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0/136)

Chapter 11 용서받지 못할 죄

하얗고 보드라운 겨울 나날이 그럭저럭 평탄하게 이어져 갔다.

엔죠는 엔죠대로 에렌딜을 마음껏 즐겨댔고, 나머지 우리는 우리대로 할 일들에 집중하며 일상을 이어갔다.

우리의 용 새끼는 좀체 성장통을 끝낼 기미가 안 보였다.

어느덧 성탄절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데도 말이지.

우리 롱기누스 기사단장님의 말씀에 따르면 늦어도 성탄절 전에는 끝내줘야 다들 모처럼 맘 편히 축일을 즐길 텐데 이 녀석 아무래도 일부러 이러는 거 같단다.

다들 대체 용을 뭐라고 여기고 있는 건지 심히 의문이었다.

어쨌든 정말로 어서 용 새끼의 성장 문제가 끝나줘야 우리 모두 한숨 좀 돌린 뒤 이런저런 다른 문제들에 집중할 수 있을 터였다.

가령 내 친정 문제만 해도, 당장은 아버님도 엔죠가 하는 꼬락서니를 보고는 일단 내버려 두고 있긴 했으나 머지않아 사돈과 담판을 짓긴 해야 할 터였다.

나 또한 그 문제에 거들어야 함은 물론이었다.

자의적으로나 타의적으로나.

매일 찾아가서 되도록 오래 함께 있어 주려고 애썼지만 용 새끼는 영 기미가 안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며칠 새 갑자기 식사도 제대로 못 할 만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물론 열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거다.

거기다 날 알아보는데도 애를 먹는지 한번은 쓰다듬으니까 내 손을 확 물려고 해서 큰일 날 뻔했다.

이스케가 그대로 얘 이빨을 뽑아버리는 무시무시한 만행을 저지르려는 걸 포포가 껴안고 말렸기에 망정이었다.

포포도 그리핀도 당분간 우리의 팔라딘들과 함께 그곳 붙박이 신세였다.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그 애들도 느낀 듯, 아무것도 안 했는데 종일 자기들끼리 거기서 먹고 자고 한단다.

다들 고생 중이라 나도 함께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해가 지기만 하면 다들 완강히 나를 내쳤다.

심지어 매일 오지도 말라고 하는 거 아닌가.

언제는 내가 필요하다면서, 하여간 멋있는 척은 자기들이 다 하지!

풀죽은 나를 아리따운 시누이와 근엄한 아버님이 위로해 주었다.

엘레니아는 내게 남들에게 평소와 같은 모습을 꾸준히 보여줘야 하니 레아와 아리엔을 불러 티파티를 하자고 제안했고, 아버님은 조금 헷갈린다는 얼굴로 웬 초대장 하나를 내미셨다.

다름 아닌 왕비가 보낸 초대장이었다.

잠깐 함께 차 마시러 오지 않겠느냐고.

그리하여 모처럼 눈보라가 그친 그날 오후, 엘레니아가 레아도 불러 티파티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궁에 가서 비 전하와 오붓하게 차를 잠깐 든 뒤 아리엔과 함께 공작성으로 돌아가 놀기로 예정되었다.

한데 재건 공사가 거의 끝나가는 앙그반궁에 도착해서 왕비궁으로 향하는 길에 가장 먼저 마주친 이는 왕비도, 아리엔도 아니었다.

“여어, 우리 루비! 여긴 웬일이냐?”

바로 우리의 혼자 팔자 늘어지고 있는 곤팔로니에레, 엔죠 녀석이었다.

웬일이긴 내가 할 소리다 이놈아.

“비 전하랑 잠깐 차 마시러 온 거야. 오빠는 어디 갔다 어디 가는 중이야?”

“아하, 난 또 네가 나 보러 온 줄 알았지. 그럼 그렇지, 매정하긴…… 근데 비 전하 예쁘시더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실실 웃는 오빠 놈의 낯짝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내가 기어이 손을 들어 놈의 등짝을 퍽 한 대 후려치기까지 그랬다 이 얘기다.

“아악! 아 왜 그래?”

“여기서 뭐 하나 했더니 그새 비 전하까지 만나고 오셨다 이거지? 대체 또 무슨 짓을…….”

“아, 아무 짓 안 했거든? 그냥 친절하게도 차를 내주시길래 마시고 끝, 끝! 야 아무리 나라 해도 외국 왕비한테 들이대겠냐?”

“언제는 유부녀라고 가리셨고?”

“진짜 그런 거 아니라고! 나도 나름 선이란 게 있단 말이다, 왕이 그렇게 유명한 로맨티시스트인데 죽으려고 그러겠냐?”

“죽을 건 알고 있긴 해서 다행이네. 그래서 지금 어디 가는데?”

“엉? 너희 집.”

나는 멈칫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엔죠는 부스스한 생강빛 머리카락을 긁적거리며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우리 집은 왜?”

“왜긴, 너도 볼 겸, 너랑 네 가족이랑 좀 더 친해질 겸…… 아, 근데 나 지난번에 그 아가씨도 초대했는데 괜찮지?”

“그 아가씨라니?”

“그 예쁜 보라색 눈 아가씨.”

다시 한번 침묵이 내려앉았다.

“오빠, 설마 벌써 퓨리아나 영애한테까지…….”

“아, 야! 넌 어떻게 맨날 날 그런 쪽으로만 의심하냐! 그리고 내가 그때도 말했잖아, 난 무조건 쌍방이어야 한다고 쌍방!”

“저기, 오빠, 그 여자한테 팔라딘 꿈나무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그 애가 아주…….”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말라니까? 우린 그냥 만나면 얘기하는 거밖에 없어! 그 아가씨도 내가 재미있으니까 계속 상대해 주는 거겠지, 의외로 관심사가 비슷하다니까 그러네?”

관심사 어쩌고는 영 신빙성 없었으나 나는 그냥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하기야 프레이야가 누군데, 무려 주인공이 첫사랑이었던 마당에 요런 사고뭉치 날라리한테 홀라당 넘어가 빠질 위인도 아니고.

제 나름대로 이래저래 심기 복잡할 요즘이니 잠깐 여흥 삼아 눈 돌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엔죠는 같이 있으면 별생각 없이 맘 편히 웃기에 딱 좋은 즐거운 녀석이긴 하니까.

지난번에 엘레니아랑 얘기는 어떻게 잘 마쳤는지는 모르겠군.

정말로 성 아그네스 축일 소동의 내막까지 다 털어놨으려나?

어쩌면 오늘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그 얘기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알았어. 그럼 나도 금방 돌아갈 거니까 이따 우리 집에서 봐.”

“우리 집 좋지. 나도 너랑 같이 우리 집 하고 싶다 야.”

“하루도 못 살아남을 텐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그건 그래. 그럼 좀 이따 보자고!”

그것으로 우리는 사이좋게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뭔가가 걸리기라도 한다는 듯, 자꾸만 뒤돌아보며 연거푸 손을 흔들어대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묘하기도 해서 열심히 마주 흔들어줬다.

하여간 매사 뜬금없는 녀석이라니까.

내가 왕비의 시녀들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 응접실에 들어갔을 때, 한눈에도 이국적인 동방의 느낌이 확 풍기는 방 안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기다리는 동안 이색적인 자수가 들어간 푹신한 쿠션을 댄 긴 의자에 앉아 붉은 테이블보가 씌워진 테이블 위의 독특한 다기들을 감상하려던 찰나까지는.

“……아리엔 왕녀님? 거기서 뭐 하고 계시나요?”

부스럭, 하는 소리에 돌아본 그곳에는 한쪽 벽을 가린 두꺼운 휘장 뒤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는 꼬마 왕녀님이 있었다.

반갑게 웃어 보이는 나를 향해 그녀가 쉿 하고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유, 유모랑 숨바꼭질하다가…….”

“여기 와서 숨게 되셨다는 거지요?”

“네, 근데 비밀이에요. 어마마마께서…….”

비밀이라, 그렇군요. 우리 맨 처음 만난 날에도 이랬던 것 같은데.

궁전 정원에서 아리엔이 내게 노란 루드베키아 꽃다발을 줬고, 그다음에 이스케가 나타나서…….

그때 그 연못 속 페시보트는 정말로 사랑의 요정이었다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어마마마께서, 부인이랑 같이 갈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하셨는데…… 여기 마음대로 들어오면 혼나거든요.”

어이구, 그러시군요.

어물어물 털어놓는 청록색 눈망울이 깜찍하기 짝이 없다.

내가 미소를 지으며 꼬마 왕녀가 조용히 빠져나가는 걸 지켜보려는 찰나였다.

“비 전하께서 드십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가?

바깥에서 울리는 나직한 알림에 쪼르르 이쪽으로 다가오던 아리엔이 황급히 다시 휘장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내게 마지막으로 쉿 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나 또한 쉿 하고 머리를 끄덕여 주었다.

이어 젖힌 휘장이 펄럭 닫힘과 동시에 우리의 왕비님께서 아슬아슬하게 입장하셨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자비님.”

“천만의 말씀을, 초대 감사드립니다, 비 전하.”

축제 이후로 처음 만나게 된 왕비는 그날보다 더 이색적인 차림을 하고 있었다.

무명인지 오건디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모를 얇은 재질의 붉은색 드레스였는데, 전체적으로 보편적인 드레스라기보다는 고운 천을 몸의 굴곡에 따라 휘감은 듯한 디자인이었다.

참 이국적으로 예쁘긴 한데, 설마 이 모습으로 엔죠 녀석과 만나신 건 아니겠지?

내가 신기해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걸 느꼈는지, 분주히 달그락거리며 정체 모를 찻잎을 우리던 왕비가 레몬색 눈을 매혹적으로 휘었다.

“차림이 이래서 송구합니다. 항상 이러고 다니는 건 아니니 오해 말아주시길, 실은 오늘 모처럼 옛 취미에 푹 빠져들고 말았거든요.”

“옛 취미라 하시면……?”

“무희의 춤이지요. 오랜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이리 부랴부랴…… 이런, 제가 느끼기에도 참 가관이군요. 다들 전하께서 제 어리광을 너무 받아준다고 불평할 만합니다. 공자비께 결례를 저지를 의도는 결코 없었습니다만…….”

일전에 본 거울의 방의 풍경이 떠올랐다.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한 왕비를 위해 왕이 마련해 준 장소라 했던가?

어쩌다 우리가 기가 막히게 난파선으로 만들어 버렸던 그…….

끙, 갑자기 되레 내가 민망해지는데.

“전 괜찮으니 마음 쓰실 것 없어요. 저도 딱히 누구한테 격식을 일일이 따질 입장은 못 되는지라…….”

“공자비께선 정말 다정하고 친절하신 분이군요.”

이국적인 향기가 피어오르는 찻잔이 내 앞에 놓였다.

독특한 문양이 새겨진 찻잔 속에 마찬가지로 독특한 분홍색 찻물이 넘실거렸다.

“제 고향에서만 나는 찻잎이랍니다. 대륙에서 흔한 차와는 또 달라서 좋아해 주시는 분들도 있는지라, 공자비께도 꼭 한번 대접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설탕을 넣은 것 같지 않았는데 쓰라린 듯하면서 달콤한 뒷맛이 독특하긴 했다.

우리는 잠시 그렇게 차를 홀짝이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냥저냥 평범하고 무난한 주제의 대화였다.

서로의 고향의 차 문화와 사교 문화, 이곳과 저곳의 유행과 패션, 성탄 축제와 북부 특유의 겨울 전통 등등.

한참 그렇게 흘러가다 어느 순간 왕비가 화제를 돌렸다.

“참, 공작저로 돌아가실 때 공주와 함께 가실 거라 하셨지요? 미리 준비해 두라고 언질을 해두었습니다.”

나는 휘장 쳐진 벽 쪽을 쳐다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아리엔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매번 이리 공주를 챙겨주셔서 어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공자비께서도 바쁘신 분일 텐데…….”

“저도 좋아서 하는 일인걸요. 왕녀께서 참 사랑스러우시기도 하고요.”

별생각 없이 그냥 진심으로 한 대꾸였는데, 말린 대추야자 접시를 달그락거리던 왕비가 일순 멈칫하며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갑자기 뭐가 생각난 듯한 기색이라 의아하게 마주 보는 찰나 그녀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공자비, 아이를 좋아하시나요?”

“음, 글쎄요, 특별히 아이들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서요.”

“역시 다들 그런 걸까요? 저도 예전에는 아이들이라면 질색했던 시절이 있답니다. 그래서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공주를 낳고 나서부터 변하더라고요.”

“아…….”

“공자비께서도 그런 생각 해보신 적 있으시지요?”

“그런 생각이라니요?”

“공자비께서도 언젠가 아이를 가지실 텐데, 벌써 이리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니 그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우시겠어요?”

나는 잠시 그대로 당혹감에 사로잡혀 버렸다.

아이를 가진다든가 하는 일은 여태 단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았던 탓이었다.

거의 평생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왕비의 지적이 옳았다.

무려 오메르타 가문의 공자비인 나인데 당연히 언젠가 아이를 가지긴 할 거 아닌가?

나와 이스케의…….

“상상해 보신 적 있나요? 두 분의 아이의 모습.”

당연히 없었기에 이참에 한 번 상상해 보려고 했다.

그러자 기분이 굉장히 이상해졌다.

세상에 나와 이스케의 아이라니.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날이 다 오게 될 줄이야…….

솔직히 나만큼 부모의 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어느덧 가슴이 멋대로 뛰고 있었다.

그와 꼭 닮은 아이를 팔에 보듬는 상상, 물의 정원에서 뛰어다니는 은발 혹은 금발의 어린아이들에 대한 상상이 가슴을 세차게 두근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이유야 나도 모를 일이었다.

“상상만으로도 벌써 행복하신 듯 보여요.”

이국적인 왕비로부터 꿀처럼 달콤하고 매혹적인 속삭임이 울렸다.

빠져드는 듯한 기분…….

“네……. 행복한 그림이 떠올라 버렸네요.”

“어떤 그림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 같지요?”

당연한 일이란 거 알 수 있었다.

벌써 알 수 있었다.

그의 강한 팔에 홱 매달려 노는 부친을 빼닮은 아이의 모습.

그걸 대체 무엇과 바꿀 수 있단 말인가?

“네…….”

“그렇다면 저를 이해해 주시겠지요.”

응?

나는 느리게 눈을 깜박거렸다.

왕비는 여전히 변함이 없는 모습 그대로 나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다만 나긋나긋했던 미소는 싹 사라지고, 어딘가 서글프면서도 결연한 느낌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비 전하? 그게 무슨…….”

“미안합니다. 저를 용서하지 마세요.”

“네?”

갑자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뜬금없이 찾아온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불현듯 뭔가가 잘못된 것 같다는 감각이 일었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갑자기 마비됐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가 강한 힘이 내 사지를 꽉 붙들고 있는 듯했다.

갑작스러운 변이에 당황스럽게 끙끙대는 나를 지그시 응시하던 왕비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탄식하듯 입을 열었다.

“공자비께선 정말 좋은 분이셔요. 그런 분께 이런 짓을 할 수밖에 없는 저는 영원히 저주받아 마땅하지만, 자식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서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다들 저를 단지 노예 출신 무희였다고만 알고 있으나, 저는 대륙 국가에서 흔히 생각하는 그런 부류의 평범한 무희가 아니었답니다. 이해하시기 어려우시겠지만, 쉽게 말해 신들의 제단에 제물을 바칠 때 춤추는 의식을 치르는 무녀, 이곳 표현으로는 사술사였다고 할까요.”

그게 도대체…….

“이교도인 노예 출신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끔찍한데 심지어 이교도 신을 모셨던 무녀라니 더할 노릇이었지요. 페아놀 전하께서는 그럼에도 저를…….”

다시 발버둥을 쳐보아도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야말로 완전한 공황 상태였다.

“그 보답으로 저는 모든 과거를 버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네, 잘 아시다시피 교황청에 충성을 맹세하고 개종하여 그들로부터 세례까지 받았습니다. 종종 옛 버릇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홀로 춤을 출 때도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흉내만 낸 기분 전환용 운동에 불과했지요. 제 모든 과거는 개종의 맹세와 함께 묶여버렸기 때문에, 제가 단 한 번이라도 이교도 악마의 권능을 빌린다면 성배를 쥔 그분들이 바로 알게 됩니다. 당연히 꿈도 꾸지 않으리라고 생각해 왔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넋이 나갔다. 완전히 얼이 빠져버렸다.

“비명을 지르시거나 소리쳐 도움을 청해봤자 아무 소용 없을 겁니다. 아무도 못 들을 테니까요.”

“무슨…….”

“공자비께서도 매우 잘 알고 계시잖아요, 이 나라에서 우리 아리엔의 입지가 어떠한지. 다음 왕위 계승권을 누가 이어받을 가능성이 높은지도요. 아니, 가능성 따위가 아니라 이미 너무 명백하죠. 북부는 모든 생명체가 하루하루 생존을 다퉈야 하는 위험하고 억센 땅입니다. 이 땅에서야말로 강한 힘과 연대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 수단이지요. 그런 북부인들이 오메르타 공자 부부를 놔두고 천한 이교도 피가 섞인 공주를 군주로 받들 리가 없다는 거, 너무 명백하지 않나요.”

“그런 거…… 그런 거 바란 적 없어요. 나도 그도 단 한 번도…….”

“공자비님, 공자비께서 당연히 그런 생각 하실 분이 아니란 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언제까지나 그럴 수 있을까요?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바뀌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 사람 일이자 권력의 판도입니다. 이미 저 때문에 국왕께 불만을 품은 분이 많다는 거 알고 있어요. 어떻게든 오메르타 공자를 옹립하고 싶어 하는 세력이 득실대는 중이라는 것도요.”

그렇다 해도 이스케는, 이라고 끼어들려는 찰나 갑자기 말문이 막혀버렸다.

불현듯 일전에 롬의 동굴 안에서의 기묘한 대화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탓이었다.

그때 이스케가 했던 말과 어떤 결연한 결심으로 인해 타오르던 눈빛이…….

“하물며 공작님께선 그 누구보다도 현 왕실을 어린애 보듯 하는 분이죠. 공자님의 가족들과 친구들이, 동료들과 전우들이 전부 나서서 등 떠민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주변에서 부추기는 와중에 공자비께 더 좋은 것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요? 제 눈으로 보기에 공자께서는 능히 그러고도 남을 분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 딸은, 제 딸의 운명은 뻔하지 않나요?”

“설령, 설령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다 해도 우린 절대 왕녀를…….”

몸이 점점 옥죄이는 고통스럽고 둔탁한 감각에 가까스로 입을 벌려 내뱉는데, 죄책감과 슬픔으로 뒤죽박죽 얼룩진 레몬색 눈동자에 불쑥 화르륵 불꽃이 피어올랐다.

“공자비야 그리 말씀하실 수 있겠지요. 그분들이 원래 어떤 사람들인지 알 리가 없으시니까, 얼마나 차갑고 무서운 분들인지 알 도리가 없으시니까요. 오메르타 공작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공자도 공녀도 아리엔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저야 배척받는 것이 당연하다 쳐도, 공주는 그토록 저들을 아껴주는 외숙의 딸이기도 하거늘 시선 한 번 제대로 준 적 없다고요. 어떤 처지가 될지 뻔히 알면서 보란 듯이 그렇게! 애초에 그분들이 조금이라도 달랐더라면 오늘날 아리엔의 입지는 지금 같지 않았을 겁니다.”

정신이 혼미해 가는 와중에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당신 남편이 제대로 처신 못 한 그 모든 책임을 지금 누구한테 돌리는 거야?

왜 그걸로 그들을 탓하는 거야?

가족의 끔찍하고 비극적인 상실을 겪고서 애써 담담한 척 피폐해져 가던 사람들인데,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최대한 아프지 않으려 발악하며 스스로를 무장시키기 바빴던 이들인데, 그 와중에 당신들이 저지른 일까지 책임져 줬어야 한다고?

정작 당신들은 오만 핑계로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동안에?

“그래서 도대체 그게 지금…….”

“하물며 공자비께서는 로먀냐의 공주님이시지요. 그것도 보르히아 가문의. 교황 성하께선 여식과 사위가 북부를 다스리는 데 아무런 이견도 없으실 거고요. 저는, 저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늘 걱정 말라고 하시지만 이대로라면 우리 딸은 언젠가……. 그런데 다름 아닌 공자비의 친정에서 제게 해결책을 제시해 주시더라고요.”

몸을 일으켜 세운 그녀가 테이블에서 물러나 왔다 갔다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내 주위로 정체 모를 음산한 검은 연기가 꾸물꾸물 피어올랐다.

정확히는 내 몸에 휘감겨 나를 꽉 붙든 힘의 정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 전 과거와 같은 의식을 멋대로 행할 수 없는 몸입니다. 세례를 받은 자로서 악마의 권능을 빌린 이교도의 사술은 용서받지 못할…… 그래서 정말 놀랐습니다. 그 발렌티노 추기경께서 그런 제안을, 이교도인의 의식을 눈감아주겠다 하시다니.”

“뭐라고요……?”

“이번 한 번, 이번 단 한 번만 의식을 치러준다면 신성 로마냐는 앞으로 쭉 아리엔 왕녀에게 힘을 실어주겠다 약속하셨어요. 저는 차마 마다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하께서 인정해 주신다면 아리엔은 앞으로 걱정할 일이 없을 테니까……. 단 아무리 저라 해도 누군가를 그리 멀리 단숨에 보내는 건 어렵다고 말씀드렸어요. 모든 의식에는 그에 상응하는 제물이 필요하거든요.”

“…….”

“한 사람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제물은 역시 다른 한 사람이죠. 누군가를 그리 쓸 수 없다고 말씀드렸으나…… 그 부분도 해결해 주시더군요. 이유야 저는 모를 일이지만, 오히려 덕분에 수고를 덜게 되었다 하시면서…….”

목덜미에 서늘한 감각이 와닿으면서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아까 이곳에 오는 길에 마주쳤던 엔죠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돌아보며 연거푸 손을 흔들던 해맑은 모습이 눈앞에서 빙빙 맴돌았다.

“당신 대체 무슨 짓을…….”

“조금 전 곤팔로니에레께서 그 자리에 계셨어요.”

“…….”

“그분께 제물용 차를 드렸죠……. 미안합니다. 저도 제 자신이 끔찍해요. 언젠가 지옥에서 타 죽을 각오는 끝마쳤습니다. 아무것도 모르시는 전하께도 정말로 죄송할 따름입니다.”

제물용 차.

그리고 춤을 췄던 것.

아아, 엔죠가, 엔죠가……. 우리 엔죠 오빠가…….

“성하께서 인정? 교황이 지금 이걸…… 알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고요?”

왕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늙은 교황이 아니더라도 그 뒤를 이을 게 분명해 보이는 발렌티노 추기경의 약속이면 충분하다는 것인가?

현재 교황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아마 엔죠가 여기 도착한 이후로, 아직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을 만큼 바로 최근에…….

그러지 않고서야 체시아레가 이러한 상상 밖의 미친 짓거리를 감행할 수가 없었다.

지옥의 덩굴들처럼 나를 옭아맨 까만 연기들이 점점 더 짙게 부풀어갔다.

질식할 것만 같은 힘이 나를 옥죄면서 서서히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발버둥을 쳐도, 비명을 질러도 부질없는 짓이었다.

빌어먹을 이게 차라리 신성이었다면, 혹은 마기였다면 빠져나올 방도가 있었을 것을.

뜬금없이 듣도 보도 못한 이교도 사술이라니, 이게 웬 뭐 같은 반전이냐고!

미친 새끼가, 이제 하다 하다 추기경 주제에 우상숭배의 힘을 빌려?!

“제발…… 이러지 마요, 이게 들통나면 당신뿐만 아니라 아리엔까지…….”

“정말 미안합니다. 다시는 뵐 일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평생 속죄하며 살겠습니다.”

환한 레몬색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금 진심으로 우는 거냐!

눈물이 나오냐고, 이 바보 같은 왕비야!

어떡해, 우리 남편 어떡해!

우리 용 새끼 어떡해! 우리 애들 어떡해!

내가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지되지 않았다.

머리가 사정없이 빙글빙글 돌면서 무슨 소용돌이 한복판에 떨어지는 듯한 감각이 나를 덮쳐왔다.

눈앞의 풍경 또한 시공간이 소용돌이치듯 빙글빙글 돌며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사방이 완전한 암흑이 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느껴진 건 손목에서부터 이는 타는 듯한 뜨거운 통증이었다.

여태 거기서 묵묵히 착용자를 지켜주던 무언가가 자신과 버금가는 사악한 힘에 저항하려 애쓰다가 녹아버린 듯한…….

아니, 그건 녹아내린 것이 아니었다.

끝없이 어딘가 아래로, 아래로 빙글빙글 돌며 추락하는 동안에 무언가가 손목의 핏줄을 타고 흘러들어 오는 듯한 기괴한 감각만이 느껴졌다.

마침내 쿵, 하고 천지가 흔들리는 건지 내가 흔들리는 건지 모를 충격음과 함께 암흑의 소용돌이가 멎었다.

전신의 감각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되돌아왔다.

그리고 내가 시야를 회복했을 때,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악마의 짙푸른 눈동자였다.

“돌아온 걸 환영해, 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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