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화 (114/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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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타냐의 롱기누스 기사단.

하나같이 뛰어난 팔라딘으로 구성된 그들은 건국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전의 수호자인 동시에, 왕실에 충성하는 기사로서 쭉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묘한 입장을 고수해 왔다.

따라서 모름지기 그 롱기누스의 우두머리, 즉 기사단장이라면 다른 여느 기사단장들보다 특별히 더 밀었다 당겼다 하는 능력에 남다른 미덕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양쪽에 충실하되 결정적인 순간에는 한쪽의 대가리를 친히 깨버릴 줄도 알 것.

그것이 역대 롱기누스 기사단장들의 잠언이자 율법이었다.

그리하여 현재, 참담하고 뭐라 설명하기도 뭐한 사건들이 연달아 벌어지고 있는 이 결정적인 시국에서 현 기사단장 바론스 경이 어느 쪽을 택했는지는 매우 자명했다.

안 그랬다면 바로 눈앞에서 아끼는 수하 놈이 왕권에 도전하다 못해 산산조각을 내려는 꼴을 내버려 두지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그건 비단 바론스 경뿐만이 아니었다.

단지 때아닌 우상숭배로 신전이 위협받았다는, 신전의 수호자로서의 명분 때문만도 결코 아니었다.

“이스케 경!”

“멈추십시오! 당장 멈추시란 말입니다!”

경악 어린 필사적인 외침들은 전부 한 다리만 걸친 입장인 근위병들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라 해도 눈 돌아갈 대로 돌아간 북부 최고의 팔라딘을 가로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악!”

와장창창, 하는 요란한 파열음이 날카로운 비명과 동시에 울려 퍼졌다.

막으려고 애쓰는 근위병들을 순식간에 뿌리치고 달려든 이스케가 그대로 왕비를 붙들어 일으켜 세우고는 바닥에 내던진 바람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확히는 내던져진 왕비가 거울 벽에 부딪히는 바람에.

“비전하!”

“바론스 경, 제발 어떻게 좀……!”

“왜 다들 보고만 있으십니까?!”

근위대장의 피 토하는 듯한 원망에도 바론스 경은 그저 씁쓸한 표정으로 응대할 뿐이었다.

그 곁으로 죽 늘어선 소수 정예 또한 마냥 씁쓸한 눈빛만 교환하고 있었다.

맞은편에 선 오메르타 가문 인물들 쪽을 말하자면 이쪽 또한 그다지 다를 바 없었다.

공작이야 늘 그렇듯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얼굴로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고, 공녀 또한 늘 그렇듯 한없이 무표정했다.

즉, 저 성검을 뽑아 들고 궁에 난입해 미쳐 날뛰는 안하무인 팔라딘을 말릴 수 있는 유일한 자들이 하나같이 아예 손을 놔버린 상태인 것이다.

일 돌아가는 내막을 자세히는 몰라도 대충은 전해 들은 근위병들은 그만 울고 싶어졌다.

그들 또한 신앙인이자 북부인으로서 왕비의 만행을 용인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으나, 그럼에도 왕가의 수호를 맹세한 근위병으로서 현재 사태를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이스케 경!”

따라서 살기가 이글거리는 벨로아 궁에 기어이 국왕의 음성이 울려 퍼졌을 때 근위병들은 도리어 안도해 버렸다.

너무 이른 안도였지만.

“당장 멈추게!”

제 앞을 가로막고 선 외숙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스케는 이상하리만치 아무 표정이 없었다.

반쯤 풀린 듯하던 눈빛 또한 멀뚱하기 짝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멀뚱한 음성으로 그가 내뱉었다.

“비키십시오.”

“자네 이게 도대체 무슨…….”

“비키라 하였습니다만. 왜 다들 한번 말로 하면 못 알아먹는 겁니까.”

“……경. 짐을 베기라도 할 작정인가?”

“안 비키시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찬탈자라도 되는 수밖에. 친족 살해야말로 모든 왕가의 미덕이라지요.”

숨을 제대로 쉬기 버거울 만큼 압도적인 살기가 공기를 찍어누르고 있었다.

왕의 만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바로 그때,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 이 아슬아슬한 현장에 난입했다.

다들 눈치채는 데 좀 걸렸을 정도로 아주 작은 인물, 고작 여섯 살 된 어린 왕녀가 사람들 틈을 지나 쏜살같이 뛰어갔다.

어찌나 빠른 속도였던지, 근위병이 미처 붙들기 전에 왕녀는 이미 왕가를 도륙 낼 기세를 하고 있는 사촌 오라비의 다리에 매달려 엉엉 흐느끼고 있었다.

“사, 살려주세요, 오라버니…… 어마마마, 제발 죽이지 마세요…….”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있던 왕비도 그런 왕비를 가로막고 있던 왕도 일제히 경악 어린 낯빛이 되어버렸음은 당연지사였다.

그들뿐만 아니라 여태 손 놓고 지켜보기만 하던 이들 또한 흠칫했다.

“아, 아리…….”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만 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전부, 전부 저 때문이에요, 저 때문인데에, 너무 무서워서, 그때 너무 무서워서 구해 드리지도 못했는데…….”

무표정한 얼굴로 왕을 응시하던 이스케가 천천히 아래를 돌아보았다.

멀뚱한 루비색 눈에 짜증기가 번졌다.

“흐아아앙, 저 때문에, 저 때문에 공자비가, 공자비 오빠가아, 잘못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어마마마 죽이지 마세요, 제가 대신 죽을게요…….”

시퍼런 검날이 번득였다.

왕은 저도 모르게 움직이려고 했다.

순간 이스케가 그대로 아리엔을 집어 던져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스케가 한 행동은 그저 느릿하게 입을 여는 것뿐이었다.

“짜증 나게 걸리적대는 것도 참 많군. 내가 왜 널 죽이나. 너까지 죽이면 슬퍼할 사람이 따로 있는데.”

“우흐흑…… 흐아아앙…….”

그 틈을 타 황급히 다가온 근위병이 아리엔을 붙들고 떼어냈다.

누군가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스케 경, 공주는…….”

“두 사람입니다, 숙부님.”

“…….”

“제 아내와 그녀의 오빠. 쌍으로 보내 버리셨더군요, 숙모님께서. 아이반, 곤팔로니에레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다고 했지?”

드물게 차디찬 눈으로 지켜보고만 있던 아이반이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그와 엘레니아의 시선이 쓰라리게 얽혀들었다 떨어졌다.

“참담해서 차마 말하기도 싫습니다만, 눈과 코, 입과 귀에서 전신의 피가 빠져나와 돌아가셨습니다. 바로 공자비의 개인 정원에서요. 그 자리에 있던 저, 공녀, 마침 그 자리에 계시던 왕녀님과 제 누이동생 또한 그 장면을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용케 ‘X발!’ 하고 덧붙이지 않은 것이 대단할 지경이었다.

여기저기서 한숨이 울렸다.

그 부분에 대해 모르던 이들이 탄식하는 소리였다.

왕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페아놀 왕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리엔이…….”

“나아가 퓨리아나 후작가 영애도 계셨으니 틀어막기는 그르셨지요. 가엾은 영애께서 온통 피범벅이 되어버리셨지 뭡니까. 공녀님도 제 누이동생도, 뭐 저야 워낙 볼장 다 본 기사 놈이라지만. 이거야 원 공자비로 시작해서 남의 집 귀한 레이디들을 줄줄이 테러하신 셈 아닙니까? 아참, 원래 항상 자기 것만 귀한 줄 아는 분들이셨죠. 잠깐 까먹었지 뭡니까.”

답지 않게 욕 한마디도 안 하고 신랄하게 빈정거리는 아이반의 행각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바론스 경과 나지막한 쓴웃음을 교환하던 공작이 마침내 말문을 열고 나선 것은 그때였다.

“전하께서 아셨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작…….”

“이번에 왕비께서 저지르신 일은 왕녀께서 고해주시지 않았더라면 누구도 짐작지 못했을 겁니다. 다만 전하, 소신의 며늘아기 신변이 달린 문제인 이상 소신은 아들놈을 막을 명분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신의 집안에서 곤팔로니에레께서 참담한 고통을 겪으며 돌아가신 데다 딸아이가 그 꼴을 생생히 겪어야 했습니다. 아무리 충신이라 해도 이리 대놓고 건드리시면 어쩌자는 건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단 말입니다.”

왕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참담한 얼굴이었다.

하긴 왕 입장에서도 마른하늘 날벼락급의 재앙이긴 하리라.

물끄러미 외숙의 하는 꼴을 지켜보던 이스케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해가 잘 안 간다는 듯한 모습이다.

“지금 뭘 잘했다고 그런 표정을 다 하십니까?”

“뭐라……?”

“처음부터 숙부님이 제대로 처신했으면 이런 일 안 일어났습니다. 끼리끼리 논다고 저 계집도 마찬가지고. 자식새끼 미래가 그리 걱정됐으면 처음부터 제대로 책임을 졌어야지. 이방인 취급 받는다는 핑계로 꼭꼭 숨어서 하고 싶은 일만 골라 한 주제에 알아서 떠받들어 주길 바라셨나?”

“이보게, 경. 아니, 이스…….”

“안타깝게도 전 그런 인류애적인 정서는 없어서요. 기분 같아선 그냥 도륙 내버리고 싶은데 한시가 급하네. 그쪽이 멍청한 짓 한 대가로 희생된 내 아내, 머리카락 한 올조차 멀쩡하길 빌어야 할 겁니다. 그녀가 잘못된다면 그때는 내가 어른이고 애새끼고 가릴 수 있을지 모르겠거든.”

하고 검을 거칠게 검집에 돌려놓은 기사가 세찬 발걸음을 돌렸다.

그 주위로 조용히 지켜보던 이들이 슬며시 쫓아갔다.

여태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방관만 하던 바론스 경이 최초로 말을 꺼낸 것도 그때였다.

“경, 이번엔 무슨 계획이든 내게 좀 일러주고서 행하게. 진군까지는 너무 어려운 일이 될 텐데 대체 무슨 꿍꿍인가?”

“나름 얄팍한 계획이 있습니다. 아까 보고드린 그거요.”

“하나…… 상태는 괜찮은가?”

“괜찮게 만들면 됩니다. 매가 약이라지요.”

바론스 경의 만면에 실로 뿌듯한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공작이 넌지시 쳐다보자, 잽싸게 미소를 지우고 다시 근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큼, 공작께서는 무슨 꿍꿍이시오?”

“이래저래 동맹을 좀 맺어야겠소.”

“거 예전부터 동맹 참 좋아하시는구려.”

“북부 일부 세력의 음모만으로 그칠 순 없는 노릇 아니겠소. 하여간 누가 기사 이미지 망치는 무식한 칼잡이 아니랄까 봐 싸우고 이기는 것밖에 모르시는구려.”

“아버지, 아까 말씀하시던 거 뭡니까. 교황청에 어쩌고요.”

“아, 그거 말이냐. 일단 난 가서 제일 먼저 신속히 렘브란트에 연락을 취해야겠구나.”

성큼성큼 궁을 빠져나오던 이스케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그 바람에 다들 자연스레 따라 멈칫하게 되었다.

공작은 마냥 유유자적한 얼굴이었다.

“렘브란트요……?”

“그 고자 녀석 말이다.”

“믿을 수 있는 거 맞습니까?”

“세상에 마누라 신변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다른 놈은 고자뿐이란다, 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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