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103/136)

Chapter 9 성장통 (2)

티테이블이 와르르 쓸려 넘어갔다.

곱게 차려졌던 찻잔과 접시와 쟁반과 온갖 다과들이 한데 뒤섞여 수풀 위를 나뒹굴었다.

밀림의 사자들처럼 사이좋게 서로의 머리채를 붙들고 늘어진 우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네가 네 어미 눈에 불만족스럽다는 사실이 나랑 대체 무슨 상관인데!”

“뭐…… 당신 따위가 뭘 안다는 거야! 내 어머니에 대해 함부로 지껄이지 마!”

“네가 먼저 내 얼굴도 모르는 엄마 욕했잖아!”

쿵쿵쿵쿵, 하는 요란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사람이 외치는 소리 또한 한 번에 들려왔다.

“마님, 마님!”

“루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루비!”

굳이 문이 열리지 않아도, 이곳은 유리 온실이었으며 따라서 바깥에서 안이 훤히 보이는 구조였다.

온갖 화려한 남부식 분수들과 수목들로 인해 가려졌다 한들 소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쯤은 대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나도 프레이야도 현재 그러한 사실에 신경 쓸 겨를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당신 따위가 가질 만한 게 아니야! 당신이 지금 쥐고 으스대는 거 모두 다 전부 내 거였다고! 이스도 엘렌도 다른 사람들도 전부, 아주 오래전부터 내 거였다고! 당신이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내가 나타나서가 아니라 네가 이따위라서 이렇게 된 거거든? 좀 똑바로 살아!”

“당신이 뭔데 나한테 설교질이야! 난 당신 같은 종자랑 달라, 내 어머니도 당신 어머니랑 종자 자체가 다르고! 우린 애초에 타고난 종류 자체가…….”

“그래서 네 완벽하신 어머니가 너더러 친구들한테 뻔뻔하게 거짓말이나 늘어놓으라고 가르치든?”

“내, 내 어머니 들먹거리면서 그 입으로 모욕하지 말라고!”

“네가 먼저 자꾸 내 엄마 들먹거리고 있잖아! 그리고 네 어머니 모욕은 네가 하고 있는 거겠지! 죄송하지도 않아? 친구들한테 미안하지도 않느냐고! 그 오랜 세월 동안 널 믿어온 엘렌한테 하나도 안 미안해? 엘렌한테, 이스한테, 그 모든 사람한테 하나도 안 미안하다면 넌 애초에 그들을 가질 자격이 없는 인간이야!”

머리채를 뽑아내는 듯한 손길이 홱 떨어져 나갔다.

동시에 내 손 또한 힘이 풀렸다.

내 짙고 구불구불한 금발과 프레이야의 창백하고 치렁한 금발이 무슨 회전초처럼 덩어리져서 사방에 흩날렸다.

“루비! 이 문 여십시오! 루비! 프리! 프레이야 반 퓨리아나! 당장 이 문 열지 못해?”

우리 엘레니아의 호령이 무시무시하게 울려 퍼진다.

실로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공포스러운 일갈이었다.

과연 누가 오메르타 사람 아니랄까 봐.

헉헉거리며 쏘아보는 내 눈을 프레이야 또한 헉헉거리며 쏘아보았다.

매섭게 일그러진 보라색 눈에 뜻 모를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지금 뭘 잘했다고 우는 거야?”

“우는 거 아니거든?”

“그럼 뚝 그쳐! 또 무슨 가증스러운 연기 펼치려고!”

“입 닥쳐! 당신이, 당신이 대체 뭘 알아?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네가 먼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설교질 했잖아 이 양심도 없는 것아! 고작 이깟 걸로 징징 짜는 주제에, 이딴 걸로 엉엉 울어버리는 주제에 네가 안 겪어본 진짜 끔찍한 일에 대해 뭘 아니?”

“……나는, 하아, 나는……!”

“나야말로 너라면 그렇게 안 살아! 너 같은 행운아가 대체 뭐에 삐뚤어져서 이런 구제 불능이 됐는지 모르겠지만, 난 적어도 내가 당하기 끔찍한 일을 남한테 저지르지는 않았어! 매일매일 살아남기 위해 죽을힘을 다하면서도 너처럼 뭘 얻고자 애먼 사람 괴롭게 만들지는 않았다고!”

“누군 그러고 좋았던 줄 알아? 그리고 나도, 나도 그때 거울의 방에서 그 꼴 보고 나름 괴로워했다고! 대체 왜 당신은 매번 그렇게, 이런 식으로 모든 걸 흔들어 놓는 건데? 왜 당신만 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식 밖에 벗어난…… 왜 다들 당신만 끼면 변하는 거야? 당신이 대체 뭔데 나까지 변하게 만드는 거냐고…….”

흥분으로 활활 타올랐던 목소리가 낮게 잠기면서 크림으로 엉망이 된 얼굴에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참 상상도 못 해본 봐주기 뭐한 장면이다.

“그때 신전에서 마곡석 독주 마시고 기절한 거, 네 백부랑 같이 짠 거지?”

훌쩍거리며 소매로 얼굴을 훔치던 프레이야가 다시 화들짝 나를 쏘아보았다.

반쯤 충동적으로 던져본 건데 제법 우스꽝스러운 반응이다.

“무슨 헛소리야?”

“모르는 척하시겠다? 뭐 마음대로 해. 퓨리아나 가에 제대로 따져보면 알겠-”

“그, 그만두지 못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설치지 마! 백부님은, 백부님은 온전히 나를 위해서 내 고집에…….”

“너 대단하다. 나 쫓아내자고 피 토하는 고통까지 감내하다니, 영광이라고 해야겠어. 그렇게 왕비가 되고 싶었니?”

“…….”

“보아하니 네 백부는 네 야망에 한편인 듯한데, 정작 네 부모님은 아무것도 모르시는 모양이네.”

“……떠벌떠벌 늘어놓는 백 마디 계획보다 한 번의 달성이 중요한 법이거든.”

“그래서 달성할 순 있을 것 같고? 이렇게 대놓고 반역 모의하는 거 후작님이 아시나?”

“과장하지 마, 지금 협박하는 거야?”

“한다면 어쩔래?”

“…….”

“넌 왕비가 되고 싶은 거니, 내 남편한테 그렇게 미련이 남은 거니? 아니면 그냥 둘 다인가?”

“…….”

“뭐, 어쨌든 깨끗이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네가 나한테 미안해할 줄 아는 기특한 양심 따위 바라지도 않지만, 적어도 네 친구한테는 미안해할 줄 알아야지.”

“……나는, 나는 단지 당신을…….”

“네가 그날 벌인 수작에 일어난 야단법석만 해도 말이야, 정말 미안한 마음 안 드니? 아무것도 모르고 엄한 나 다그치다 후작님한테 얻어맞은 네 싸가지 없는 동생도 새삼 불쌍하다.”

멍청한 로렌초 놈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당연히 눈곱만큼도 없었으나 아무튼 그렇게 덧붙였다.

프레이야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푹 떨구고 코를 팽 소리 나게 푸는 모양새가 참 뭐 같다.

콰지직, 쿵 하는 거친 굉음이 엉망이 된 정원에 울려 퍼진 것은 그때였다.

아무래도 문짝을 그냥 부숴 버린 듯했다.

하여간 거친 북부인들 같으니.

“대체…….”

순식간에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사방이 시끄러워진 것도 아주 잠깐, 나의 소중한 물의 정원은 다시 한번 고요의 영토가 되어버렸다.

무리도 아니었다.

나란히 머리는 온통 산발에 엉망진창인 꼴을 하고서 마찬가지로 난장판으로 엎질러진 바닥에 주저앉아 식식거리고 있는 우리의 꼬락서니가 모두의 눈에 어찌 비쳐 보였을지 뻔한 일이었다.

넋이 나간 관객들의 주변으로 금빛 회전초들이 바깥바람을 따라 아련하게 실려 갔다.

충성스러운 호위 기사들의 얼굴에 공포의 빛이 스쳐 갔다.

연로한 집사장은 뭐라고 웅얼거리며 성호를 그었고, 대관절 어째서 여기 와 있는지 모를 앤디미온은 어깨를 스치며 날아가는 머리카락 덩어리에 화들짝 소스라쳤다.

남자들 쪽이 그렇게 이유 모를 두려움에 사로잡힌 듯한 가운데, 우리의 얼음 공녀님은 훨씬 침착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경악 그 자체인 표정이긴 했으나 공포보다는 분노에 가까운 살벌한 기색이었다 이거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지?”

으스스한 다그침에 팔뚝에 소름이 우수수 돋았다.

득달같이 우는 시늉이라도 할 줄 알았던 프레이야는 의외로 잠잠했다. 겁을 먹은 것 같다.

나 또한 겁이 좀 나긴 했으나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좀 싸워버렸…….”

“그건 보면 압니다.”

“화, 화내지 마시…….”

“지금 화 안 내게 생겼습니까? 루비 꼴을 좀 보십시오! 프리 넌 왜 가타부타 아무런 대꾸가 없어?”

어깨를 흠칫 움츠린 프레이야가 꼴사납게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나를 향해 눈을 부라려 보였다.

나 또한 마주 눈을 부라려 보였다.

반성의 기미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우리의 그러한 유치찬란한 행태에 엘레니아는 당연히 점점 더 매서운 눈빛이 되었으나, 그럼에도 기품 있게 내뱉었다.

“당장 본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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