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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한 인연의 고리들이 서로 엮이고 엮여 오늘날 같은 상황을 불러올 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아버님의 정치력에 찬사를 보내야 할지, 알폰소의 선구안에 찬사를 보내야 할지, 결국에는 자기 결말 그대로 유지하려고 애쓰는 원작의 끈기에 박수를 쳐줘야 할지 모르겠다.
아리엔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는 건 확실했지만.
서리용이나 남편의 자세한 동향에 대해선 모르는 듯했으나, 어쨌든 북부의 정황을 간략하게 일러준 로크루아 추기경이 내게 부탁한 임무는 단 하나였다.
바로 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성배를 확보할 방법을 찾아달라는 것.
다름 아닌 나 루드베키아가 성배를 빼돌리는 데 앞장서게 되다니 이거 참 갈수록 묘하네.
원작 <소돔과 성배>의 결말에서도 결정적인 요소였던 성배.
성도의 원천이자 어떻게 보면 이 세계관의 큰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신성한…… 술잔이라고 해야 하나?
판타지 세계관인 만큼 단순히 상징적인 성유물이라는 점을 넘어서 꽤 이런저런 능력이 있던 걸로 기억한다.
가령 한 교황의 시대에 존재하는 전국의 팔라딘을 포함한 모든 성직에 서약한 자들의 이름이 담겨 있다고 했는데, 파문이 결정된 자의 이름을 파괴함으로써 신성 코어를 파괴해 영영 재기 불가하게 만들 수도 있단다.
이름을 파괴하는 능력이 능력인 만큼 교황이 독단적으로 사용하는 건 여러 제약 덕에 불가능하긴 했지만.
하여튼 원작에서나 여기서나 우리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연합 세력 입장에선 성배를 빼돌리는 일부터가 최우선인 것이 지당했다.
설상가상으로 지금은 교황 아들놈 주제에 이교도 우상숭배 힘을 빌리는 새끼까지 존재하는 시국인 만큼 최소한의 여지마저 방지해야 할 터였다.
문제는 교황이 성배를 보관해 두는 장소가 어디냐는 건데…….
최대한 시도해 봐야 할 노릇이다.
우습게도 교황의 상태가 뜻밖의 지푸라기가 되게 생겼다.
멀쩡한 상태였다면 내가 무슨 수로 알아낼 도리가 있었겠는가?
“오, 카르멘…….”
교황은 여전히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였다.
나를 어머니로 착각하며 반기는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낯설기도 하고 이질적이기도 하고 짜증스럽기도 한다.
밤낮으로 옆에 붙어서 간병하는 듯한 레이디 아델라가 내가 들어오자 알아서 자리를 떠주었다.
나는 그녀가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의자를 대신하고는 짐짓 명랑하게 입을 열었다.
“좀 괜찮으세요?”
“덕분에 많이 좋아졌구나, 착한 것…….”
“얼른 나으세요. 어서 일어나서 저랑 놀아주셔야지요.”
“아이고, 또 실버레이크에 가고 싶은 거냐? 거긴 이제 못 간다니까.”
“실버레이크……?”
“하긴, 넌 항상 그곳을 제일 좋아했지……. 섭섭할 텐데 대신 다른 소원 말해보련?”
“으음, 다른 소원 말하면 들어주실 거예요?”
“물론이지, 내 사랑, 네 작은 가슴이 원하는 거라면 무엇이든……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어…….”
정말이요, 아버지?
나는 상체를 약간 기울여 내 손을 꽉 붙든 교황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반쯤 힘겹게 뜬 눈에 아른거리는 무언가가…….
젠장, 왜 이럴 때는 다들 하나같이 똑같은 눈빛이 되는 거래.
“있죠, 그럼 성배 구경시켜 주세요.”
“성배……? 그건 별로 구경할 게 못 된단다. 그냥 오래된 구식 고블렛에 불과해…….”
“그래도 궁금한걸요. 네? 혹시 들어주기 싫어지신 건가요?”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 내 사랑…… 다만 성배는 위험해……. 네가 보는 건 괜찮지만, 다른 놈들이 보고 멋대로 손을 대면 큰일이 생겨……. 특히 내 아들이 알면…….”
그가 숨을 힘겹게 몰아쉬었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물끄러미 응시했다가, 곧이어 장난스럽게 미소 띤 얼굴로 속삭였다.
“괜찮아요. 어디 있는지 제게만 살짝 알려주세요.”
* * *
“최종 목표가 환속이었어?”
발코니 너머로 한창 성탄 축제 준비에 물든 로마냐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오후의 따스한 햇볕에 물든 둥그런 지붕들과 뾰족탑들, 색색의 종이들이 걸린 산타 마리아 광장과 베네치아 광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겉모습만큼은 평화로운 그림 그 자체인 도시의 모습을 응시하며 앉아 있는 우리의 우상숭배자 추기경께서는 벌건 대낮부터 술을 오크 통째로 가져와 퍼마시는 중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셔츠 단추도 제대로 잠그지 않고 아무렇게나 걸친 가관인 꼴이다.
“글쎄,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그새 누구랑 밀회라도 했을까 봐? 지금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다 그거잖아?”
“흠.”
“아버지가 앓아누운 사이에 나 이혼시키고 곧바로 환속할 작정이었던 거였어? 뭐 확실히 다시 정신 차리셨을 땐 이미 늦었겠네.”
“그럼 내가 아버지를 뭐 돌아가시게 하기라도 할 줄 알았냐.”
“아우도 죽였는데 못 할 건 또 뭐야.”
“꼭 내가 아버지를 죽였으면 하는 것처럼 말하네.”
“그거야 모를 일이지, 오빠 의도는 그게 아니었더라도 꽤 간당간당해 보이시는데. 이젠 오빠가 곤팔로니에레라도 되려고?”
“적어도 엔죠보다는 낫지 않겠어?”
얼씨구, 진심으로 곤팔로니에레라도 될 작정인가 보다.
하기야 교황이 정말로 죽어버린다면 체시아레로서도 큰 모험이리라.
선종 이후론 가문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릴지도 모르는 일이니.
이미 무너져 내리게 생겨 버렸지만.
“무슨 생각 해?”
말없이 도시 풍경을 응시하는 나를 향해 놈이 중얼거렸다.
내 할 소리다.
“그냥, 좀 허무하다는 생각.”
“뭐가?”
“글쎄, 오빠의 꿍꿍이가 좀 더 거창할 줄 알았다고 할까? 아버지만 해도 고작 잠깐 아프게 한 것뿐이었다니 좀 허무하네. 이교도 사술까지 이용해서 동생 하나는 보내 버리고, 하나는 데려온 거치곤 너무 잔잔하잖아.”
“내가 그 짓거리까지 한 건 너 때문이고, 다른 부분까지 그런 노력을 굳이 기울일 필요가 있나?”
의아하다는 투였다.
정말 이걸로 족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진심으로 족한 건지 아니면 순전히 족하다고 믿고 싶은 것뿐인지 모르겠다.
“곤팔로니에레가 되는 게 오빠가 만든다는 왕국의 전초인가 보네.”
“…….”
“그럼 그냥 나는 내버려 두면 좋았잖아. 오빠의 원대한 야망에 나는 오히려 걸림돌 아니야?”
부드러운 남부의 바람이 불어와 머릿결을 흩날렸다.
우리 둘은 잠시 말없이 입을 다물고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밤과 낮만큼이나 다른 외양, 지극히 낯익은 동시에 또 낯선…….
“그래, 맞아.”
그가 마침내 으르렁거렸다.
낮디낮은, 어떻게 보면 온화한 속삭임에 가까웠으나 내 귀에는 으르렁거림으로 들렸다.
다만 위협적이거나 경고성이라기보다는 단지 자조적인 울림에 가까웠다.
“그래서 가끔은 널 없애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했어.”
“왜?”
“너만 옆에 있으면 족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 그때 말한 섬 얘기처럼.”
“그래서 날 그렇게 팔아넘겼구나? 형편없네.”
“맞아, 형편없지.”
그가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나도 나대로 내 술잔을 기울였다.
언젠가 꿈속에서 본 이 발코니에서의 풍경은 불타오르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 꿈이 무슨 꿈이었더라?
“그럼 날 때린 건 화풀이였어?”
“아니.”
“그럼 당연히 날 고쳐준다고 생각했어?”
“모르겠다.”
“왜 몰라, 당연히 알지. 역시 바보야?”
“그러게, 바보인가 보다.”
“아무리 바보여도 너무 늦기 전에 알았어야지.”
취기에 반쯤 풀린 푸른 시선이 나를 멍하게 응시했다.
반면에 나는 여전히 도시 풍경만 감상했다.
“그랬으면 적어도 동정은 해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이게 뭐야.”
“…….”
“이게 진짜 뭐냐고. 엉망진창이잖아. 그래 놓고 이제 와서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건데.”
네가 여태 저지른 그 모든 미친 짓들의 피해자가 오로지 나 하나일 뿐이었다면.
너의 정신 나간 감정놀음에 휘말려서 피를 흘린 이가 단지 나 하나로 그쳤다면, 더 늦기 전에 네가 깨닫고 그만두었더라면.
그랬다면 나는 그냥 평생 너랑 다시 안 보는 것만으로 족했을지도 모르는데.
이토록 강렬히 너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내게 새 생명을 준 루드베키아가 어릴 적 홀로 고통받을 때 나타나 구해준 오빠라고.
그런 순수했던 시절의 파편들이 아주 가끔은 내 눈에도 보였었다고.
아주 적고 몇 안 되는 좋았던 기억들과 함께 영원히 흘려보내 버리고 서로 영원히 작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침묵이 내려앉은 오후의 발코니에선 끝끝내 더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나는 술잔을 내려놓고 일어나서 자신의 상념과 싸우고 있는 괴물을 내버려 두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