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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이 앓아누운 동안 체시아레가 궁무 처장으로서 임시 대리를 맡았다고 했다.
그놈으로선 꿍꿍이를 펼치기 딱 좋은 기회 아닌가.
교황이 정확히 무슨 병에 걸린 건지는 치료 사제들도 의원들도 똑같은 표정으로 머리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단지 나이가 있으니 사소한 감기라도 크게 앓으실 수 있다나 어쩐다나.
곧이곧대로 믿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레이디 줄리아의 시종일관 창백하고 기묘한 불안에 찬 낯빛을 감안하면, 저 돌팔이들 아무래도 체시아레가 시킨 대로만 떠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제 아버지를 이리 만든 것이 체시아레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무슨 긴밀한 독에 중독이라도 시킨 모양이지.
아들에 의해 환자가 된 교황으로 말하자면, 간간이 정신을 차릴 때마다 나를 찾아댔다.
정확히는 내 어머니를 찾아댔다.
회복의 기미는 영영 없는 것인지, 결코 나를 제대로 알아보는 법이 없었다.
무슨 언질을 들었는지 몰라도 레이디 아델라도 레이디 줄리아도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보아하니 레이디 아델라는 아직 엔죠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큰아들이 둘째 아들을 죽이고, 이어 아버지까지 위독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심정이려나.
상상도 하기 어렵구나. 아니, 그런데…….
“오늘 네 이혼을 공표할 거다.”
“…….”
“따라와서 지켜봐도 좋아.”
이 새끼는 왜 이렇게 혼자 멀쩡해 보일까?
엔죠 말로는 분명 어디 아픈 것 같다고 했는데.
역시 별거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내가 자기 일을 망치려 진실을 떠들어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 헛소리로 만드는 거야 일도 아니시겠지.
게다가 로마냐에서의 내 이미지는 그저 백치 공주님 아닌가.
물론 나는 애초에 체시아레가 바라는 촌극을 펼쳐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다만 병자의 기운이 완연한 저택에만 있는 것도 짜증이 났고, 바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할 필요도 있었다.
그래서 시스티나로 향했다.
당연히 혼자서.
체시아레가 떠난 뒤 한참 후에 말이다.
내가 저택을 나서는 걸 아무도 막지 않았다는 것이 조금 의외였다.
한동안 감금할 줄 알았는데, 내가 완전히 자기 손아귀 안에 떨어졌다고 믿기라도 하는…… 건 당연히 아님이 분명했고, 역시 감시를 붙인 게 확실했다.
그때 그 피에트로 놈이려나?
여차여차 레이디 줄리아에게 부탁해 그녀가 임신 전에 입었던 옷을 빌려 입고 후드 망토로 얼굴을 반쯤 가렸다.
성도가 타락해서 가능한 몇 안 되는 유익한 점 중 하나였다.
코르티잔 같은 차림새의 젊은 여자가 교황청을 멋대로 들락거려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 변장해서 오랜만에 입성한 교황청은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상황이 상황만 아니었다면, 내가 내가 아니었다면 참 아름답게 느꼈을 따스하고도 웅장한 풍경.
언젠가 전생에서 방문한 적 있는 그곳 교황청과도 몹시 닮아 있다.
이거 참, 내가 아는 원작과 굉장히 달라지긴 했는데, 지금의 내 상황만큼은 굉장히 비슷하다.
결혼 생활 반년 만에 로마냐로 돌아왔다는 것 말이다.
그리고 내가 떠나는 시기에 에렌딜에 있던 누군가가 죽었다는 것도…….
지금쯤 이스케는 어쩌고 있으려나.
우리 용 새끼는 무사히 허물을 벗었을까?
다른 이들 모두 어쩌고 있을까?
내가 이렇게 된 걸 알았을까?
그때 그곳에 아리엔이 숨어 있었는데, 왕비가 바로 알았으려나……?
어쨌든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은 늦든 빠르든 곧 모두에게 알려질 일이었다.
그러고 나면 어찌 될지가 미지의 영역이다.
굳이 변장을 한 건 단지 요란한 인사말을 나눌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였다.
변장한 상태이긴 했으나 누가 날 알아볼 수도 있었고, 또 엄한 추근거림을 피하려고 최대한 인적이 드문 장소를 골라 걸었다.
젠장, 원작에서 막판에 교황 일가를 배신하고 성배를 빼돌린 추기경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나마 믿어볼 만한 자들 아니겠냐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놈의 원작은 진짜 도움 되는 게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매번 통수 치기 전문일 뿐이었지, 아주?
내가 원래의 루드베키아, 그러니까 아주 어릴 때부터 이곳을 제집 드나들듯 들락거리며 생활한 루드베키아였다면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고위 성직자 몇몇은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몸에 들어온 지 고작 3년 차였던 데다, 내가 들어온 시기에 맞춰 연달아 이어진 혼사들에 시달리느라 바빴다.
게다가 아버지도 체시아레도 대체 뭔 연유에서인지 내가 다른 성직자들이랑 잠깐이라도 붙어 있는 꼴을 못 봤으니.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채 절로 익숙한 장소만 골라 따라 걷다 보니, 벽 바깥이 시끌벅적한 어둑한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
아니, 복도가 아니라 회랑이었다.
움푹 팬 벽감들 속에 자리한 성상들과 그 위로 늘어진 그림들의 풍경이 낯이 익었다.
죽 늘어진 성화 중에 어린양을 안은 성 아그네스의 모습이 새삼 눈에 띄었다.
우리 에렌딜 신전의 성상이 생각나서였다.
그리고 이 성녀의 축일 날 벌어졌던 소동도.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비록 그때는 억울하고 갑갑하고 두려웠으나 어떻게 보면 그 소동 덕분에 그리핀과 용 새끼를 알았다.
또 여러 의미에서 남편과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게 된 셈이었다.
프레이야한테 고맙다고 해야 하려나…….
“너 그 차림은 뭐야……?”
잠깐 일었던 감상이 확 물러갔다.
멀뚱히 고개를 드는 내 눈에 짙은 보라색 시마르를 걸친 모습으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체시아레가 들어왔다.
설마 나 따라붙은 감시가 너 자신은 아니지?
“레이디 줄리아한테 빌렸는데.”
“언제는 오기 싫다더니. 그딴 거 걸치지 말고 그냥 편하게 오면 되잖아? 네가 로마냐로 돌아온 거 이제 다 아는데 말이야.”
“그래서 오빠가 나라면 지금 요란한 인사말 일일이 받아줄 마음의 여유 있을 거 같고?”
“그놈이 널 찾으러 오기라도 할 것 같아?”
“…….”
“아무것도 모르는 그놈 눈에 지금 네가 어찌 보이려나, 싶은데.”
아무것도 모르는 건 네놈이고.
유유자적한 시선으로 나를 훑어보던 체시아레가 불쑥 손을 올려 내 머리의 후드를 벗겼다.
“뭐 하는 거야?”
“그냥 뭐라고 할까, 모처럼 이렇게 차려입어서 말이야. 아버지가 널 네 어머니랑 헷갈려 하시는데 지금 네 모습이 정확히 그녀랑 똑같지 않을까 해서.”
“오빠의 어머니도 마찬가지고 말이지?”
이 새끼는 매번 사사건건 시비야.
똑같이 시비를 되돌려 주자 짙은 검은 눈썹이 움찔 꿈틀거렸다.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해?”
“오빠가 한 거 똑같이 돌려준 것뿐인데?”
“내가 언제 네 어머니를 모욕한 적 있어?”
“잠 덜 깼어? 방금 했잖아?”
“그게 모욕이라고?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냐?”
“모욕이 아니면 대체 뭔데, 그럼?”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묻자 놈이 매우 당당하게 대답을 내놓았다.
“너 예전에 너 낳아준 엄마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고 했었잖아.”
“……뭐?”
“그래서 지금의 너랑 비슷할 거라고 알려준 것뿐이라고.”
이 새끼랑은 왜 자꾸 매번 핀트가 어긋나는 것 같은 느낌이지.
우리 중 누가 나사가 빠져 있는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어.
“이젠 그딴 거 하나도 궁금하지 않으니까 알려줄 필요 없어. 그것보다 아버지는 대체 어떻게 된 건지나 알려주지그래? 독이라도 먹였어?”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건 둘째 치고 그게 대체 왜 의문이지?”
“갈수록 오빠가 원하는 게 뭔지 헷갈려서. 성직이 싫은 거 아니었어? 갑자기 교황이 되고 싶어진 거야?”
“글쎄, 넌 내가 뭘 되길 바라는데?”
“순교 성인. 도대체 나랑 뭐 하자는 거야? 차라리 하던 대로 때리고 가두지그래?”
잠시 침묵이 흘렀다.
체시아레는 또 갑자기 입을 꾹 처닫은 채 나를 지그시 노려보나 싶더니, 갑자기 억센 손아귀로 내 어깨를 세차게 움켜쥐었다.
하도 아파서 신음이 새어 나올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았다.
“그랬으면 좋겠어?”
“…….”
“나도 너 벌주기 싫어. 그러니까 계속 이딴 식으로 자극하지 마. 이딴 걸레 쪼가리 걸치고 돌아다니지도 말고!”
섬뜩한 으르렁거림이 귓속을 파고든 것을 마지막으로 그가 홱 몸을 돌렸다.
사미르 자락이 펄럭거리며 멀어져 갔다.
그래, 그래야 너지.
욱신거리는 어깨를 좀 문질렀다가 놈이 나간 반대 방향으로 나가려는 찰나였다.
“큼, 공자비?”
몸이 절로 확 굳었다.
이곳에서 나를 레이디 루드베키아가 아닌 공자비로 부를 만한 사람이 대체 누가…….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구면이지요, 우리?”
당연히 구면이었다.
진홍색 수단을 걸친, 내가 서 있는 벽감 근처로 조용히 다가서는 한 밤색 머릿결의 추기경.
얼추 30대 후반쯤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로크루아 추기경님.”
“오오, 바로 기억해 주셔서 다행입니다. 제 부실한 조카 놈이 보낸 급보를 받고 설마설마하던 와중이었습니다만, 아니나 다를까 바로 조금 전에 발렌티노 예하께서 엄청난 발표를 연달아 하시지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