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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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이 반쯤 젖혀진 창밖으로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본격적인 한겨울에 접어들면서 과연 북부답게 틈만 나면 폭설이 쏟아졌다.

아버님이 입을 열었다.

아버님은 말끝에 묘한 여운을 남기는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곤팔로니에레를 보내셨다 하셨소.”

“…….”

“공식적으로는 한바탕 수난을 겪은 에렌딜에 성하의 위로를 전할 겸 누이를 방문하는 것이겠으나 비공식적으로는 이쪽에서 따진 문제를 협상하는 것이 목적일 거요. 이 시국에 곤팔로니에레로 뭘 어쩌겠다는 건지는 아직 모를 일이나 만나 보고 나면 알겠지.”

즉, 로마냐의 곤팔로니에레, 교황군의 총괄직을 맡고 있는 자이자 교황의 망나니 차남이기도 한 엔죠가 교황의 밀명을 받들어 에렌딜에 올 거라는 얘기였다.

보낼 사람을 좀 보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어떤 자인지 말해줄 수 있소?”

엔죠의 객관적인 평판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닌 듯했다.

창가 곁에 팔짱을 끼고 서서 나를 응시하는 아버님은 어딘가 조심스러우면서도 진지한 눈빛이었다. 무리도 아니긴 하다.

어디 보자, 엔죠 녀석은 내게 있어…… 딱히 별 감정은 없다만.

“그냥 오빠였어요.”

“그냥 오빠라……?”

“네, 그냥 흔한 평범한 오빠. 제멋대로인 사고뭉치이긴 해도 부친이나 형과는 딴판인 성격이라서요. 아마 그래서 그가 오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교황의 꿍꿍이가 빤히 보이는 듯했다.

엔죠는 외교 협상 같은 문제에 소질은커녕 사고나 안 치면 다행인 녀석이었으나 교황이 내심 편애하는 아들인 건 사실이었다.

이번에 체시아레가 일으킨 문제를 두고 하필 엔죠를 보내는 것에는 나름 성의를 보인다는 생색도 있겠지만, 그에 앞서 엔죠를 이용해 나를 설득시키기 위함이 분명했다.

즉, 나를 설득해서 오메르타를 달래려고.

체시아레가 오메르타의 공자비인 내게 손을 댄 문제를 좋게좋게 협상하고 습격 사태 배후 의혹 또한 거두게 하려고 말이다.

엔죠가 누굴 설득하거나 구슬리는 걸 제대로 할 가능성이 있는지의 여부는 둘째 치고, 내가 가족 중 유일하게 앙금이 없을 만한 사람은 엔죠뿐이니까 말이다.

것 참, 체시아레와 쌍벽을 이루는 존재였던 아버지가 내게 이런 식으로 협상을 시도하려 드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역시 오래 살고 봐야 해.

“……그렇군. 알 만하구려. 그럼 이번에는 객관적인 방면으로 평소 성향이 어떤지 좀 말해주겠소?”

응? 객관적인 평소 성향이라면 이미 유명할 대로 유명한 녀석 아닌가?

의아한 내 표정에 대고 아버님이 곤혹스럽게 턱수염을 긁적거렸다.

갑자기 왜 또 왔다 갔다 하고 그러시나?

“무슨 일 생겼나요?”

“큼, 그것이 실은 사절단은 이미 사흘 전에 에렌딜에 도착했는데 말이오. 곤팔로니에레 혼자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지 알 길이 없소이다.”

“…….”

“확인 결과 함께 엘모스 항에 도착한 것은 확실하나 중간에 몰래 빠져나가신 듯하오. 사절단도 난감하여 발만 동동 굴러 대니 원, 남부 도시처럼 자유롭게 둘러보다간 변 당하기에 십상이거늘……. 하여튼 그래서 곤팔로니에레께서 제일 먼저 어디로 가셨을 듯한지, 지금쯤 어디서 뭐 하고 있을 만한지 혹 짐작 가는 거 있소? 에렌딜에서 찾아갈 만한 지인이라던가.”

이젠 내 쪽에서 곤혹스러운 표정이 될 차례였다.

짐작은 무슨 너무 뻔하디뻔해서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중대한 임무를 가지고 여기 와서까지 그러겠느냐 하겠으나 엔죠라면 능히 가능하고도 남는 일이다.

“루비?”

“유, 유흥 지대 쪽일 거예요.”

아, 왜 갑자기 내가 다 창피한 기분이 이는 거지.

아무리 남남이라지만 이러든 저러든 명색이 친정이거늘, 하나같이 멀쩡한 작자들이 없구나.

아버님은 일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잘 못 들은 것 같았다.

“뭐요…….?”

“도박장들하고 술집 위주로 찾아보시면, 그러니까 어딜 방문할 때면 반드시 그 도시의 진정한 민낯부터 체험해야 한다면서 매번…….”

치미는 자괴감 때문에 말꼬리가 절로 흐려졌다.

아이고, 이 화상아! 너 때문에 내가 다 얼굴이 후끈거린다 내가! 이 날씨에 춥지도 않냐!

멍하다 못해 넋이 나간 듯하던 아버님의 만면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참으로 오싹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지금 로마냐의 곤팔로니에레께서, 사돈의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쏜살같이 달려간 곳이 그렇고 그러한 구역이다, 이 말이오?”

끄덕끄덕.

“사흘 내내 그러한 바르지 못한 장소를 휘젓고 다니며 자빠져 놀고 있는 중이 틀림없다고? 이러한 상황에서조차 진정으로 그러고도 남을 작…… 분이란 말이오?”

끄덕끄덕.

뭐 별수 있나, 사실인걸.

젠장, 갑자기 눈물이 치솟는구나.

바로 조금 전에 나름 좋게 말해줬거늘.

눈물을 머금고 부질없이 머리만 끄덕이는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어쨌는지, 아버님은 이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면서 다음과 같이 으르렁거렸다.

“일단 알았소. 그러한 구역을 샅샅이 뒤지려면 도시경비대에 도움을 청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군. 젠장, 형제가 번갈아 쌍으로 에렌딜 치안을 들쑤시는구려.”

정확히는 삼 남매 모두이리라.

왜냐하면 나 또한 의도치는 않았으나 일전의 가출 소동 때…… 그냥 아무 생각 하지 말자.

“한데 가만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괘씸하기 짝이 없군. 대체 얼마나 북부와 오메르타를 우습게 보고 있길래…….”

“아니에요, 아버님. 우습게 보는 게 아니라 그냥 원래 개념이 없는 것뿐이에요! 원래 항상 언제 어디서든 아무 생각이 없거든요. 얼마나 무개념이냐면 얼마 전 리미니 진군 때도 밤새 술판 벌이다 사고 쳐서 다 이긴 전투 날려 먹을 뻔했대요.”

“……그다지 위안이 되는 사실은 아니오만, 차라리 그리 여기는 편이 좀 낫긴 하구려. 하여튼 아들놈한테는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편이 좋겠소.”

“아…….”

“오라비라는 것이 오자마자 걱정하며 달려오기는커녕 무슨 속 편한 짓거리나 하고 돌아다녔는지 내 아들놈이 듣는다면 곤팔로니에레고 자시고 시원하게 두들겨 패버리겠지. 쯧쯧, 에잉, 내 자식이었으면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서라도…….”

안 그래도 교황이 이미 몇 번이나 분질러 버리긴 했었다.

아무 소용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사고뭉치 차남에게 약하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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