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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애 다 빨리 안 와아!”
혼자 쪼그려 앉아 한창 열중해서 화관을 만드나 싶더니, 역시 잘 안돼서인지 아니면 싫증이 나서인지 왈칵 투정을 부리는 레아였다.
“공자비께서 네 버릇을 망쳐놓으신 것이 분명하다. 예의 좀 갖춰라, 요 쪼끄만 것아!”
“괜찮습니다, 경. 그보다 좀 늦어지는 모양이군요.”
아기자기하게 차려진 티 테이블 쪽을 쳐다보는 엘레니아는 순전히 주변 풍경과의 대비 탓인지 아니면 아이반의 눈에 콩깍지가 씐 탓인지 오늘따라 묘하게 앙증맞아 보였다.
따라서 아이반은 동료 놈들이 죽을 쑤는 동안 슬쩍 여동생 핑계로 땡땡이치러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동생이란 족속들도 가끔은 쓸모가 있는 법이다.
“비전하와 얘기가 길어지시나 봅니다. 한데 공녀.”
“예?”
“저 친구 평소에 여기 자주 들락거립니까?”
“……곤팔로니에레 말씀이십니까? 아니요, 그때 연회 이후로 첫 방문이십니다.”
‘그렇단 말인가?’
그건 좀 의외였으나 아이반은 여전히 못마땅한 눈초리였다.
루드베키아도 괜찮은 듯하고, 다들 의외로 소탈하고 유쾌하다 평하는지라 딱히 싫어할 이유는 없었으나 저놈이 공녀 주변에서 알짱대는 건 심히 불안한 탓이었다.
소문이 워낙 난잡하니 그럴 만도 했다.
아이반의 표정을 흘긋 살핀 엘레니아가 그의 시선을 따라 화사한 온실 정원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어색하게 등장하여 여태 우물쭈물하고만 있다가 서서히 긴장을 풀어가는 듯한 옛 소꿉친구와, 그녀와 나란히 서서 분수대를 구경하며 사이좋게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남부의 기사를.
“저 두 사람이 언제 저렇게 친해졌는지는 모르겠군요. 친화력 하나는 타고나신 듯합니다, 곤팔로니에레께선.”
아이반은 엔죠와 프레이야가 어느 틈에 저리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사이가 되었는지 관심이 없었다.
방해하고픈 마음도 없었다.
감히 엘레니아에게 불손한 추파를 던지지만 않는다면 누굴 만나 뭘 하든 상관없었다.
“그런가 봅니다. 참, 아까 제게 뭔가 논의할 일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예……. 그 얘기 말인데, 실은 루비와 관련된 겁니다.”
“맙소사, 또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가만 설마 저 곤팔로니에레인지가…….”
“아뇨, 아닙니다. 진정하십시오. 저분은 관련 없습니다. 게다가 이미 한참 지난 일입니다.”
“큼, 미안합니다. 한데 한참 지난 일이라고요?”
“다들 잘 아시는 소동입니다. 다만 프리가 제게 따로 밝힌 것이 좀 있는지라, 그 부분에 대해 오빠나 다른 누구에게 밝히기 전에 먼저 아이반 경과 상의를 하고 싶어서…….”
“표정을 뵈니 그놈이 또 미쳐 날뛸 만한 일이 분명하군요. 대체 무슨 일입니까?”
인성 더러운 친구 놈 덕에 하루라도 골치가 안 아픈 날이 없다는 사실보다는, 사모하는 레이디로부터 선택받았다는 기쁨이 앞선 아이반이 잽싸게 물었다.
바로 그때였다.
“아리엔 공주님!”
입을 부루퉁하게 삐죽거리며 화관인지 꽃을 뭉친 덩어리인지 알 수 없는 작품을 만지작대던 레아가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그 바람에 온실 정원에 모여 있던 모두가 왕녀께서 드시는 입구 쪽을 돌아보게 되었다.
“……저하?”
비척비척 다가왔다가 그 자리에 딱 멈춰 서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아리엔은 한눈에 봐도 어딘가 심상치 않았다.
오는 길에 뭔가 무서운 일이라도 당한 듯 온통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커다란 청록색 눈동자에 가늠할 수 없는 공포의 빛이 아른거렸다.
다들 일순 얼어붙은 가운데 가장 먼저 움직인 이는 아이반이었다.
아이반은 곧장 다가가 왕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은 뒤 진지한 표정으로 마주 봤다.
“저하, 괜찮으십니까?”
“…….”
“공자비는 어디에 계십니까?”
묵묵부답.
엘레니아는 아리엔을 정원까지 데리고 온 호위 기사 쪽을 돌아보았다.
호위 기사가 낭패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가로저어 보였다.
즉 도착했을 때부터 이 상태였다는 뜻이다.
불현듯 이는 서늘한 불안감에 그녀는 황급히 아이반의 옆으로 다가갔다.
“저하, 저하.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아리엔은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
뜻밖의 방해에 그저 멀뚱히 그들을 번갈아 보던 엔죠와 프레이야 또한 슬슬 긴장한 낯빛이 되어 가까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저하, 괜찮으니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루비는 어디 있습니까?”
“공주님, 왜 그래요? 왜애 울어요?”
쏟아지는 질문들에 그저 울먹거리기만 하던 아리엔이 한참 만에 입술을 달싹거렸다.
더듬더듬 떨리는 가늘디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어마마마께서……. 어, 어마마마가…….”
“예, 저하. 비전하께서?”
“어어, 어마마마가 고, 고, 공자비를……. 우흐, 우흐아앙!”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엘레니아와 아이반의 시선이 멍하게 얽혀드는 찰나였다.
바로 그 순간에 일이 터졌다.
“경? 경, 갑자기 왜 그러세요?”
경이라는 소리에 아이반은 반사적으로 프레이야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다 이내 프레이야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부르고 있는 이가 곤팔로니에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곤팔로니에레는…….
갑자기 왜 저렇게 해쓱해 보이는 것일까?
순식간에 아리엔보다 더 창백해진 것 같다.
게다가 눈은 갑자기 왜 저렇게 이상하게 뜨는 거지?
벌겋게 충혈되다 못해 마치 피눈물이라도 고이는 것 같은…….
“엔죠 겨…… 꺄아아악!”
프레이야의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림과 동시에 아이반이 달려들었다.
그가 세차게 비틀거리는 엔죠의 어깨를 붙들고 젖혔을 때, 프레이야의 드레스 앞섶은 이미 온통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의 피가 아니었다.
비명이 다시 울렸다.
이번엔 아이반을 제외한 정원의 모두가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아이반 역시 비명만 안 질렀다 뿐이지 경악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만큼 끔찍한 장면이었던 탓이다.
다급하게 달려든 호위 기사가 레아와 아리엔을 끌어안다시피 하며 가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 참담한 광경을 두 어린 소녀들까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봐버렸다.
“꺄아아아아악!”
“곤팔로니에레!”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로마냐의 젊은 총사령관이 흘리는 피였다.
그의 눈에서, 코에서, 입에서, 귀에서…… 사람에게 존재하는 온 구멍에서 피가 분수처럼 철철 흘러나오고 있었다.
도저히 두 눈을 믿을 수가 없는 소름 끼치는 모습이었다.
마치 저주라도 받은 듯한 잔혹하고도 무시무시한 형태.
그러는 동시에 몸서리가 쳐질 만큼 가여웠다.
“경, 엔죠 경! 정신 좀 차려봐요! 엔죠 경!”
엔죠의 피에 잔뜩 젖은 채 부질없는 외침을 반복하는 프레아야의 모습은 참담한 상황에서 차마 형언할 수 없는 비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대로 바닥으로 맥없이 허물어져 내린 엔죠가 그녀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크림빛 드레스 자락이 온통 새빨갛게 물들어갔다.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리엔의 울음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