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09/136)

* * *

느리게 오르락내리락하는 목덜미가 안쓰러워 보인다.

출렁이는 쪽빛 비늘을 손바닥으로 조심스레 쓰다듬으니 끄응끄응 하는 신음이 울렸다.

“너무 뜨거워요. 원래는 차가운 편이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거의 끝나간다는 증거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라고 대꾸하는 남편 녀석은 축 늘어져 식어가는 불쌍한 매머드를 용 새끼의 주둥이 근처에 바로 놓느라 애쓰고 있었다.

매머드 같은 건 괜찮으나 마물 먹이로 말하자면 죽이면 흩어져 사라지는 것들이라 반쯤만 간당간당하게 해놔서 가져다줘야 한단다.

단, 내가 있을 때는 한 번도 마물을 산 채로 잡아 와 먹이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영 어울리지 않는 섬세한 배려였다.

마물들의 먹이사슬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거 아니까 난 괜찮은데.

“끝난다면 그럼 무사히 성장한다는 거죠?”

“허물 벗기에 성공한다면 그렇대.”

“허물 벗기? 용도 허물을 벗어요?”

“어, 근데 누가 도와줘야 해. 원래는 다른 성체가 도와주는데 이 녀석은 우리뿐이라 어떨지 장담하기 어려워. 사람이 그걸 해본 경우는 당연히 없을뿐더러 주제에 예민하긴 또 더럽게 예민해서 완전히 믿고 맡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면 벗는 걸 거부한다나.”

“벗는 걸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건…….”

이스케가 내 쪽을 돌아보며 무어라 대답하려는 찰나였다.

열에 들뜬 눈꺼풀을 반쯤 힘겹게 들어 올린 채 코앞의 매머드를 바라보던 용 새끼가 불쑥 덥석 물었다.

정확히는 매머드의 엉덩이와, 그 엉덩이에 손을 얹고 있던 이스케의 건틀렛 낀 팔까지 함께 덥석 물어버렸다!

그리고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나는 그만 두려움과 경외감에 사로잡혀 버렸다.

이스케는 제 왼팔까지 같이 씹으려고 하는 용 새끼를 한 번 돌아보고는, 그대로 솥뚜껑 같은 오른손을 들어 올려 용 새끼의 콧잔등을 그야말로 사정없이 무자비하게 퍽퍽 후려쳤다.

어찌나 인정사정없는 치도곤이었는지 눈꺼풀을 빠르게 끔벅거리며 움찔대던 용 새끼가 이내 그의 팔과 매머드의 엉덩이를 놓아주며 머리를 홱 뺐다.

“젠장할, 침 묻었잖아. 비몽사몽하고 자시고 구분할 건 구분하라고 했냐 안 했냐.”

내가 절대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이유로, 용 새끼는 불만스럽게 콧김을 팽 뿜어 보이긴 했으나 이스케에게 덤벼들지는 않았다.

내가 입을 벙하게 벌린 채 바라보는 가운데 침 범벅된 팔을 짜증스럽게 매머드의 옆구리에 문지르던 이스케가 그제야 나를 다시 보았다.

“아, 오해하지 마. 맨날 이래.”

“……마, 많이 친해진 것처럼 보이네요 둘이.”

“친해져? 내가 얘랑?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이 염치 없는 녀석은 단지 나한테 덤벼들면 식량 줄이 끊긴다는 걸 알 만큼 영악해서 참는 것뿐이다.”

너 대체 용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니?

내 보기엔 그런 이유는 전혀 아닌 듯한데.

잠시 후 성장통 앓느라 상전 노릇을 하는 우리 용 새끼가 맛있게 찹찹 식사를 뜯는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손바닥을 털며 다가온 이스케가 내 옆에 앉았다.

그의 뒤로 쌓인 보석 더미가 찰그랑찰그랑 반짝이며 은빛 머리카락을 오색 빛깔로 물들였다.

“허물 벗기를 끝끝내 거부한다면 결국 혼자 질식해 죽을 거라는데, 단장님이 걱정하신 게 바로 그거야. 널 온전히 믿는다고 해도 네가 아닌 다른 놈이 나서서 손을 대면 아무 소용 없거든. 계속 안 하려고 할 거라나.”

“그럼 만일 저 혼자…….”

“너 혼자서는 안 돼. 성체가 벗겨주는 만큼의 힘도 힘인 데다 위험하기도 하다고. 한 번에 제대로 해줘야 하는 데다 무사히 성공한다 해도 벗긴 허물이 한동안 꾸무럭댄다고. 보통은 성체가 먹어버리지만 다른 종자라면 잘못 휘감겨서 으스러져 죽어버릴 수도 있어.”

“아아…….”

“여러모로 참 골치 아픈 녀석이지.”

“그러네요, 정말.”

“너무 걱정하지는 마, 어떻게든 최대한의 방법을 모색 중이니까. 어쩌면 저 두 녀석이 도와줄지도 모르고, 그새 친해진 듯하니.”

우리는 잠시 고개를 젖히고 그 두 녀석을 쳐다보았다.

딱딱대는 그리핀을 향해 오색 빛깔 보석을 촤르르 뿌리며 꺄르륵대던 포포가 이쪽을 향해 고개를, 아니, 몸통을 갸웃거렸다.

“……그, 그리핀은 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허물을 쥐고 공중에서…….”

“그 그렇지. 아니면 반대로 포포리가 잡고 끌어내리는 식도 괜찮고, 저놈은 더럽게 무거우니까.”

“그것도 괜찮네요.”

우리가 이렇게 자기 일처럼 고민하는 걸 알 턱이 없는 용 새끼가 매머드를 맛있게 뜯다 말고 포포 쪽을 노려보며 그르렁거렸다.

그 와중에도 자기 보석 멋대로 갖고 노는 건 싫은가 보다.

“항상 이렇게 당신이 직접 식사를 갖다줘요?”

“나만 그러는 건 아니고, 우리끼리 번갈아서. 네가 없을 때는 우리 중 누가 혼자 들어오는 건 지양 중이야. 이 녀석 전적이 전적이라 불안하기도 하고 저 두 놈도 너만 없으면 자꾸 이상한 장난 치려고 해서. 쯧, 계속 봐주니까 대놓고 맞먹으려 들지…….”

“어머, 무슨 장난?”

“그건 왜 궁금한데, 친구랍시고 따라 하시게?”

이게 진짜, 내가 애냐?

순간 발끈했으나 너그러이 참기로 마음먹었다.

절대 아까 그 무시무시한 치도곤 장면이 떠올라서가 아니다.

“그냥 일전에 카뮤 경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일이 그거랑 관련됐나 궁금해서거든요?”

“그건 그 새끼가 먼저 저 새대가리 꽁지를 붙들고 늘어져서 생긴 일이고, 그것보다 우리 곤팔로니에레는 요즘 뭐 하고 다니신대? 아직까지도 인사를 못 나눴네.”

그건 이스케의 잘못이 아니었다.

비록 처음엔 내가 궁에서 엔죠와 단둘이 면담 시간을 가진 걸 알게 되자마자 아버님의 멱살을 잡으려 들긴 했었지만.

물론 내가 엔죠의 단순한 인간성과 남매로서 나눈 대화를 열심히 설명하고 나자(쉬운 일은 아니었다) 금방 진정하고서 그대로 박차고 나가 엔죠를 질질 끌고 오려던 기세를 접었다.

게다가 이스케는 요즘 여러 일로 몹시 바빴다.

문제의 축제일 이후로 그 많은 마곡석에 제대로 홀린 탓인지 해롱거리며 아무 데나 기어 나오는 마물들도 문제였고, 서리용이 성장통을 앓느라 동네방네 죽어가는 곡소리를 흘려대는 탓에 그간 용 눈치 보며 몸 사리고 있던 녀석들 또한 요란하게 겨울맞이를 하고 있었다.

서리용이 일어나서 사냥도 하고 적당히 잡아줘야 축제 전과 같은 평화가 오는 것이었다.

거기에 하루에 몇 번씩이나 서리용 식사도 잡아주랴 수도 곳곳에서 펼쳐지는 구호 행사 보호해 주랴 툭하면 들어오는 신고에 달려가랴 국왕이 따로 시키는 일까지 하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터였으나, 그럼에도 곤팔로니에레를 따로 만날 시간은 내려고 했다.

엔죠는 궁전에서 머무르고 있는 와중이라 서로 만나려고 하면 언제든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잘못이 있는 건 온전히 엔죠 쪽이었다.

나는 손을 올려 그의 투박한 갑옷 가슴팍에 대보면서 한숨을 내쉬는 시늉을 했다.

“노느라 바쁘지요. 북부 사교계를 제패라도 할 생각인지 온갖 모임마다 출석해서 흥에 겹기 바빠요. 사고나 치지 말아주면 좋겠네.”

“흠, 밤이 깊을 무렵이면 혼자 슬쩍 빠져나가서 붉은 등이 켜진 거리로 간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누, 누가 그런 말을 했어요?”

“우리 집 호위 기사 중 한 놈이 거기서 봤대.”

“……그래서 당신은 뭐라고 했는데요?”

“넌 대체 거기 왜 있었냐고 물었지. 진짜로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인데 갑자기 질질 짜더라고.”

알 만하구먼.

웃음이 킥킥 나왔다.

내가 검은 판금 갑옷 여기저기를 꾹꾹 만지작대는 동안 그의 시선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째 갑자기 진지해진 분위기라 나 또한 슬그머니 시선을 마주하는 찰나였다.

“확실히 제 형이랑은 종자가 다른 모양이네.”

불쑥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내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그러고는 말끄러미 올려다보는 내 눈길을 피하는 듯 고개를 홱 돌려버리는 것이었다.

“이스?”

“…….”

“이스, 왜 그래요……?”

한동안 아무 대꾸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의 표정을 바로 보려고 몸을 약간 들석이는 참에 그제야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도 떠받들어지면서 살다 보니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다고 착각했어.”

“네?”

“그런데 정작 가장 간절한 순간에는……. 제기랄, 잘난 가문 이름이고 명성이고 뭐고 아무 소용이 없군그래. 상대가 교황 장남이시니.”

“…….”

“머릿속으로는 수백 번도 더 찢어 죽였는데, 현실에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그저 덜떨어진 외숙한테 기대하는 것밖에는……. 내가 이토록 무력한 놈이었을 줄이야.”

자조적이다 못해 참담하게 울리는 중얼거림에 심장이 철렁하는 느낌이 일었다.

아아……. 이스케는 체시아레에 대한 문제를 단 한 번도 구석으로 밀어둔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 축제 동안에 벌어지고 밝혀진 모든 것을 시도 때도 없이 떠올리며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자책할 일이 아니라는 말은 이미 몇 번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쓰라린 자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책감과 나로서는 가늠할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나는 몸을 약간 움직여 그에게 바짝 가까이 달라붙었다.

손을 올려 너른 어깨를 살살 쓰다듬자 그가 수그린 고개를 약간 들었다.

“이스……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요. 내가 당신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된 일이기도 하고, 당신이 그 사람 떠올리면서 힘들어하는 건…….”

“그때 그놈을 죽였어야 했어.”

“그랬으면 당신은? 나는? 아버님이 아니었더라도 내가 말렸을 거라고요. 물론 나도 그 인간이 콱 쓰러져 죽어버렸으면 참 좋겠지만 무작정 죽인다고 끝이 아니잖아요.”

조심스럽게 덧붙이는데 붉은 눈동자가 더할 나위 없는 기묘한 빛으로 요동을 쳤다.

“단 한 번도 권력이 아쉽거나 탐난 적이 없었는데…….”

응?

“오메르타의 이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젠 그것만으론 부족하다는 걸 확실히 알겠어. 이참에 차라리…….”

내리깐 그의 눈에 깜박거리는 뜻밖의 빛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야망? 권력욕?

아니, 그런 것들보다는 한층 고차원적인 무언가였다.

용이 내뿜는 열기로 인해 공기가 더웠음에도 불구하고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러나 내가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이스케는 눈을 몇 번 세차게 깜박이더니, 순식간에 그 표정을 지워버리고는 나를 향해 피식 웃었다.

“남편이 청승 좀 떨었다고 그런 표정 할 것까진 없잖아.”

“……내가 어떤 표정 하고 있는데요?”

“바보 같은 표정.”

“바보라니……. 당신이 먼저 바보 같은 소리 해서 그런 거잖아요!”

“그런가? 미안, 팔자에도 없는 짓에 시달리다 보니 청승맞은 감상이 치솟아서. 좀 껴안고 달래주지 않을까 싶었지.”

어깨를 으쓱하며 이죽거리는 남편놈에게선 조금 전의 기묘한 위화감은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말 괜찮은 걸까?

아니면 단지 날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뿐일까?

어쨌든 조금 전의 화제를 다시 이어가고픈 마음도 그럴 기미도 없었기에 나는 그를 째려보는 시늉을 하며 판금 갑옷 위를 꾹꾹 눌렀다.

때리는 시늉을 하면 내 손바닥이 더 아플 것 같아서였다.

“왜 자꾸 그렇게 쓸어? 손바닥이 더러워지잖아.”

“신기해서 그래요 신기해서.”

“또 뭐가 그렇게 신기하실까.”

“일단 색깔부터가요. 성기사 갑옷이면 대부분 환한 색으로 만들잖아요. 하얀색이라든가 은색이라든가, 딱 봤을 때 신성하고 정의로운 느낌의 이미지로요. 그 원탁? 기사단 분들도 은색이던데.”

“우리가 좀 그렇긴 해. 창립 때부터 양다리 걸친 입장이라 속 시커먼 거 못 드러내서 안달이지. 그래서 마음에 안 드시나?”

“아하하, 아뇨. 오히려 팔라딘답지 않은 갑옷이라 더 멋있는데. 우리가 진짜 부부가 됐던 그날 당신이 연회에서 입었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지난날들을 떠올리며 감상에 젖느라 내가 방금 뭔 소리를 내뱉은 건지 인지하는 데 좀 걸렸다.

뒤늦은 깨달음에 화들짝 고개를 들었을 때, 남편 놈은 이미 아주 가관인 낯짝을 하고 있었다.

“그게 마음에 들었어……?”

“마, 마음에 든다기보다는 나쁘지 않았다는 거…….”

“방금 이 갑옷보다 멋있다고 했잖아. 그런 스타일이 취향이었나?”

취향은 무슨 취향!

그런 야한 취향 따위 없단 말이다!

아, 얼굴로 피가 확 몰린다.

내가 대체 뭐에 홀려서 헛소리를 다 한 거지?

“그, 그런 거 아니에요.”

“바란다면 또 입어줄 수 있는데. 앞으로 연회 때마다 연회복으로 삼아야겠군. 다들 내가 열심히 일하다 온 줄 알겠…….”

“그건 안 돼요!”

소리를 빽 지르자 그가 움찔하며 새빨간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가 미쳐 진짜!

“아 깜짝이야. 왜? 취향이라면서.”

“취향은 무슨……! 아니, 다른 사람들이 자꾸만 당신을, 뭐 원래 항상 그렇긴 해도 그거 입으면 특히 더 훑어보잖아요! 대체 무슨 옷이 그 모양이냐고! 정말 일할 때 입는 거 맞기는 해요?”

“그, 그 모양이라니, 나름 중요한 사연 있는 유니폼인데, 양다리 걸친 롱기누스 기사단이 국왕의 밀명을 받들 때 임무를 수행하느라 갖추는…….”

“무슨 임무요?”

“어……? 그건 국가 기밀인데…….”

“하! 대체 얼마나 비밀스러운 임무이길래 그런 디자인이 필수 불가결하냐고요!”

“그야…… 당연히 갑옷보다 훨씬 가벼우니 움직임도 빠르고 면적이 작으니 체취가 덜 배니까 기척을 들킬 우려도 줄어들고 비나 눈이 와도 덜 젖고 상처가 나면 바로바로 알 수 있고…… 타지 출신 놈들이나 잘 모르는 놈들은 그냥 어느 길 잃은 외국인인 줄 아니까 방심하게 만들기도 쉽다고.”

“……절대 북부에서 입고 다닐 만한 옷은 아니긴 하네요. 그래도 평소에는 안 돼요! 나랑 있을 때만 입는다면 모를까! 디자인한 양반만 변태였는지 왕들이 대대로 변태인 건지 알 수가 없네 진짜!”

식식대며 덧붙이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흥분으로 잠깐 나갔던 이성이 서서히 돌아오고 나니, 그제야 육질 씹던 주둥이를 반쯤 벌린 채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 용 새끼와, 서로 꼬옥 부둥켜안고서 마찬가지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는 포포와 그리핀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니, 애들아…….

너네 무시무시한 마수들 맞니? 왜 겁먹은 것처럼 보이는 거야?

나는 주춤거리며 어색한 시선을 돌렸다.

우리의 주인공, 북부 최고의 팔라딘 또한 녀석들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하고 계셨다.

가만 생각해 보니까 내가 방금 북부의 군주들까지 싸잡아 비하한 거 같아.

아이고, 이를 어쩐다!

지나치게 과격한 모습을 보여버렸어!

최대한 수습하기 위해 할 말을 쥐어짜 내려 애쓰는 찰나였다.

멍한 눈으로 날 말끄러미 보기만 하던 이스케가 불쑥 고개를 뒤로 젖히며 뜻밖의 폭소를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푸하하하하하!”

“우, 웃지 마요! 지금 뭐가 웃긴다고……. 아 웃지 말라니까!”

내가 다시 발끈하거나 말거나, 이스케는 대체 뭐가 그리 웃기는지 심히 때아닌 폭소를 멈출 생각을 안 했다.

아예 배를 잡고 뒹굴 기세다.

급기야 나는 그의 등짝을 찰싹찰싹 난타하다 말고 홱 돌아앉아 버렸다.

“아, 몰라요 이제! 마음대로 해!”

웃다가 숨이나 넘어가라 이놈아! 그 삭막한 양반이 진짜 웃길 것도 쌔다, 쌨어.

헐떡거리며 몸을 바로 세운 남편 놈이 대뜸 양팔로 나를 끌어당긴 것은 그때였다.

그러더니 나를 꽉 안고서 화끈거리는 뺨에 입을 꼭 맞추는 것이었다.

“알았어, 안 입을게. 둘이 있을 때만 빼고.”

“……진짜예요?”

“진짜 진짜.”

요놈 보게? 어째 갈수록 하는 짓마다…….

“큼, 저어, 저기요?”

“뭐냐, 넌 왜 갑자기 새삼 정중한 척이야?”

“……단장님께서 이만 여기서 해산하라신다. 곧 해가 떨어질 텐데 부인께서도…….”

“알았어.”

몸을 옥죈 팔이 느리게 풀리는 느낌이 못내 아쉽다.

남편의 손을 잡고 일어나 돌아보니, 은신처 입구 쪽에 서 있는 아이반 경과 앤디미온이 보였다.

떨떠름한 표정을 예상했거늘, 왜 저렇게들 멍해 보일까?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씁쓸해 보이기도 하고 희한하군.

어쨌든 그렇게 용 새끼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 뒤 다들 동굴 밖으로 나왔다.

과연 어느덧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타오르는 듯한 따스한 붉은 석양빛이 롬의 동굴 골짜기를 비롯해 서리숲 일대 전체를 물들이는 풍경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빛을 맞으며 삼삼오오 길을 내려가는 젊은 기사들의 모습.

참 그림 같은 풍경이 아닐 수 없다.

혼자 보기 아까울 지경인걸.

“저 녀석은 왜 계속 쫓아오는 거냐?”

“포, 포, 포, 포…….”

“이스, 잠깐만…….”

또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앤디미온까지 심각한 표정인 거 보니 중요한 일인 것 같다.

친애하는 소수정예가 잠시 저들끼리 모여 뭐라고 숙덕거리는 동안 나는 그들로부터 좀 떨어진 지점에서 포포와 함께 파란 서리꽃 덤불을 감상했다.

“포, 포.”

“포포야, 너 눈 묻었어.”

“포, 포, 포.”

덤불들 속으로 홱 뛰어들었다 튀어나왔다 하며 노는 포포는 몹시 신이 나 보였다.

아까 겁먹은 것 같은 모습은 어디로 가고 갑자기 엄청 기분이 좋아진 것 같다.

“끔찍한 일이나 슬슬 저 녀석도 정들려고 합니다.”

어느덧 곁에 가까이 다가온 아이반 경이 포포가 하는 모양새를 보며 중얼거린 말이었다.

나지막이 팔짱을 끼고 선 자태가 참으로 석양 아래 핀 꽃이 아닐 수가 없다.

그래서 요즘 우리 시누이랑은 어떠신가요?

“나름 귀엽지 않나요?”

“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이야 저러고 해맑은 척하는데 부인께서 안 계시기만 하면 본색을 드러낸단 말입니다. 계속 봐주니까 아주 맞먹고 고약한 짓만 골라서…… 참, 한데 그것보다 곤팔로니에레께서 오셨지 않습니까. 그간 여쭐 틈도 없었고 이스 저놈도 평화롭길래 가만히 있었습니다만…….”

“네?”

“큼, 주제넘지만 단지 혹시나 해서 말입니다. 정말로…… 괜찮으신 거 맞지요? 그쪽 치가 왔어도.”

고운 담녹색 눈동자에 묘한 빛이 깃들었다.

단지 석양빛일지도 몰랐다.

내가 그날 비단 이스케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이들 모두 앞에서 무슨 꼴을 보였는지를 생각한다면.

설상가상으로 아이반 경과 카뮤 경은 함께 전날의 더한 꼴까지 봐버린 목격자였다.

그럼에도 이제 보니 나도 이들도 여태 서로 그날들에 대한 내색이라든지 언급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내 눈에 깃든 의문을 본 것일까.

아이반 경이 나직한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놈이랑 저는 과자로 칼싸움하던 시절부터 알아왔습니다만…… 아까처럼 웃는 건 어릴 때 이후로 처음이었습니다.”

“그랬어요?”

“예. 잘 아시잖습니까, 원래 어떤 놈이었는지.”

“…….”

“하여튼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저희야 그저 저놈 친구들일 뿐이고, 부인께서 이 땅을 밟으시기 전까지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 알 수 없지만…… 이젠 북부인이시라는 거, 그리고 이 춥고 험악한 곳의 인간들에게 아주 많은 일을 해주시고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서리용을 강아지 다루듯 하시는 것뿐만이 아니더라도요.”

내가 해주고 있다고?

오히려 내가 받고 있는 게 더 많은 것 같은데요.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저 혼자서 하는 게 아닌걸요, 안 그래요?”

일순 멍한 얼굴로 날 보던 아이반 경이 곧이어 나를 따라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포, 포, 포…… 포오!”

일이 터진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이반 경의 모습이 갑자기 멀어져 가는 듯한 느낌과 함께 포포의 비명 같은 외침이 귓가에 웅웅 울렸다.

순식간에 뭐에 둘러싸이기라도 한 듯 아름다운 숲의 풍경은 사라지고, 무언가 나를 붙들고 둥둥 뜨는 듯한 느낌과 함께 사방이 온통 검고 잿빛투성이인 안개로 변했다.

쉬이익, 쉬이익 하는 음산한 울림이 귓가를 스쳤다.

어디선가 들어본…… 아마 축제의 마지막 경기 때였을 것이었다.

언데드 종의 무언가가 내는 소리.

언데드 마물이 대담하게도 아이반 경의 코앞에서 나를 덮친 것인가?

덤불 속에서 놀던 포포 때문에 마기의 접근을 놓쳤을 가능성이 컸다.

소리를 지르려고 입을 여는데 목소리가 꽉 틀어막힌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혹은 나오는데 이 연기인지 안개가 차단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쉬이익, 쉬이익, 하는 연이은 울림에 이어 뭔가 요란하게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한두 개가 아니라 상당한 수의 기괴한 목소리들이 저들끼리 빠르게, 즐겁다는 듯이 속삭이는 울림이 머리를 빙빙 돌게 만들었다.

귀를 틀어막아 버릴까 하는 찰나였다.

“우흐흐흐흑…….”

이게 누구신가?

오메르타 성에서 걸핏하면 내 귀에 들리던 그 울음소리의 주인공 아니신가?

밴시인지 뭔지, 그럼 여기에 밴시도 있는 걸까?

“흐흐흐흑…….”

밴시의 모습을 보려고 눈을 부릅뜨고 이리저리 살펴보았으나 온통 퀴퀴한 안개뿐이었다.

팔을 들어 휘휘 저어 보았다.

“으흐흐흐흑…….”

대체 뭐야, 맨날 울지만 말고 정체를 좀 드러내란 말이야!

네가 울면 불안해진다고, 왜냐하면 밴시가 울면 집안의 누가 죽는다는 말이 있으니까…….

시커먼 연기를 흩뜨리려 허우적대던 팔이 갑작스레 뭐에 꽉 붙들린 듯, 정면을 향해 홱 쏠린 것은 그때였다.

감촉은 없으나 목덜미가 절로 곤두서는 듯한, 소름 끼치는 느낌이 일었다.

있는 힘껏 뿌리치려고 했다.

“내 아…… 아드…….”

또렷이 귓속을 파고드는, 꺾어지는 듯한 기괴한 음성에 숨이 일순 딱 멎었다.

환청인가?

환청이 아니고서야 마물이 사람 말을 할 리가 없다.

게다가 난 마물 말을 자동 통역해서 알아듣는 능력은 없었다.

그런데…….

“아…… 아드……. 아드으…….”

양팔이 붙들리면서 싸늘하고 으스스한 무언가가 가까이, 내 가까이 다가오는 감각.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와중에도 나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거의 숨도 내쉴 수가 없었다.

“내……. 아들……. 내…….”

내 아들?

“내…… 내 아들…… 내 아기…….”

내 뒤통수가 쩡 하고 울리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그와 동시에 시야를 가린 장막 같은 잿빛 연기 사이로 어떤 형태가 깜박거렸다.

말 그대로 깜박거리고 있었다.

끔찍하고 역겨운 구울의 형태와 아름다운 여인의 형태가 마치 이중으로 겹친 홀로그램처럼 번갈아 깜박거리며 나타났다.

두 형태가 하나라는 것, 어느 쪽이 실제 모습이고 어느 쪽이 본질인 것쯤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끔찍하게 고통받고 있다는 것, 슬픔과 회한에 사무치고 있다는 것, 내게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것도.

차고 끈적한 느낌이 뺨에 와 닿았다.

그녀가 누구인지는 의문을 품을 겨를도 없었다.

구울의 모습을 안간힘을 다해 물리치고 있는 본질의 모습은, 다름 아닌 내가 너무도 잘 아는 누군가와 꼭 닮았으니까.

우리 엘레니아와 너무도 비슷했으니까.

왜 울고 계셨나요, 당신은…… 그곳의 주변을 맴돌면서.

매번 두 번 죽을 위험까지 감수하고서 말이지요.

이젠 알아보지도 못할 거라는 거 알면서.

내 귀에만 들리는 흐느낌은 아무 쓸모 없는걸요.

왜 여기서 나를 붙들고 그런 얼굴을 하고 계시나요.

난 당신을 안 적이 없는데, 당신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인데…….

“내…… 내 아기…… 아기들……. 자. 잘…….”

바로 그 순간 확 하고 총성에 군중이 흩어지듯, 눈앞에 보이던 모든 것이 나타났던 것만큼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귓가에 남은 건 단말마의 비명뿐이었다.

“부인!”

“포오!”

다시 돌아온 세상에서 나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주위가 온통 시끄러웠다.

뭔가 푹신푹신한 것이 나를 격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보니까 포포였다.

“괜찮아?”

포포를 홱 밀쳐버리며 다가온 이스케가 내 어깨를 붙들었다.

다급하고도 걱정에 가득 찬 모습, 그 옆으로 그의 검이 푸르스름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나 어떻게 된…….”

“언데드들이 갑자기 덮쳐왔어. 이 돼지 포포리 때문에 마기를 제대로 감지 못한 바람에, 하여튼 괜찮아? 많이 놀랐을 텐데 다친 데는 없어?”

“죄송합니다 부인, 제가 바로 옆에 있어 놓고는 어떻게 그걸…….”

“머리 박고 죽어라 등신아!”

“이런 ㅆ……. 네놈들도 몰랐잖아!”

“네놈은 바로 옆에 있었잖아! 팔라딘 딱지 떼라 덜떨어진 새끼야!”

“이런 X발 잡것들이 너희 이리 좀 와봐.”

“포, 포!”

“루비?”

나는 눈을 깜박거리며 걱정스럽게 다그치는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있잖아, 방금…….

“방금…… 그거 당신이 물리친 거지요?”

“그렇긴 한데 다른 것들도 같이 있었어. 이 숲에선 여러 종류끼리 같이 몰려다녀서, 전부 없애버렸으니까 이젠 괜찮아.”

그렇구나. 그런 거구나…….

“루비, 왜 그래? 혹시 그사이에 그것들이 환각이라도 보였어?”

투박한 손바닥이 내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면서 석양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잠시 석양을 등지고 선 꿈결 같은 모습의 기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가, 이내 도리질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것의 본질은 아무것도 아니길 바랄 테니까.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괜찮을 거야.

우리는 괜찮을 거야.

우리 모두 괜찮을 거예요, 그러니까…….

내 미소가 이상해 보였던 걸까, 이스케가 머뭇거리듯 두 눈을 깜박거렸다.

손을 올려 그의 뺨을 쓰다듬으니, 시끌시끌하면서 우리를 지켜보던 친애하는 경들이 슬그머니 서로 툭툭 치며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아주 멀리 가진 않겠지만, 나중에 또 만나요…….

“포, 포, 포, 포!”

한쪽에 나동그라졌던 포포가 갑자기 다시 폴짝 일어나 저만치 콩콩 튀어갔다.

쫓아 돌아본 그곳에는 파란 서리꽃 덤불들이 우거진 숲길 한복판, 어느덧 보라색과 남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향해 나란히 떠오르는 무수한 반딧불이들이 있었다.

“우와아…….”

포포를 따라 콩콩 뛰어가 환상적인 풍경 한복판에 파묻혔다.

서리꽃 더미에 푹 빠졌다가 홱 고개를 드니 코가 간지러웠다.

뒤따라온 남편이 에취 재채기하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하여간 애도 아니고…….”

“너무 예쁘지 않아요? 이런 풍경 본 적 있어요?”

“……예쁘긴 하네.”

“우와, 웬일로 순순히 수긍해요?”

“너 말이야, 이래도 불만 저래도 불만일 거면…….”

내가 그의 목에 팔을 감고 홱 끌어당기는 바람에 이스케는 더는 말을 하지 못했다.

천지에서 황금빛 반딧불이가 떠다니는 풍경 한복판에서 우리는 사이좋게 드높은 수풀 속으로 쓰러졌다.

“루비.”

“쉿. 아무 말 말아요.”

손가락을 그의 입술에 가져다 대니 석양의 빛깔과 닮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랬다가 반딧불이라도 담겼는지, 총총 반짝거리는 웃음기가 번졌다.

“포, 포, 포, 포, 포!”

저만치서 포포가 푸른 꽃잎을 촤르르 허공에 흩뿌리며 반딧불이들과 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잊을 만큼 환상적인 풍경에 녹아내려 더없이 황홀한 둘만의 무아지경에 빠져들고 있었다.

아름답고 아름다운…….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었어, 너는.

그날의 너를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그러니 너도 나를 기억하겠다고 말해줘.

언젠가 시간이 오래오래 지나 내가 먼저 너를 떠나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눈부시게 빛나는 갑옷을 입고서 찬란한 석양을 바라보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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