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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죠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선포했었으나, 그와 함께 온 사절단이라면 또 다른 얘기였다.
일단 교황청에서 위로와 축복의 뜻으로 친히 에렌딜 신전에 기부하는 막대한 구호 자금.
나아가 교황청 소속 치료 사제들과 고위 성직자들이 한바탕 피의 축제를 치른 도시 곳곳을 방문하며 구호 활동을 펼치는 중이었다.
곤팔로니에레가 저 모양이긴 하지만 어쩌랴.
본인들은 본인들 맡은 바를 수행하는 수밖에.
따라서 명색이 사돈인 오메르타 입장에선 시국이 놀 시국이 아니라 한들 성도로부터 여러 은덕을 실어 온 곤팔로니에레를 위해 조촐한 연회라도 열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이에 이미 그새 낮이면 온갖 사교모임에 기웃거리다, 밤이면 타락한 거리로 슬쩍 빠져나가는 뭐 같은 짓만 골라 하던 참인 엔죠는 당연히 몹시 기꺼워하며 부랴부랴 달려왔다.
“이야, 과연 오메르타 공녀의 미모는 초상화 따위 따라갈 수가 없군요. 우리 거의 결혼할 뻔한 사이였던 거 아시지요? 와하하하, 그때 그냥 내가 하겠다고 할걸!”
나는 엔죠의 등짝을 한 대 후려쳐줄까 하다가 가까스로 충동을 억눌렀다.
다행히 엘레니아는 엔죠를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뭐 보는 눈빛이긴 했으나 예의 그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예의를 잃지 않았다.
예의가 아슬아슬한 이는 되레 우리의 아이반 경 쪽이었다.
저저 눈빛 차디찬 거 봐.
차라리 욱하는 게 덜 무섭다니까, 우리 한 떨기 꽃께서는.
나는 얼른 황급히 나섰다.
“오빠, 내 시누이한테까지 이상한 수작 부리면 내가, 아니, 그전에 내 남편이 오빠를 반으로 찢을지도 몰라.”
“아 야, 내가 무슨 수작을 부렸다고 그런 무시무시한 소릴 하냐? 난 그냥 긴장 풀고 친화감을 키울 겸 하는 말이라고. 안 그렇습니까? 공녀랑 나랑 그런 뜨거운 사이가 될 뻔한 것도 사실인…….”
“그만하고 이리 와봐, 내가 뭐 보여줄게.”
엔죠가 한마디만 더 하게 놔뒀다간 얼음 공녀를 사모하는 한 떨기 꽃께서 칼부림을 일으킬 기세가 훤했기에 나는 부랴부랴 엔죠를 끌고 나갔다.
엔죠는 뭐라 뭐라 투덜대면서도 정말로 수작 부릴 마음은 없었는지 의외로 순순히 끌려왔다.
“갑자기 뭐 보여준다는 거야?”
“정원. 멋진 정원.”
“난 정원보다 사람들이 더 좋은데. 나 진짜 네 시누이 어쩔 마음 없다니까?”
“라고 로마냐 최고의 호색한께서 말씀하시는군요. 나 곤란하게 만들기 싫다고 할 땐 언제고, 벌써 내가 들은 소문만 해도 몇 개인 줄 알아?”
“아, 아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그리고 내가 뭐 잘못한 것처럼 말하는데 전부 쌍방이라고 쌍방, 내가 너무 멋있는 걸 어쩌냐?”
신이시여, 이 새끼를 구원하소서.
비교적 한적한 뜰로 나오자 나는 꽉 붙들었던 놈의 팔을 놓아주고 한숨을 내쉬었다.
“뭘 하면서 놀든 좋다 이거야……. 다만 여긴 타지라는 거 기억해 둬. 심지어 북부라고, 멋대로 혼자 거리 돌아다니다간 마물 밥 되기에 십상이야.”
“헤에, 너 나 걱정해 주냐? 쪼끄만 게 벌써 이렇게 컸어?”
“아, 진짜 좀. 그리고 좀 한군데 붙어 있어, 오빠가 하도 내키는 대로 왔다 갔다 하니까 아직 내 남편이랑 인사도 제대로 못 했잖아.”
“난 네 남편 만나기 싫은데.”
“뭐? 왜?”
“그야 당연히 내 이쁜 여동생 훔쳐 간 놈이니까 그렇지!”
참으로 당당하게 외치는 곤팔로니에레셨다.
그러나 내가 빤히 쳐다보자, 즉시 힘차게 펼친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머쓱하게 중얼거렸다.
“사실은 좀 무서워서.”
“무섭다니? 또 나 모르는 뭔 죄지었어?”
“넌 날 뭘로 보고! 아니, 무려 그 형 새끼를 시름시름 병든 병아리 꼴로 만든 친구잖아? 게다가 형한테 화났다고 나한테 분풀이하려고 들면 어떡해? 듣자 하니 성격도 좀 일반적인 상식이랑은 거리가 먼 듯하던데. 아니, 완전히 개차반이던데. 만일 형을 못 끝장낸 대신에 나를 끝장내겠다고 선포한다면…….”
“지금 내 남편 얘기하는 거 알고 있지?”
“큼, 실례. 아무튼 되도록 만나는 건 자제하고 싶다고. 난 아직 못다 한 일이 많단 말이다.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 야, 저 여자 누구냐?”
이 새끼가 그새 또?
기가 막혀서 돌아본 그곳에는 웬걸, 뜻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
“어머, 퓨리아나 영애?”
뜰 한구석, 노간주나무 근처에서 고개를 떨어뜨린 채 조용히 서 있던 프레이야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딱 보아하니 안에 들어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던 모양이었다.
하긴 얘도 초대를 받긴 했겠구나.
그때 유리정원에서 같이 밀림의 야수들처럼 뒤엉켜 싸운 뒤 처음 보는 프레이야였다.
그날의 우스꽝스러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우아하고 고고한 미모의 영애로 돌아왔다.
단 예전의 단호한 자신감으로 찬 분위기는 어째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왜 거기 그러고 계세요? 어서 안 들어가시고. 어디 불편하신지요?”
한껏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건네자 약이 오른 모양인지, 멍했던 보라색 눈이 날카롭게 나를 흘겨보기 시작했다.
“부인 찾아온 거 아니네요.”
“그랬으면 끔찍하게요. 그래도 연회 참석하러 오신 걸 텐데 어서 들어오시지 그래요?”
“……이스, 안에 있어요?”
“어라라, 영애께선 아직도 제 남편을 찾아대시네요?”
“그런 게 아니! 후, 그럼 엘렌은…… 엘렌만이라도 좀 불러줘요.”
“내가요? 그리고 부른다고 나올 것 같지도 않은데. 무슨 얘기든 직접 가셔야 할 것 같아요.”
“이봐요, 나는!”
지레 짜증이 솟았는지 막 언성을 높이려던 그녀가 황급히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수그리고서 잠시 잘근잘근 입술만 깨무는 것이었다.
흠, 무슨 일이려나?
보아하니 연회에 앞서 뭔가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온 듯한데…….
“……사, 사과하러 온 거예요.”
“네?”
“그 둘한테…… 사과하러 온 거라고요. 그때 그…… 성 아그네스 축일 일도 전부 다…… 부인이 말한 대로요.”
“…….”
“공작님은 절 만나주시겠지만, 어른들한테 털어놓으면 백부님이……. 그래서……. 후우, 짜증 나게! 됐어요, 상관 마요.”
난 더 이상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데 왜 갑자기 혼자 짜증이람?
팔짱을 끼고서 조용히 우리 둘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엔죠가 불쑥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엔죠는 조금 전까지의 방정맞은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퍽 점잖은 체하면서 프레이야에게 다가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수수께끼의 아리따운 북쪽 레이디시여. 나는 여기 공자비의 오라비 곤팔로니에레입니다.”
……저 멘트는 도대체 어느 나라 멘트냐.
시공간이 오그라드는 듯한 멘트에 프레이야가 순간 뭐 보는 듯한 표정이 되어버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곤팔로니에레시라고요……?”
“예? 예, 뭐. 저에 대해 흥미로운 사실이라곤 실은 그것뿐이라서요. 여러모로 누이동생이랑은 다르죠.”
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방정맞게 머리를 긁적거리는 엔죠였다.
길거리 잡배 보듯 굳었던 프레이야의 눈빛이 약간 풀어졌다.
저걸로 왜 풀어졌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녀가 갑자기 내 쪽을 힐끔거렸다.
뭐지, 갑자기 눈치라도 보는 것 같이 굴지 말렴, 얘. 안 어울리니까.
“그렇군요. 공자비의 오라비시라면, 지난번에도…….”
“아예 다른 쪽이에요. 바보지만 착하니까 영애랑도 다르려나요?”
넌지시 내뱉자 두 사람 모두 잠시 볼 만한 낯짝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혀를 슬쩍 내미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럼 전 먼저 안으로, 할 일이 좀 많아서요.”
“너 이 못된…… 큼, 영애, 우리도 들어갈까요?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아, 저는…….”
“아까 저 녀석이 말했잖습니까, 뭐든 직접 가서 말씀하셔야 한다고. 쟨 거짓말은 안 하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곁에서 용기를 부추겨 드리겠습니다.”
부추기긴 뭘 부추기니, 북돋아 주는 거겠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앞장서는 나를 어쩌다 붙어 있게 된 두 기묘하고 우스꽝스러운 조합이 느릿느릿 졸졸 따라왔다.
어째 그림이 좀 그렇다.
연회장의 반짝거리는 불빛이 다정하고 따스하게 안의 모두를 비추고 있었다.
그런대로 평범하고 소소한 밤이 되겠군.
아이반 경이랑 카뮤 경도 모처럼 얼굴 비추러 왔는데, 나머지들은 아직도 거기 있으려나.
새삼 우리 꼬마용이 원망스러워지는구나, 남편 놈아.
너희가 고생이 많다. 아주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