘 순 없지.”
……아무래도 다 따라온 것 같다.
거대한 덩치를 조용히 도사리고 있는 갈라르에 말총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건들거리고 있는 카뮤와 복면을 긁적대고 있는 에스겔까지 그냥 총집합이었다.
끼리끼리 논다든가?
다 같이 옹기종기 붙어 있는 꼴이 어째 그림이 영 그랬으나 다들 개의치 않기로 마음먹었다.
“둘만 쏙 구경하려 하다니, 루브 네가 저놈이랑 그렇게 친한 줄 몰랐다.”
복면을 긁적거리며 비집고 다가온 에스겔이 대뜸 듣도 보도 못한 소리를 꺼내는 바람에, 자꾸만 신경 거슬리게 하는 카뮤의 말총머리를 확 움켜쥐려던 참인 아이반은 퍽 기괴한 표정이 되었다.
루브는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나 저 녀석이랑 안 친해.”
“요즘 갑자기 친해 보이던데.”
“그건 오해…….”
“야, 니들 다 닥쳐 봐!”
“네가 제일 시끄러워 말 엉덩이 대가리 새끼.”
“다들 좀 조용히 해주시겠습니까?”
이번에야말로 참된 고요가 찾아왔다.
즉시 모두가 일심동체로 정숙해져선 소리가 울린 쪽, 즉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히 비어 있었던 아이반의 왼편을 바라보았다.
“고, 공녀……? 어떻게…….”
말 그대로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의 아이반의 낯짝에 대고 엘레니아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조용히.”
“하지만…….”
“오빠가 반지를 새로 맞췄습니다.”
“예……?”
“새 반지라고요.”
“아…….”
“새 반지.”
“예.”
“쉿.”
아이반은 멍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가, 이내 잽싸게 정신을 차리고는 황급히 속삭였다.
“공녀,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저 유니폼…… 좋아하십니까?”
엘레니아는 아주 한참 만에 대답했다.
“누가 입느냐에 따라 다르겠지요.”
“그렇군요.”
그렇군. 그렇단 말이군.
쓸데없이 춥기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훌륭한 천 쪼가리였구먼?
시선을 바로 돌리는 아이반의 입가에 싱글싱글한 미소가 번졌다.
그랬다가, 카뮤가 자신을 매우 경멸스러운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곧바로 마주 노려보았다.
“왜 개눈깔을 뜨냐 이 말 엉덩이 대가리…….”
“크르르르르르르…….”
골까지 진동하는 듯한 으르렁거림은 카뮤가 낸 소리가 아니었다, 당연히.
삽시간에 주변이 어둑해지면서 하늘이 대로하신 게 아닐까 싶어졌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공포와 더불어 저절로 위를 돌아본 인간들은, 이윽고 어둠 속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와 고개만 쑤욱 뺀 채 동산 쪽을 흥미진진하게 주시하고 있는 웬 초유의 마물과 조우하게 되었다.
“아이 씨, 뭐야, 용 새끼잖아.”
“오늘만큼은 방해하지 마라, 네 아빠가 모처럼…….”
“크르르르…… 캑, 캑 캑, 캬하학……!”
그때였다.
아무래도 루브가 이스케를 두고 아빠 운운하는 시답잖은 농담을 던진 것이 치명적으로 거슬린 모양인지, 엿보기 모임에 은밀하게 위대하게 합류하여 물끄러미 부부의 풍경을 응시하던 서리용이 대뜸 캑캑대나 싶더니 다짜고짜 토악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찐득거리는 하얀 거품과 뒤엉킨 작은 부스러기들이 북부 최고 팔라딘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머리카락들이 축축해졌으나 다들 너그러이 눈을 감을 뿐이었다.
상대가 상대이지 않은가.
“대체 뭘 주워 먹은 거래.”
“……뼈 모양을 보니 칠면조 같기도 하고. 근데 쟤 그런 것도 먹냐?”
“숨 쉬다가 들어간 거 아닐까?”
“너, 너……!”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축축한 뼛조각을 멀거니 노려보던 앤디미온이 갑자기 서리용을 향해 버럭 삿대질을 한 것은 그때였다.
이 때아닌 돌발행위에 다들 대경실색했다.
“아, 깜짝아. 너 왜 그래, 임마? 미쳤냐?”
“너, 너 이!”
“네 동생 갑자기 왜 이러냐? 야, 너 가만히 안 있어?”
“여러분, 좀 정숙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