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136)

Chapter 10 갈망과 야망

남부 토박이 첩자는 괴롭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괴롭기 짝이 없다.

육체적 괴로움의 이유는 웬 귀족 도련님 주제에 해적처럼 애꾸눈을 한 미친놈이 시종일관 실실 웃는 낯짝으로 나타나 시도 때도 없이 듣도 보도 못한 방식의 고문을 해대는 탓이다.

그럼에도 이런 고통이야 워낙 익숙한 종류였으니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더는 못 해 먹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는 온전히 정신적 괴로움 탓이었다.

정신적 괴로움의 이유는 시일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도, 명색이 성기사라는 놈들이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주제에 걸핏하면 수로를 타고 올라오는 시궁쥐 때문에 꺅꺅거린다는 사실도, 이쪽에서 무슨 조롱을 던지든 한 귀로 흘리며 자기들끼리 왁왁 만담하기 바쁘다는 사실도 아니다.

이곳에 틀어박히게 된 첫날 이후로 그 망할 은발 공자 놈이 단 한 번도 그 곱상한 낯짝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탓이었다.

물론 피에트로가 그놈이 보고 싶다든가 하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머리털 하나 안 비추는 꼬락서니에 첫날 느꼈던 모멸감이 시시각각 커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 팔라딘 놈들은 분명 피에트로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니까 확실히 알진 못하더라도 뭔가 나름대로 추측이 있으니 이리 잡아 와 고문을 하는 거 아닌가.

즉, 그 누구보다도 그 은발 놈이 앞장서서 심문을 주도해야 마땅하고 또 상식적인 상황이거늘 이런 빠진 태도라니,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가 있는 법이었다.

피에트로는 이래서 귀족 놈들이 싫었다.

그의 주인 또한 귀족이긴 했으나 이런 온실 속 화초 주제에 잘난 척 으스대는 놈들하고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나 근데 언제까지 이 짓 계속해야 하냐?”

“그걸 왜 우리한테 묻냐? 이스케 그 새끼한테 물어봐라.”

“근데 그 새끼가 언제부터 우리한테 이래라저래라 했냐?”

“……가만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X발, 나 안 해.”

“네놈들은 이미 여기 와서 구경하는 거 말고 아무것도 안 했잖아. 소풍 왔냐? 왜 네놈들만 파충류 애새끼 약 올리면서 즐겁게 노는 동안 나는 이 유령 나올 것 같은 음침한 하수구로 내려와서 이 짓거리나 해야 하느냐고?”

“야, 우리도 나름 힘들거든? 그리고 네가 너무 잘하는 걸 어떻게 해? 우리 중 이런 일에 이러한 가공할 재능을 보이는 건 오로지 루브 너뿐……. 으아아, X발 또 쥐야!”

“뭐? 어디 어…… 으갸아아악!”

“맙소사, 공자비님! 아, 아니, 신이시여!”

이쯤이면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니라 그냥 원래 근본적으로 뭔가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피에트로는 어느 순간부터 북부 팔라딘 새끼들의 정신 상태를 이해하기를 완전히 포기한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어쩌면 하도 마기에 노출되다 보니 육체는 단련될지언정 영혼은 진작 악마가 날름해가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헛수작 계속해 보았자 헛수고다.”

따라서 그냥 눈이나 좀 붙일까 하다 말을 던진 이유는 모처럼 재갈이 풀린 김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나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생각보다 의외로 꽤 또렷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 때아닌 날 선 으르렁거림에, 쥐인지 쥐 마물인지 알 수 없는 모양새의 시궁쥐를 쫓느라 꺅꺅대던 놈들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느리고도 빠르게 돌아보는 시선들이 험악하게 번득거린다.

모처럼 쏟아지는 관심에 피에트로는 득의만면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 바람에 피떡이 된 입가가 좀 아리긴 했지만.

“네놈들이 아무리 죽을 쒀봤자 원하는 대답을 들을 일은 없을 테니까.”

“그래? 그거 희한하네.”

대꾸를 한 놈은 개중 유독 눈에 띄게 기생오라비처럼 생겨 먹은 놈이었다.

어둑한 수로의 암굴 속에서 결 고운 담황색 고수머리가 횃불의 불빛에 비쳐 반짝거렸다.

“우린 너한테 뭐 아무것도 질문한 적이 없는데 말이지.”

“…….”

“특별히 궁금한 것도 없고. 어이 루브, 너 뭐 물어본 거 있냐?”

“물 좀 마시겠냐고 한 거 빼고는 딱히. 사내놈들끼리 길게 말하는 거 질색이라서. 에스겔?”

“아니. 카뮤?”

“아니. 곰탱이 넌?”

“맨 처음 만났을 때 빼곤 없다.”

“그때 뭐라고 물었는데?”

“주인은 어디로 갔느냐고…….”

“아하, 그래서였구먼? 왜 사람을 착각하게 만들고 그러냐, 사악한 곰탱이 새끼.”

“가끔 보면 이 새끼가 이스케 그 새끼보다 더 하다니까?”

“왜, 왜 하필 그 녀석이랑 비교하는 거냐. 너무하다.”

“어,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야, 이 복면 장애 새끼야! 너 때문에 곰탱이가 울잖아!”

“넌 왜 애를 울리고 그래? 비교할 게 따로 있지!”

“곰탱아, 우냐? 진짜 우냐?”

곰탱이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잠시 으스스한 정적이 흘렀다.

“네가 착각하는 바람에 우리 곰탱이가 울잖냐.”

피에트로는 나름 민망해하는 태도를 취하는 대신에 가까이 다가와 느물거리는 기생오라비 놈의 낯짝을 물끄러미 쏘아보았다.

이내 픽 하고 조소가 흘러나왔다.

“재미있군. 네놈들 발악도 이제 그럭저럭 정겨워지려고 한다.”

“아, 아. 징그러운 소리 그만둬, 사내놈들끼리 정들고픈 마음 눈곱만큼도 없거든.”

“궁금한 게 없다면 위대하신 팔라딘 나리들께서 뭣 하러 날 붙들고 이 용을 쓰실까?”

“그걸 왜 우리한테 묻냐고, 좀. 루브?”

“아 왜 자꾸 나한테만 그래, 난 피곤하다. 배도 고프고.”

“미안, 쉬어라. 네가 혹시 뭐 따로 들은 거 없나 싶었지…….”

“대단한 우정이군. 이유도 모르는데 고분고분히 이 고생을 하고 있으시다? 귀족 나리들의 우정에는 위아래가 따로 있는 모양이지?”

또 만담으로 이어질 듯한 아슬아슬한 순간에 잽싸게 도발하자 기생오라비 놈이 눈을 크게 떠 보였다.

헤벌어진 담녹색 눈망울의 꼬락서니가 제법 볼만했다.

“그놈이랑 우정이라니 끔찍하지만 못 들은 걸로 쳐주지.”

“왜, 자존심이라도 상하셨나?”

“우린 원래 항상 자존심 같은 거 없는 진정한 북부 사나이라고. 뭐 그래 봤자 지존이신 국왕 전하한테는 못 비비겠지만. 어이, 안 그러냐?”

“암, 그렇지.”

귀족 놈들의 자기비하는 장려할 일이었으나 대놓고 자기 나라 왕 욕하는 기사는 처음 본다. 그것도 외국인 첩자 놈 앞에서.

피에트로는 그만 실소를 흘렸다.

“이교도 무녀를 반려 삼은 왕이니 제아무리 네놈들이라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지?”

“뭐? 이야, 비전하 전직이 무녀였다고? 미처 몰랐…… 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난 원래 항상 누가 누구랑 연애질하든 결혼을 하든 편견 없이 바라볼 줄 아는 진정한 기사거든?”

“이 나라에서의 진정한 기사의 정의가 무엇인지 의문스럽군.”

“아 참, 너 남부인이었지. 뭐 굳이 내가 알려주자면, 그러니까 이교도 무…… 뭐시기랑 결혼하든 길거리 잡배랑 눈이 맞든 서리용이랑 정분나든 우리 알 바 아니라고. 우리가 알 바는 단지 명색이 사내놈이라는 양반이면 당장 거창한 선물로 미래를 약속하는 것도 좋지만 그 후 얼마나 더 제 선택에 책임을 제대로 지느냐야.”

“그래서 지금…….”

“그래서? 그래서 특히나 다른 책임질 것도 많은 높으신 양반이라면, 로맨티시스트일수록 더 패기 있게 헤쳐나가야 하지 않아? 내 마누라가 귀하면 남의 마누라도 귀하다, 이게 바로 참된 북부 기사도의 요점이라는 말씀이란 말이다. 자기가 한 일에 자기가 발목 잡혀서 아무것도 제대로 책임 못 질 거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지. 웬 싸가지 없는 놈 덕분에 모처럼 축제를 즐기던 선량한 민간인들이 마수 밥으로 전락했는데 거기 남의 마누라들이 한둘이었겠냐고?”

시종일관 만담하듯 쾌활할 때는 언제고 순식간에 어조가 바뀌었다.

날이 서다 못해 기묘한 노기가 느껴지는 으르렁거림에 피에트로는 저도 모르게 물끄러미 상대를 노려보기만 했다.

뭔가가 이상했다.

분명 이들의 분노의 대상은 그와 그의 주인이어야 마땅할 터였다.

그러나 지금 보니 오히려…….

“설상가상으로 내 친구란 놈은 속이 새까맣게 타서 죽으려고 하는 와중에, 나라의 군주라는 양반이 영 패기라곤 없이 뜨뜻미지근하게 굴면 밤낮으로 국가 안보 타령하느라 목숨 오락가락하는 충성스러운 기사로서 기분 좋냐 안 좋냐? 엉? 기분 좋아 안 좋아?”

어느덧 주변의 공기가 음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피에트로는 ‘그걸 왜 나한테 묻냐’라고 대꾸하는 대신에 나지막이 쓴웃음을 교환하는 팔라딘들을 훑어보았다.

설마, 설마 이것들…….

“이해했냐? 고로 우린 너한테 듣고 싶은 말이 없어. 왜냐하면 방금 입 아프게 설명했듯, 널 족쳐서 증언을 얻어내든 증인으로 내세우든 딱히 바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잘 알거든. 네 뒤에 누가 있든 손 털면 그만이고, 우리의 수호자 되시는 어떤 사랑스러운 부인께서 널 증명해줘 봤자 우리의 로맨티시스트 군주께서는 자기 마누라만 귀한 분이라 마음고생만 시킬 거라고. 그 꼴을 불쌍한 내 친구 놈이 또 봐야 하냐? 우리가 그걸 또 봐야 해?”

“……그렇다면 도대체 왜…….”

“도대체 왜 우리가 널 붙들고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느냐? 그건 우리도 잘 몰라. 그놈이나 우리나 뭐 끼리끼리 논다고 늘 비슷비슷한 꿍꿍이긴 하지만, 얼추 때려 맞추자면 그냥 화풀이지.”

“뭐?”

“그냥 화풀이하는 거라고, 우리가 너한테. 넌 그래도 싸잖냐?”

그것을 마지막으로 기생오라비 놈이 손바닥을 털며 수그린 몸을 바로 세웠다.

팔짱을 끼고 서서 지켜보기만 하던 뒤의 놈들 또한 하나둘 주둥이를 다시 나불거렸다.

“야, 근데 아이반 저 새끼 신기록이다. 지금까지 떠들면서 욕 한마디도 안 했어.”

“신기록이네.”

“저 새낀 원래 진짜 화나면 정중해지더라고.”

“미친놈이네.”

“어이 루브, 밥 먹으러 가자. 배고프다며. 사줄게.”

“오오…….”

“네놈들은 각자 내라.”

“X발 거.”

피에트로는 이를 빠드득 갈며 몸을 움직였다.

묶여 있던 철제 의자가 쿵 하고 들썩였다.

그와 동시에 삐걱거리며 거칠게 열리던 창살 문이 멈칫하더니만 기생오라비 놈이 마지막으로 이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우린 당분간 사춘기 맞으려는 도마뱀 새끼 맘마 먹이느라 바쁠 거거든. 더는 네놈이랑 놀 짬 없으니 이만 작별하도록 하지. 그럼 잘 살아라.”

그것을 끝으로 철문이 다시 쿵 소리 나게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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