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6/136)

* * *

어쨌든 대충 그렇게 된 거였다.

시누이와 집사장 등의 도움을 받아 안살림을 새로 꼼꼼히 익히는 한편 성장통에 시달리는 용 새끼를 보살피러 가는 등 나름 바쁜 나날을 보내는 와중에 엔죠가 에렌딜을 방문해 온 것이.

“이야, 루비, 너 걱정했는데 얼굴이 아주 환하게 폈구나! 보기 좋다, 야! 이게 대체 얼마 만이냐!”

교황의 사절단을 이끌고 도착하자마자 혼자 슬쩍 빠져나가 유유히 유흥가를 휘젓고 다니다 도시경비대에 붙들려 끌려왔다는 사실이 무색하게도, 도무지 겸연쩍거나 민망해하는 구석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는 곤팔로니에레이셨다.

해맑게 촐싹거리며 나를 홱 끌어안고 빙글빙글 도는 통에 멀미가 일 뻔했다.

이놈도 이놈대로 참 한결같군.

“어서 와……. 춥지는 않았어?”

“춥지 않기는 무슨 도착하자마자 얼어 죽는 줄 알았지! 와, 근데 오랜만에 눈 보니까 신나더라. 여긴 진짜 눈 많이 내리더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낭만적인 장소라니까.”

얼어 죽을 것 같은 와중에도 낭만에 취하여 그런 곳이나 쏘다녔다 이거냐?

나는 아버님의 표정을 보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했다.

페아놀 왕으로 말하자면 그냥 아무 표정이 없으셨다.

요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하기를 진작 포기하신 듯하다.

여차여차 형식적인 인사와 절차가 좀 오간 뒤 나는 엔죠와 잠시 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때마침 눈 그친 볕 좋은 오후라 우리는 궁의 뜰로 나와 같이 산책로를 좀 걸었다.

엔죠가 저만치 복구공사가 거의 끝나가는 달의 탑의 쓸쓸한 자태를 보고 감탄하는 동안 나는 반쯤 핀 동백꽃을 바라보며 머리를 비웠다.

“근데 이 동네 사람들은 다 인상이 좀 무서운 것 같아. 추운 나라라서 그런가?”

“오빠가 오자마자 또 이상한 데서 놀다가 끌려왔으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 아닐까?”

“야, 끌려온 거 아니거든? 그리고 이상한 데 아니야, 여기 버터 술이 하도 맛있길래 펍들 탐방을 좀…….”

“도박장에 틀어박혀 있다가 딱 발견됐다면서? 오빠답네.”

“아, 구경만 한 거야, 구경만! 난 로마냐의 곤팔로니에레로서 대륙 각국 백성들의 전통과 습성을…….”

뭐 같지도 않은 말을 참 뭐 같이 잘도 늘어놓던 엔죠가 문득 무슨 생각이 일었는지 새삼 진지해진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박힌 특유의 장난기가 좀 가셔 있었다.

“야, 근데 너 형이랑 대체 무슨 일 있었던 거야?”

“글쎄, 오빤 뭐라고 들었는데?”

“내가 뭐 딱히 들은 게 있겠냐, 형이 나한테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인간도 아니고. 너 만나고 왔다고 해서 모처럼 면상도 볼 겸 네 얘기도 들을 겸 찾아갔더니 대체 뭔 일인지 아버지랑 열나게 싸우고 있더구먼. 아니, 싸운 게 아니라 아버지가 형을 죽이려 들던데? 아버지가 형한테 그렇게 화내시는 거 처음 봤다, 야. 개웃겼지 진짜, 너도 봤어야…….”

“그래서 아버지는 오빠한테 뭐라고 하시면서 여기로 보냈어?”

“응? 나한테? ……기억 잘 안 나는데. 술이 아직 덜 깨서 그런가 가물가물하네. 짜증 나는 그놈의 잔소리 수십 번 반복했던 것만 기억난다, 제기랄, 내가 애새끼도 아니고.”

“…….”

“아, 대충 널 잘 달래서 형을 용서하게끔 하니 마니 뭐 그런 얘기였던 것 같아. 가족의 중요성 어쩌고 하면서 친정을 그런 식으로 고발하면 다 같이 곤란 어쩌고저쩌고……. 아 그걸 대체 왜 나한테 하라고 시키는 건지 모르겠다고, 아주 그냥 맨날 나만 못 부려먹어서 안달이지!”

교황이 지금 엔죠가 하는 꼬락서니를 본다면 필히 뒷목을 붙들고 쓰러지리라.

왜 웃음이 나오려고 하는 거지.

“아무튼 대체 뭔 일 있었던 거야, 너랑 형? 보니까 형이 너한테 뭐 잘못한 것 같은데, 아니면 설마 네 남편이랑 한판 붙기라도 했어? ……아! 맞다, 그 얘기도 하셨지. 네 남편이 형한테 어쩌고 한 것도 있으니 서로 좋게 합의를 보느니 마느니, 와씨, 그럼 진짜 둘이 싸운 거야? 누가 이겼어? 왜 싸운 거래? 젠장 나도 봤어야 하는데!”

말리러 오신 아버님이 이겼다고 해야 하나?

이 녀석은 조증이 틀림없어. 벌써 귀가 아프구나.

“어쩐지 형이 좀 아픈 것 같더라, 역시 형 새끼가 진 거지?”

“아프다고? 어디가?”

“딱히 어디가 아프다기보다는, 그냥 몸이 좀 안 좋아 보였다고 해야 하나? 네 남편한테 두들겨 맞고 정신적 내상이라도 받았나 봐. 둘이 싸우는 거 봤지? 자세히 어떻게 된 거야?”

체시아레는 어지간해선 아픈 놈도 아니었고 아프더라도 누가 알게 내색하는 놈이 아니었다.

나는 문득 거울의 방에서 목격했던 강렬한 충돌의 순간을 떠올렸다.

카니지와 실드의 충돌, 그때 뭘 모르는 내 눈에도 카니지는 가공할 기세의 검기였다.

추기경의 실드가 거의 쪼개지기까지 했으니…….

엔죠의 말마따나 정신적은 아니겠지만 그때 뭔가 내상이라도 입은 걸까?

그대로 시름시름 앓다 콱 죽어버린다면 참 괜찮은 결말일 텐데, 그 정도로 치명적이었다면 교황이 진작 그걸 들먹였겠지.

혹은 들먹였는데 엔죠가 까먹은 거려나.

그놈이 북부에서 저지른 짓의 죗값을 그렇게라도 치른다면 참 좋을 텐데.

내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엔죠는 그제야 분위기가 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는지 신명 나게 재잘대다 말고 슬그머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야, 왜 아무 말도 안 해? 설마 형 새끼가 너 억지로 이혼시키려고 했어? 근데 형한테 화났다고 나한테까지 화낼 필요는 없잖아.”

“물론 아니지. 다만 딱히 할 말이 없을 뿐이야.”

“뭐? 왜? 어째서? 난 할 얘기도 들을 얘기도 산더미-”

“난 지금 아버지도 큰오빠도 믿을 수 없어. 오빠도 마찬가지고. 아버지가 뭘 바라시든 더는 내 알 바 아니니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

침묵이 흘렀다.

내가 미소 띤 얼굴로 마주 보는 동안 엔죠는 멍한 건지 얼이 빠진 건지 구별 안 가는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만 마침내 한다는 소리가 기껏 이거였다.

“너 진짜 시집간 거 맞구나!”

“…….”

“미안미안, 나도 모르게 네가 아직도 내 동생이라고만 생각했다 야. 그래도 좀 봐주면 안 되냐? 넌 이제 남의 집안 사람이라지만 난 그 사실이 아직 적응 안 된다고, 그동안 아버지랑 형이 허구한 날 너를 왔다 갔다 하게 만드는 바람에…….”

“그건 그랬지. 오빠가 싫다는 뜻은 아니었어.”

“그럼 아버지랑 형은 싫다는 거야?”

“오빠가 나였다면 어떨 거 같은데?”

엔죠는 잠시 부스스한 생강빛 머리카락을 벅벅 긁적이며 나름대로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이 단세포께서 또 무슨 기상천외한 말을 하려나.

“잘 모르겠어. 솔직히 난 형만큼 너랑 가까웠던 것도 아니고,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항상 둘만 친했잖아. 내가 낄 틈이 없었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일부러 더 밖으로 돈 것 같기도 해. 누구 탓이라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러다 보니 서로 잘 모르게 됐다고.”

“…….”

“형은 말은 안 해도 늘 아버지가 쓸데없이 나 같은 멍청이를 싸고돈다고 불만이 많지. 내가 그것도 모르진 않아, 형 눈빛만 봐도 날 얼마나 싫어하는지 빤히 보이니까. 지가 좀 귀엽게 굴면 될 것을 엄한 나를…… 아무튼 이러든 저러든 신뢰받는 건 잘나신 형 쪽이잖아? 네 혼사들만 해도 그렇고 난 그런 문제에 관해서라면 입도 뻥긋 못 하는 처지인 데다 어차피 나도 곧 있으면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등 떠밀려 결혼할 텐데, 이래저래 집안일에는 아예 신경 꺼버리는 게 속 편하다고 생각했어. 단순한 머리 혼자 굴리면서 속 터져봤자 아무 소용 없으니까.”

“단순하다는 거 인지는 하고 있었네.”

“죽는다? 큼, 가만, 내가 뭔 말 하려고 했지……? 아 맞다, 그래서 보이는 그대로밖에 모른다고. 넌 언제나 항상 아무런 불만도 없이 즐거워 보였어. 특히 그때 아프고 나서부턴 예전이라면 앙칼지게 대들었을 일도 순순히…… 솔직히 가끔은 네가 무섭기도 했어.”

“내가 무서웠다고? 예전에?”

“아니, 아프고 난 이후로. 내가 생각해도 웃기는 개소리긴 한데 가끔은 네가 아무 감정도 없는 사람 같았거든. 똑같이 웃고 우는데 이상하게 뭔가 텅 빈 느낌이었다고 해야 하나……. 젠장, 아 몰라, 아무튼 네가 이제 와서 사실은 가족들을 원망하고 있었다고 해도 난 별로 놀라지 않을 거야. 네가 날 오빠라고 부르기도 싫은 멍텅구리라 여겨도 뭐 자업자득이지.”

“오빠가 싫은 건 아니라고 했잖아.”

농담조로 말하자 어색하게 데굴거리던 짙푸른 눈이 멈칫 나를 바로 보았다.

난 그를 조금 봐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이제 어쩌고 싶은데? 그것부터 말해봐.”

“어쩌고 싶냐니, 보면 몰라?”

“모르겠는데?”

“뭐야, 너 원래 이렇게 짓궂었냐? 아, 진짜……. 에헴, 솔직히 아버지가 말한 건 잘 모르겠고, 그냥 형이 너한테 무슨 실수를 한 건지 알려줬으면 좋겠어. 내가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말해봐, 설마 형이 너랑 다투다 손찌검이라도 했어?”

“몰랐어? 못 들은 거야, 아니면 정말 그냥 까먹은 거야?”

“……야, 진짜로……?”

“그렇게 놀랄 거 없어, 처음 있었던 일도 아닌걸. 한두 번도 아니고.”

“뭐? 그건 또 무슨…….”

“오빠는 맨날 오빠만 아버지한테 처맞는다고 투덜거리곤 했지만, 나도 다를 바 없었어. 오빠처럼 밖에서 사고치고 다닌 것도 아닌데 말이야.”

“……농담이지? 형이 그러도록 내버려-”

“믿든 말든 상관없어. 큰오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어쨌든 오빠가 맞게 봤네, 사실은 전부 원망하고 있었던 셈이니.”

“…….”

“뭐 이젠 완전히 남남이고, 난 완전히 오메르타의 사람이야. 그러니 최대한 이쪽에 득이 되는 대로 협상하겠지. 성하께서 아무리 가족의 중요성을 운운해 봤자 내 가족은 더는 보르히아가 아니라고.”

정적이 내렸다.

머리 위의 나무에서 새 한 마리가 눈을 흩뿌리며 세차게 날아갔다.

눈가루가 떨어져 생강빛 머리에 내려앉았다.

그러는데도 엔죠는 털 생각도 안 드는지 꿈쩍도 하지 않고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눈과 입이 똑같이 멍하게 벌어진 모양새가 좀 웃겼다.

“……미워해?”

“뭐?”

“아버지랑 형, 미워해?”

그렇다면 어쩔 거고 안 그렇다면 어쩌려고? 하여간 너도 참.

“아니, 딱히 아무 감정도 없어. 오빠가 짚은 그대로.”

정말로 아무 감정도 안 느껴져서 한 말이었는데, 턱을 딱 소리 나게 닫은 우리의 단세포는 어째서인지 갑자기 몹시 서글퍼 보였다.

누가 보면 내가 미워한다고 대답한 줄 알겠다.

며칠 여기 좀 돌아다녔다고 너도 다중인격 돼가니?

“그래, 그렇구나…… 그랬구나…….”

“…….”

“그럼 나는? 나한테도 아무 감정 없는 거야?”

체시아레의 그것과 똑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사파이어색 눈동자, 그 눈에 글썽거리는 때아닌 물기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문득 교황이 왜 유독 이 사고뭉치한테 그리 이를 갈면서도 그리 무른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엔죠에게 형에겐 없는 결정적인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바로 이것일 것이었다.

인간성이라고 해야 하나. 차마 미워할 수 없는 솔직하고 순수한 인간성 말이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 내가 오빠한테 뭘 바라거나 기대했던 건 없어서. 얼굴 마주 보는 일도 거의 드물었잖아, 우리.”

“…….”

“다만 가끔은 좀 얄밉긴 했어도 오빠랑 있는 게 싫지는 않았어. 바보 같긴 했지만 같이 있으면 그냥 웃기고 즐거웠거든. 가족 중 유일하게 말이야.”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엔죠가 손등으로 눈가를 세차게 문질렀다.

이어 투덜투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씨, 쪽팔리게…….”

“…….”

“큼, 큼! 좋아, 네 마음은 잘 알겠어. 섣불리 이해한다는 둥 떠들지는 못하겠지만 이제 나도 나대로 결단을 내리겠어.”

“그 결단이라는 게 뭔지 좀 알 수 있을까?”

“아무것도 안 할 거야.”

“뭐?”

“아버지가 나더러 여기 와서 어쩌라고 시킨 거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어차피 기억도 잘 안 나는데 잘됐지, 뭐, 내친김에 모처럼 실컷 놀다가 갈란다. 크으, 북부 사교계여 이 몸이…….”

이건 또 어디서 튀어나온 단순무식한 결론이란 말인가?

“지금 진지하게 하는 소리야?”

“내가 지금 얼마나 진지한지 안 보이냐? 눈물까지 질질 짰구먼. 아씨, 누가 봤으면 안 되는데…….”

“…….”

“애초에 용서를 구하려면 내가 아니라 형이 직접 왔어야 할 일이지. 내가 네 남편이었더라도 죽이려 들었을 텐데, 여기서 굳이 내가 나도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 어차피 나는 정치고 외교고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놈이니 보낸 아버지 잘못이지.”

“아버지가 오빠를 죽이려 들 텐데.”

“하루 이틀도 아닌데 뭐 어때?”

“그거야 그렇긴 한데…….”

“내가 언제 그런 거 신경이나 썼냐? 사돈댁이랑 원수를 지든 등골을 빼 먹히든 그런 건 뻔뻔한 형 새끼랑 아버지가 알아서 고민하라고 해, 나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별로 없어도 최소한 널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네 새 가족들도 마찬가지고. 솔직히 네 남편 엄청 유명인사던데 싸우고 싶지 않단 말이다. 올해 대회 또 우승했다며? 와, 걔 괴물 아니냐? 아무리 형이라 해도 좀 쫄았을 것 같은데.”

“이미 충분히 곤란하게 한 것 같지 않아? 오자마자 사흘 내리 사라져 놓고 간 곳이-”

“아, 야!”

웃음이 나왔다.

쿡쿡 웃음을 터뜨리자 버럭 하던 엔죠가 멈칫하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쩐지 놀란 듯 멍한 표정. 그랬다가 이내 맥없이 따라 웃었다.

“좋단다, 바보야.”

“고마워,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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