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 (11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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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 욕설, 비방과 비난, 협박과 조롱.

이 모든 걸 입 아프게 퍼부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씨알도 안 먹힐 인간한테 분노를 표출해 봤자 이미 저질러진 일이거늘. 나만 고생 아닌가?

그래서 나는 평정을 유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다고 비아냥대지 않겠다는 건 아니었지만.

“대단도 하셔라, 무려 발렌티노 추기경께서 우상숭배를 다 하고. 솔직히 진짜 놀란 건 인정할게. 내가 그렇게 그리웠어?”

“…….”

“왜 말이 없어? 오빠가 바라던 대로 다 이뤄졌잖아. 기뻐서 춤이라도 춰야 정상 아니야? 엔죠 오빠까지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보내 버렸잖아.”

“…….”

“엔죠 오빠가 그렇게 싫었어? 뭐 싫어한다는 건 늘 알고 있었지만, 죽일 정도로 미워하는 줄은 미처 몰랐는데.”

말없이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던 체시아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뚝뚝하고 비난하는 듯한 어조로.

“너 때문이잖아.”

“뭐……?”

“네가 고집을 부려서 끝끝내 거기 붙어 있는 바람에 내가 그딴 수를 쓸 수밖에 없게 된 거라고. 누군 그놈을 그런 식으로 없애 버리고 싶었던 줄 알아. 죽이려면 내 손으로 직접 죽였지.”

그래, 이렇게 나와야 너답지.

나는 짜증스럽게 손을 홱홱 저었다.

속으로는 눈물을 철철 흘리고 있었지만.

“뭐 그렇다 치자. 어차피 그 날라리 양아치 새끼가 어떻게 죽었든 내 알 바 아니니까. 그래도 오빠가 대체 나랑 뭐 하자는 건지는 좀 알고 싶은데.”

짙푸른 눈동자가 내 눈을 쏘아보았다.

꿰뚫기라도 하는 것처럼, 간파하려는 것처럼…….

익숙하고 익숙한 시선이었다. 목덜미에 아릿하고 서늘한 감각이 이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는 찰나였다.

“그새 꽤 도도해지셨군그래.”

“…….”

“일단 공식적으로 이혼을 공표하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지.”

“이혼이라고?”

“이혼이라고 해야 할지, 혼약 취소라고 해야 할지, 다른 때였다면 아무리 교황청이라도 어려운 일이겠지만 다름 아닌 내 아우이자 성하의 아들이 에렌딜에서 원인 불명의 정황으로 살해당한 상황이다. 명분이야 차고 넘쳐.”

이런 식으로 돌아갈 거라고 짐작은 했으나 막상 직접 귀로 듣고 있자니 분노가 치솟다 못해 황당하기 짝이 없다.

불쌍한 엔죠.

“아버지는 어디 계셔?”

“왜, 내가 널 데려오느라 무슨 짓까지 해야 했는지 전부 일러바치고 싶어졌어?”

“짜증 나게 좀 굴지 마, 안 그래도 짜증 나니까. 아버지가 지금 멀쩡하셨으면 오빠가 그런 짓이 가당키나 했겠어?”

“반박할 수가 없네. 널 보면 상당히 반가워하실 거야, 따라와.”

많은 기억이 녹아 있는 로마냐의 집, 교황의 사가, 보르히아 저택.

이곳을 떠난 지 이제 고작 반년 남짓일 뿐인데, 아주 오랜만에 돌아온 것처럼 모든 게 낯설고도 꺼림칙했다.

교황 성하, 에우게니오 6세, 프란치스코 데 보르히아, 우리의 아버지.

그는 자신의 침소에 있었다.

체시아레를 따라 들어서자 크고 아름다운 침대 주변을 둘러싸고 앉은 여인들이 일제히 이쪽을 돌아보았다.

배가 부푼 레이디 줄리아와 새 정부인 듯한 낯선 젊은 여인, 그리고 체시아레와 엔죠의 어머니 레이디 아델라까지.

하나같이 놀란 얼굴이긴 했으나 체시아레가 미리 언질해 두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교황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났으리라고 짐작이야 했으나 이런 것이었을 줄이야…….

어쨌든 분위기를 보아하니 제법 위독한 모양이었다.

아들내미가 독이라도 맥이셨는가?

나는 물끄러미 위독한 제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는 체시아레를 지나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강철도 씹어 드실 것 같던 양반이 대체 어디가 어떻게 아파서 골골대는지 확인은 해봐야 할 거 아닌가.

내가 다가가자 아델라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두꺼운 이불에 파묻힌 채 누워 있는 교황은 그새 폭삭 삭은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늙어버린 것 같다. 아픈 탓이려나.

아버지.

내게 있어 전생이나 현생이나 폭군 그 자체였던 존재.

어떤 면에서는 체시아레보다 더 두렵고 무너뜨릴 수 없는 벽처럼 느껴지곤 하던 그가, 이렇게 초라하고 연약해 보이는 날이 올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었다.

내 시선을 느낀 걸까,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던 교황이 부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들들과 똑 닮은 짙푸른 눈동자가 잠시 내 얼굴을 멀거니 응시했다가, 서서히 커다랗게 벌어졌다.

더없이 우습게도, 기쁨과 환희로 가득한 표정이었다.

“오오…….”

“…….”

“돌아왔구나, 카르멘…….”

뭐요?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에 일순 얼이 빠져 버린 건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침소 안에 모인 모두가 동시에 넋이 빠져 버렸다.

심지어 체시아레 놈조차 무표정하던 눈매를 약간 크게 치뜨고 있었다.

레이디 카르멘.

코르티잔이자 교황의 무수한 정부 중 하나였던 여인.

나로서는 얼굴조차 모르는, 나를 낳자마자 죽은 어머니.

무수히 많은 정부 중 하나였을 뿐이리라고 생각해 왔는데, 다들 그렇게 여기는 듯했는데, 이 무슨 뜻밖의…….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뜨거운 손이 얼이 나간 내 손을 감싸 쥐었다.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자글자글하게 맺혔다.

나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왜 이제야 돌아왔느냐…… 너무……. 너무 오래 기다렸잖니…….”

“…….”

“내 사랑, 네가 너무 그리웠다……. 너무 그리워서……. 차마…….”

다들 왜 이러는 걸까?

다들 왜 이 모양 이 꼴인 걸까?

차라리 당신들이 전부 심장이 얼음으로 된 괴물로만 보였던 때가 훨씬 나았던 것 같기도 해.

내가 대체 무슨 수로 너희를 이해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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