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꺄아아아아악!”
따사롭고 상쾌한 아침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비명에 나는 자리에서 화들짝 일어났다.
맙소사, 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마님, 마님!”
부랴부랴 달려간 그곳에는 그야말로 새하얗게 질린 모습으로 얼어붙어 있는 루실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척 봐도 경악 그 자체인 표정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다름 아닌 무시무시한 입을 반쯤 벌린 채 멀뚱히 서 있는 포포가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포, 포 포!”
내가 미처 말을 잇기도 전에 포포가 실로 격렬한 기세로 외치며 내 쪽으로 튀어왔다.
루실은 이제 하얗다 못해 파랗게 보일 지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거기다 파들파들 떨기까지 시작했다.
분노를 주체 못 하는 듯한 루실을 대신해서 상황을 일러준 이는 바로 앤디미온이었다.
무슨 동네 마실 오듯 나타난 앤디미온은 왠지 어정쩡하게 끼게 되어버렸다고 주장하는 표정을 한 채로 입을 열었다.
“그게, 제가 오메르타 분들이랑 같이 방금 조식 마차를 가지고…… 근데 저놈이 칠면조 요리를 훔쳐먹다 딱 걸렸지 뭡니까.”
“네? 하지만 포포는…….”
포포는 사람 고기를 제일 좋아하…… 긴 하지만 아무튼 이제는 산짐승만 먹는 걸로 아는데.
멍하게 돌아보는 나를 향해 포포가 애처롭게 머리를 흔들어 보였다.
정확히는 몸뚱이를 흔들었다.
이에 우리의 루실이 마침내 폭발했다.
“저 괴물 자식이 어디서 빤히 보이는 수작을……! 마님, 제가 다 봤단 말입니다! 저 고약한 녀석이 빈 쟁반 앞에서 깔딱대고 있었다고요!”
붕붕.
루실의 손에 들린 빗자루가 실로 강맹하게 허공을 휘저었다.
조식 마차 주변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잠복 기사들이 일제히 목을 움츠렸다.
“지, 진정해, 루실. 정황이 명백하긴 하지만 포포리 종은 날고기만 산 채로 먹는다고 알려진, 그러니까 다른 녀석 아닐까?”
“누구 말씀이십니까? 로냐, 혹시 너냐?! 이 계집애가 미쳤나, 감히 마님 드실 음식을!”
“꺄악! 무 무슨 말씀이세요, 대체?!”
물론 로냐는 그럴 애가 아니었다.
그걸 순식간에 해치울 만한 능력자도 아니었고.
내가 간신히 루실을 진정시키는 동안 앤디미온이 머리를 긁적이며 제법 그럴싸한 소리를 했다.
“아무래도 그리핀이 의심스럽습니다.”
“그렇다면…….”
“하지만 그리핀은 말고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굳이 말고기가 아니더라도 그쪽 또한 날고기 취향 아닙니까……?”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끼어들며 내뱉은 소리였다.
누가 한 말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리라.
어쨌든 다음으로 우리 모두 동시에 머릿속에 나머지 한 용의자를 떠올리고는 나란히 고개를 돌려 아름다운 아침 해가 떠오르는 서리 숲의 골짜기 너머를 바라보았다.
지금쯤 저 위에서 신나게 날뛰며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어떤 거대한 녀석이 나의 칠면조를……?
“……에이, 설마요.”
“그, 그렇습니다. 간에 기별도 안 갈 것이 분명한데…….”
“와하하하, 역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 * *
“그 돌팔이 양반 마지막으로 언제 왔습니까?”
“경까지 돌팔이라고 하시다니…….”
“아, 이런, 죄송합니다. 이스케 경이랑 다른 분들이 하도 그리 불러대셔서 저도 모르게 그만 익숙해진 바람에…….”
나한테 죄송할 거야 없지만.
불쌍한 세르게이 씨, 나름 능력자이거늘 별명이 그렇게 된 경로가 궁금하군.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앤디미온을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틀 전에요. 이상한 말씀을 하시더군요.”
“이상한 말이라니요?”
“이만하면 봄이 오기 전에 내려갈 수 있을 거라나. 이상하잖아요? 원래 그런 애매한 말투 쓰는 분이 아닌데.”
하고 다시 빙긋 미소 짓자 앤디미온은 내 눈길을 피하며 매우 애매하게 들리는 헛기침 소리를 냈다.
거참. 근데 이러고 보니 그새 키가 큰 것 같네.
“큼큼, 에헴, 지내시는데 불편하신 건 없으십니까? 다들 자나 깨나 걱정이 많으십니다.”
음, 아무리 불편하다 해봤자 지난겨울 남편 녀석과 동료들이 어떤 비대증 꼬마 녀석 뒤치다꺼리하느라 번갈아 노숙한 것에 비하진 못하리라.
현재 내가 머무르고 있는 곳은 서리 숲속 롬의 동굴과 인접해 있는 작은 오두막이었다.
원래는 전망대로 쓰였던 장소를 단장한 거다.
시중들어주는 이들도 있고 식사도 날라 오는데다 철통같은 경비가 일대를 지키고 있으니 불평할 게 뭐가 있겠나.
불평할 게 있다면 오로지…….
“불편할 게 뭐가 있겠어요?”
“그래도…….”
“물론 아무리 저라 해도 애들이랑만 지내고 있자니 심심하긴 해요. 로냐랑 루실이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오늘 이렇게 경이 와주시니 참 좋네요.”
짐짓 쓸쓸하게 눈을 내리까는 나를 멍하게 응시하는 앤디미온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져가는 모양새가 훤히 보였다.
그가 무어라 입을 열려는 찰나 내가 말을 이었다.
“어머, 미안해요. 제가 그만 어리광을 부리고 말았네요. 세르게이 씨한테 애매한 말을 들어버려서 그런지…….”
“아, 아뇨. 쓸쓸하신 게 당연합니다! 저희 모두, 특히 이스케 경께선 미쳐가시는 중…….”
“물론 저도 이해해요. 애들이 제 마기를 먹어치우는 동안 그만큼 강한 신성과 가까이하면 위험하댔으니까, 철없이 떼를 쓸 순 없죠. 게다가 지금 엄청 정신없을 거란 거 아니까요……. 어쨌든 앤디미온 경이 오늘 오신 걸 보니 정말 슬슬 안심해도 되나 봐요.”
“예? 아아, 예, 물론 저는 이스케 경만큼 신성이 강하지 않으나, 그러니까 감히 비할 수 없으며 북부 누구와도 비교를 불허하나 오늘 제가 여기 온 것은 경께서도 곧…… 아니, 이게 아니라!”
얼굴까지 붉혀가며 횡설수설하던 앤디미온이 불쑥 언성을 빽 높였다.
슬슬 그만 놀릴까 하던 나는 화들짝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앤디미온 경? 괜찮으세요?”
“괘,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부인, 이스케 경께선 곧 부인을 데리러 오실 겁니다!”
“예……?”
“그것이 사실은 부인께서도 아시는 그러한 위험성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에 못 오고 계셨던 겁니다.
돌팔이 양반이 애매모호한 소리를 한 이유도 전부 그것을 알아버렸기에…….”
“예……?”
앤디미온은 넋이 나가버린 내 눈앞에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러고는 호박색 눈을 더없이 비장하게 초롱초롱 반짝거리는 것이었다.
너 또 왜 이러니?
“사실 경께서는 아무도 짐작 못 했던 은밀하고 비장한 각오를 다지시느라 늦어지신 겁니다.”
“은밀하고 비장한……. 그것이 대체 뭔가요?”
“비밀입니다!”
“…….”
“제가 이 말씀 드린 것도 비밀입니다. 제가 이러고 있다는 걸 경께서 알아낸다면 전 내일 아침 뜨는 해를 보지 못할 터이나 부인께서 상심에 잠겨 있는 모습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아셨지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것을 끝으로 우리의 해맑은 종자님은 떠났다.
쟤도 참 한결같다.
대체 무슨 은밀하고 비장한 뭐시기를 다졌다는 건지 모르겠다만, 어쨌든 이러든 저러든 조만간 여기서 내려갈 수 있다는 거로군.
에휴, 돌아오자마자 몸이 말썽을 일으키는 바람에 이래저래 민폐를 끼쳤네.
외부에는 내가 친정 식구들을 잃은 충격으로 슬픔에 잠겨 잠시 공작령 별장에 요양하는 중이라 알려져 있다.
현재는 폐위된 전 왕비가 내게 한 짓은 그녀가 독단적으로 벌인 일로만 알려졌고, 내가 로마냐에 있는 동안 오메르타 가문에서 엔죠의 장례를 치러줬다고 들었다.
여기서 내려가면 엔죠의 묘비에 가서 꽃이라도 꽂아줘야지.
엘레니아가 전해준 말에 따르면 엔죠가 죽고 나서 프레이야가 수도원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녀가 하리라곤 예상치 못한 의외의 행보였다.
아무래도 그런 죽음을 목격한 것이 상당한 트라우마가 된 모양이었다.
어떤 기억들은 영원히 남게 마련이니까.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그래서 나는 엘레니아가 걱정됐지만, 엘레니아는 되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냐며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자신이나 레아나 아리엔 걱정할 시간에 내 걱정이나 하라면서.
젠장할.
내 걱정은 충분히 하고 있다고.
솔직히 말해서 난 지금 아주 만족스럽단 말이다.
이만한 해방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내 남편이 내 큰오라비를 죽인 검을 내게 바친 순간 느꼈던 그 아득한 해방감.
그게 죄라면 지옥 가지, 뭐.
어차피 이미 사탄의 하수랑 노는 처지인걸.
여기서 지내는 건 나쁘지 않았다.
아까 앤디미온에게도 말했듯 불편한 것도 별로 없었고, 용 새끼와 포포와 그리핀과 함께 지내는 것도 꽤 즐거웠다.
앞으로 또 언제 이렇게 자유롭게 놀아볼 수가 있겠는가?
단지…….
“피요오오오오-”
앤디미온이 떠난 뒤, 로냐와 루실이 낮잠을 자는 동안 혼자 오두막 밖에 나와 모처럼 수틀을 잡는 찰나였다.
“피요오오- 푸르릉, 푸르르르릉!”
사냥 간 줄 알았던 그리핀 녀석이 퍽 비장하게 들리는 울음을 뽑으며 날아오더니만 다짜고짜 허공에 꼬리를 붕붕 휘둘러 대는 것이 아닌가?
오늘따라 왜들 이렇게 비장하지?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푸르르릉, 푸르릉! 푸릉!”
다급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의기양양해 보이는 기세가 분명 다른 녀석 누군가가 사고 친 것이 명백했다.
아니 또 무슨 일이야 이거, 설마 또 포포랑 용 새끼가 이상한 거 가지고 시비 붙은 거 아니겠지?
어쨌든 한시가 급하다고 재촉하는 기색이 분명했기에 나는 부랴부랴 그리핀을 따라나섰다.
어느덧 익숙해진 숲길을 따라 부리나케 달리다 롬의 동굴로 이어지기 전 블루베리 덤불이 우거진 공터에 다다랐다.
그리고,
“포, 포, 포!”
한눈에 봐도 잔뜩 겁먹은 기색이 분명한 포포가 나를 보고는 커다랗게 외치며 한 팔을 퍼덕거렸다.
정확히는 누군가를 고발하듯이 맹렬하게 가리켜 보였다.
포포의 머리 위에 내려앉은 그리핀 또한 마찬가지로 의기양양하게 그쪽을 마주 노려보았다.
그리고 나는 잠시 내가 뭘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내 반대편에는 예전에 몇 번인가 마주친 바 있는 한 듀라한이 있었다.
잘린 머리통을 옆구리에 끼고서 말을 몰고 다니는 기사분 말이다.
문제는 표정을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극심하게 대로해 있다는 사실을 나조차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고, 옆구리에 있어야 할 머리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포포와 그리핀의 반대편, 즉 둘이 의기양양하게 가리키고 있는 쪽에 멀뚱히 서 있는 녀석은 다름 아닌 이스케였다.
분명히 이스케가 맞았는데, 대체 무슨 이유에선지 그 야하기 짝이 없는 괴상망측한 유니폼 차림을 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한 손에는 듀라한의 머리통을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 이 한 폭의 그림을 어찌 해석해야 하는가?
뭐 씹은 것 같은 으스스한 표정으로 마물들을 쏘아보던 이스케가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거기서 뭐 해요?”
“……어른스럽게 싸움 중재 중이다.”
어른스럽게 뭐요?
“싸움?”
“저 돼지랑 새대가리가 저 새끼 대가리를 날치기해서 공놀이하는 바람에 저 새끼가 이성을 잃었거든.”
“네……?”
“그래서 돌려주려고 한 건데, 갑자기 새대가리가 널 데려와서는 내가 다짜고짜 지들 죽이려 든 것처럼 뒤집어씌우고 있잖아, 지금.”
뭐라고!
나는 입을 딱 벌리고 포포와 그리핀을 쳐다보았다.
두 녀석은 어느덧 저만치 슬그머니 멀어져 가고 있었다.
아니, 이것들이?
“그런데 당신이 듀라한을 그냥 이렇게…….”
“잊었어? 오늘은 안식일이라고.”
“…….”
“게다가…… 오늘은 손을 더럽히면 안 되는 이유가 또 있단 말이야.”
“무슨 이유요?”
이스케는 대답 대신 어째 눈길을 피하는 듯한 기세로 고개를 돌리며 듀라한의 머리통을 원래 주인 쪽으로 힘차게 던졌다.
덤벼봤자 재미없을 거란 걸 안 탓인지 혹은 용 새끼의 구역에서 싸워봤자 재미없을 거란 걸 안 탓인지 혹은 나 때문인지 혹은 그저 머리를 찾아서 만족해서인지, 마물 기사님은 머리통을 옆구리에 도로 끼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힘차게 말을 질주해 유유히 멀어져 갔다.
남은 우리 두 인간 사이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눈을 깜박거리며 이스케를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머리가 조금 더 긴 것 같다.
키가 더 커졌나? 아닌가?
하긴 거기서 더 커지면 어떡해.
그런데 이 야한 옷은 또 왜 입고 있는 거지?
이거 야하니까 입지 말라고 누누이 당부했건만, 하긴 그때 나 구하러 올 때도 입고 왔었지…….
가만, 설마 이 와중에 또 무슨 위험한 일 하러 가는 건가?
그래서 날 보러 온 거고?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말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나와는 달리, 이스케는 발치에 시선을 떨어뜨린 채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뭐지, 진짜 무슨 일이 생겼나?
아니면 단지 오랜만에 만나서 어색한 건가?
그거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이스, 어디 가는 중이에요?”
“어? 어, 너한테.”
“그런데 옷은 왜 그런…….”
“그야 네가…… 라고 했으니까.”
“네?”
영 어울리지 않는 모기만 한 목소리에 나는 절로 머리를 갸웃했다.
뭐라고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갑자기 나타난 것도 희한하건만, 너 진짜 우리 남편 놈 맞니?
발치에 뭐가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선을 떨군 채 뭐라 꿍얼대던 이스케가 불쑥 내 쪽을 향해 힐끔 눈을 부라렸다.
흐음, 이렇게 보면 우리 남편 놈 맞는 것 같은데.
“네 취향이라면서.”
“뭐가요?”
“이 옷 말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