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뎅뎅 하는 신전의 종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였다.
나라가 안팎으로 온통 들썩이는 시국임에도 날씨는 무심하리만치 맑았다.
맑은 겨울 오후의 햇살이 스테인드글라스 천장을 뚫고서 거대한 벽에 세워진 성상을 비추고 있었다.
어린양을 안은 성 아그네스.
그것을 올려다보면서 프레이야는 그대로 꼼짝없이 서 있었다.
마치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혹은 기도라도 하는 것처럼 양손을 꼭 맞잡고서.
얼마나 그렇게 멍하게 있었는지, 뒤쪽에서 천천히 다가온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얹은 순간 화들짝 놀라 반쯤 비명을 토해냈을 정도였다.
“아이고, 뭘 그리 깜짝 놀라는 게냐? 예서 놀랄 게 뭐가 있다고.”
“…….”
“프리? 안색이 창백하구나. 무슨 일 있는 게냐?”
언제나처럼 다정한 어조로 묻는 대주교의 눈가에 염려의 빛이 아른거렸다.
프레이야는 그런 그를 한참 동안이나 더 멍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에렌딜 신전의 대주교이자 그녀의 백부, 그녀가 기억 못 하는 모태 시절부터 지금까지 평생을 알아온 남자를.
“……백부님.”
“그래, 얘야. 무슨 일이냐?”
“저, 다 말했어요.”
“다 말하다니?”
“그때…… 성 아그네스 축일 날 일요. 사실대로 전부 말했어요, 오메르타 공작가 사람들한테.”
대주교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깐 후에 울린 음성은 여전히 침착하고 온화했다.
“그래, 역시 그랬구나.”
“죄송해요, 제가 시작해 놓고는…….”
“아니야, 잘했다. 그것으로 네 양심이 계속 걸렸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나 또한 애초에 그런 각오도 없이 내 고집쟁이 질녀 녀석의 간청을 들어준 건 아니란다.”
진심 어린 말. 그건 정말로 진심 어린 말이었다.
한없이 다정하고 따스한 위안에 보라색 눈동자가 서서히 눈물을 머금었다.
“프리? 아이고, 정말 괜찮다니까. 울지 말거라. 죄책감을 느꼈다면 오히려 좋은 일이니까. 우리 모두…….”
“백부님, 저, 저 좀 도와주세요.”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백부님, 저 수도원에 들어가고 싶어요. 부모님이 반대하시든 말든 제가 서약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시종일관 온화하던 대주교의 눈이 이번에야말로 매섭게 경직되었다.
반면에 프레이야 쪽은 점점 더 울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게 갑자기 무슨 큰일 날 소리냐? 차라리 지난번처럼 마곡석을 먹겠다 하는 편이 낫겠구나, 대체 갑자기 왜…….”
“전, 전 곤팔로니에레가 어떻게 죽는지 똑똑히 봤어요. 바로 눈앞에서, 제 품에 쓰러져서요. 그런 끔찍한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거 처음 알았어요.”
“그게 대체…… 아니, 그자가 네게 있어 그리 중요한 사람이었더냐?”
“아니요, 그도 나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냥 가볍게 놀기 좋은 사람이라고, 함께 있으면 즐거운 유쾌한 사람이라고요. 그냥 그렇게만 생각했을 뿐인데…….”
아름다운 보라색 눈에서 눈물이 흥건히 쏟아져 내렸다.
프레이야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고작 그런 사이였을 뿐인데도 미칠 것 같은 기분인 거예요. 이런 끔찍한 기분, 이런, 이런 끔찍한 감정이 드는 거 처음이라고요. 이렇게 참담한 적도 이렇게 슬픈 적도, 그리고 그를 그렇게 만든 작자를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가 이는 것도요.”
“얘야, 그렇다 해도 그건 네 잘못이…….”
“모르시겠어요? 공자비의 오빠가 제 팔에 쓰러져서 죽었어요. 온몸에서 피를 흘리면서요. 그 피가 얼마나……. 그제야 제가 그날, 그 축일 날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고요. 제가 모험 삼아 저지른 짓에, 누구 골탕 먹이겠답시고 한 짓에 주변 사람들이 어떤 심정이었을지요. 제 가족들도 친구들도 전부……. 심지어 공자비한테도 정말로 무슨 짓을 저질렀던 건지 깨달아 버렸다고요.”
눈물 젖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바들바들 떨렸다.
그 얼굴을 바라보는 대주교의 얼굴 또한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죄 내 잘못이다, 얘야. 전부 내 잘못이야. 내가 너를 말렸어야 했어. 네가 어릴 때부터 무조건 들어주기만 하지 말고 거절할 줄도 알았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백부님 잘못도 아니에요! 전부 제 잘못이에요. 제가 원해서 한 일이라고요. 지금 제가 느끼는 이 괴로운 기분, 전부 제가 저지른 짓의 대가예요. 더는 예전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어요. 어차피 이젠 돌아가지도 못하겠지만, 이대로 아무렇지 않은 척 뻔뻔하게 살아갈 자신이 없다고요. 그러니 마지막으로 저를 도와주세요.”
“끔찍한 소리 그만두거라! 스스로에게 과한 벌을 내리려고 하면 안 된다. 넌 아직 어리고 배울 것도 많아. 앞으로 경험할 것도 많고. 무슨 실수를 저질렀다 한들 너는 북부의 퓨리아나 가문의 여식이다. 그 누구도 널 얕잡아 보지 못해! 그걸 다 버리고 이 한창일 나이에 수도원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단호하고도 엄격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프레이야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만일 그러고 죽지 않았더라면, 또 그럼으로써 공자비가 그리되지 않았더라면 전 계속 예전처럼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젠 둘 다 없어요. 전, 저는, 그때 제가 고해성사하면서 공자비와 대판 싸웠다고 했던 날 기억나세요?”
“기억난다. 하지만…….”
“그때 제가 했던 말 전부 기억하시죠? 전 공자비가 거울의 방에서 피범벅으로 얻어맞는 걸 봤어요. 그 전에 그녀의 큰오빠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도요. 그녀가 그렇게 강제로 돌아가서, 거기서 어떤 일을 겪고 있을지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어요. 남동생을 그렇게 죽게 만들고 여동생을 그렇게 다루는 남자한테…….”
“얘야…….”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전 제가 너무 끔찍하다고요. 그 남자랑 저랑 다를 바 없어요. 그걸 이제야 깨달아 버린 거라고요. 잠깐이나마 진심으로 끌렸던 남자가 그렇게 죽어서만이 아니에요. 제가 그녀한테 어떻게 했는데요. 그녀한테 무슨 짓들을 했는데요. 심지어 그러면서 제 동생까지 이용해서……. 그 애가 저 때문에 팔라딘 꿈을 영영 접게 되어버린 거 아세요? 그 애가 어릴 때부터 동경했던 분들이 전부 받아주길 거부한다는 거……?”
“그건,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나면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를…….”
“아뇨, 그렇다 해도 전 이대로 모두를 마주하고 세속에서 살 자신이 없어요.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안 된다고 했다! 넌 한때는 일국의 모후를 꿈꾸기까지 했던 아이 아니냐, 앞으로 더 환한 미래가 열려 있는데 이대로 이렇게…….”
“이대로라면 저는 혼자 말라 죽어버릴지도 몰라요. 더는, 더는 누구와 우정을 나눌 자신도 사랑을 나눌 자신도 없어요. 단 한 번도 제대로 그랬던 적 없지만, 평생 빈껍데기로 살다가 뒤늦게야 겨우 깨닫고서 제대로 해보려고 했는데, 그걸 알려준 두 사람이 모두 끔찍하게 가버렸다고요! 이런 제가 누굴 만나 결혼을 하고 행복하게 살 수가 있겠어요?!”
급기야 꺼이꺼이 흐느끼기 시작하는 질녀를 대주교는 그저 멍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맞은편의 벽에 선 성 아그네스의 성상이 그들 위로 서글픈 미소를 드리우고 있었다.
프레이야는 아직 어렸다.
아직 살아갈 날도 경험할 것들도 많았다.
비록 지금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다 해도, 언젠가는…….
“언젠가는 돌아오겠다 맹세한다면…….”
“백부님……?”
“마음이 바뀌는 날이 오면 돌아오겠다 맹세하거라. 그리한다면 내 도와줄 테니.”
프레이야는 그대로 백부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서 성호를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