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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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어쩌다 보니 눈 쌓인 겨울 오후에 홀로 찬연한 봄 풍경을 간직한 나의 온실 정원에 티테이블을 차려 앉은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그것도 프레이야와 나란히 마주 보고서.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프레이야의 모습은 앙그반궁의 거울의 방에서의 모습이었다.

서리용의 포효에 다들 혼비백산한 와중에도 혼자 뭐에 넋이 나간 것처럼 얼어붙어서 나만 응시하던 그 모습.

실로 오랜만에 다시 보는 프레이야는 언제나처럼 단정하고 우아한 모습이었다.

조금 여윈 것 같기도 했지만, 또 조금은 덜 여유로워 보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

다만 사람을 보자고 청해놓고는 좀체 입을 열 기미가 안 보였다.

비단 프레이야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먼저 입을 열 기미가 없어 보이긴 했다.

온실 안의 공기는 따스했으나 쌀쌀한 바람이 휘몰아치는 듯한 분위기라고 할까.

딱히 내가 어째서는 아니었고, 아마 꼿꼿이 앉아서 냉기가 뚝뚝 흐르는 낯으로 소꿉친구를 주시하고 있는 엘레니아 때문일 것이다.

그간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엘레니아의 태도를 고려해 보건대 뭔가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보아하니 프레이야는 엘레니아에게 말을 건네지도, 마주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저 어깨를 뻣뻣하게 굳히고 앉아서 고개를 수그리고 찻잔만 바라보고 있다.

이거야 원, 이래서는 안 되겠는데.

“엘렌, 잠시 둘만 있어도 괜찮을까요?”

사실 엘레니아는 어차피 곧 자리를 뜰 예정이었으나 부러 조심스럽게 물었다.

잔을 쥔 프레이야의 손이 약간 움찔했다.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부르십시오.”

시선은 프레이야에게, 말은 내게로 돌린 엘레니아가 새침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잠시 후 드디어 나와 문제의 소꿉친구 둘만 남았다.

맑은 겨울 햇살이 유리 천장을 뚫고 내려와 테이블을 비추었다.

나는 고요한 상대에게 말을 붙이는 대신에 차를 홀짝이며 트레이 접시에 담긴 알록달록한 다과를 맛보았다.

상큼한 레몬 타르트와 바삭한 쿠키, 알록달록한 컵케이크, 물론 초콜릿 푸딩도 있었다.

오늘 아침에 먹었던 거대한 하얀 케이크도.

여전히 그대로 미적대고 있던 프레이야가 마침내 천천히 시선을 들어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아몬드 쿠키를 푸딩의 크림에 듬뿍 찍어서 한입에 밀어 넣고는 담백한 홍차를 홀짝였다.

“……부인.”

“뭐죠, 영애?”

“……일단, 쾌차하셔서 다행이어요.”

“고맙네요. 차가 참 향이 좋은데, 영애도 어서 들어보세요.”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대관절 무슨 꿍꿍이인지, 프레이야는 자기가 찾아와 놓고는 어서 용건을 꺼낼 기미 없이 그저 내가 먹는 모습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또 불쑥 시비 걸 작정인가?

그렇기엔 좀 힘 빠진 기색이긴 한데…….

“제가 부인께 사과할 일은 없을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뜬금없이 저 하고픈 헛소리부터 내뱉는 건 여전하다.

이쪽도 참 한결같군.

“그러니 그런 기대는 하지 마시길 바라요.”

“…….”

“어찌 됐든 저는 스스로의 신념에 최선을 다한 것뿐이니까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

“비록 실수가 있었다 한들, 내겐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여러 경험을 통해 쌓아온 가치관이라는 게 있거든요. 그리고 그 가치관에 따르자면……. 나는 부인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나는 입에 쿠키를 문 채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성큼성큼 온갖 화려한 꽃들과 수풀이 우거진 정원을 가로질러 가 문으로 향했다.

그런 다음 입구 밖에 서 있는 호위 기사들에게 물러가라는 손짓을 한 뒤 문을 닫고 빗장을 질렀다.

다시 테이블로 돌아오니, 프레이야는 내가 그대로 나가버렸으리라 여긴 모양인지 아연한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나는 자리에 도로 앉고는 쿠키를 와자작 씹어 삼키며 팔짱을 꼈다.

“계속 떠들어봐요.”

분수대들로부터 쏴아아 퍼지는 세찬 물줄기 소리가 울렸다.

창백한 얼굴로 물끄러미 나를 노려보던 프레이야가 이윽고 계속해서 떠들었다.

“누구든 자기 자신을 돕지 않으면 다른 사람은 모르기 망정이죠.”

그것참 멋진 말이구나. 어느 책에서 나온 구절이니?

“부인 같은 분께서 그동안 어째서 스스로를 그렇게…… 방치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하나의 중독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불행과 자기연민은 중독이나 마찬가지라 했으니까.”

그래서…….

“물론 제게도 동정이나 연민의 감정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식이 먼저 나오는 건 어찌할 수가 없네요. 대체 왜…… 왜 그런 식으로 살아오신 건가요?”

“…….”

“굳은 의지와 바른 언사가 합쳐지면 어떠한 곤경도 헤칠 수 있는 법이에요. 마음먹고 행동으로 옮긴다면 하늘이 반드시 돕게 마련이죠. 일개 필부도 아니고 부인 같은 분이라면 언제든 누구의 도움이라도 청할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그러한 파국으로 치달을 때까지 가만히 계셨던 거죠? 왜 좀 더 적극적으로 스스로의 인생을 이끌어갈 생각을 안 하고,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가 불행해지도록 내버려 두셨냐고요……?”

불행, 자기연민, 소외감, 고독, 배척, 죽음의 고통, 폭력, 두려움, 강박과 수치…….

이 모든 것을 단 한 번도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없을 자신만만한 아가씨께서 지금 내게 따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나에 대해 뭘 알고 모르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그때 목도한 순간으로 인한 막연한 상상만으로도 내게 따지고 싶다는 거였다.

왜 그렇게 한심하게 사느냐고, 왜 그렇게 소극적으로 살아서 자신으로 하여금 숭고한 가치관의 혼란을 불러일으키게 했느냐고, 왜 다른 이들까지 동요하게 만드냐고 말이다.

희한하게도 화가 난다기보다는 우스운 기분이 일었다.

아예 나고 자란 환경부터가 다른, 한쪽이 겪은 그 모든 것을 절대 겪지도 않았고 겪을 일도 없는 다른 한쪽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몰랐다.

단 한 번도 버림받은 적도 버림받을 일도 없는 자의 치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만큼이나 나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잘잘못을 따지거나 공허한 연민을 말하는 대신에 눈빛만으로도 그건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이들 또한 존재했다.

“듣고 계시는 건가요? 부…….”

“아, 진짜 못 들어주겠네.”

촤르륵.

일전에 이곳에서 이미 한 번 일어났던 일이었다.

우아하게 빗어 내린 백금발, 매끄러운 하얀 얼굴, 고급스러운 드레스 앞섶과 장신구들이 찻물로 흠뻑 젖어버린 일 말이다.

차를 끼얹은 사람만 뒤바뀌었을 뿐이지.

현재 프레이야의 표정은, 지난번 그때 내가 지어 보였을 표정과 아주 똑같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완연히 넋이 나가고 얼이 빠져버린 표정.

찻물을 뒤집어쓴 채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린 만면이 아주 볼 만 했다.

“지금, 이게 무슨 짓…….”

“왜, 찻물 뒤집어쓰는 게 취미 아니었어? 뚫린 입이라고 잘도 으스대는데 말이야, 너처럼 남한테 유치한 누명이나 뒤집어씌우는 게 적극적이고 당당한 인생 같지는 않은데?”

“이, 이러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나는 다과를 한 움큼 집어 들고는 끊임없이 잘도 살아 있는 입에다 아무렇게나 쑤셔 박았다.

혈당 쇼크나 와라, 이 못된 년아.

“우우욱! 퉤, 퉤! 이게 대체 무슨 천박한 짓거리…….”

“네 천박한 주둥이가 불쌍해서 그런다, 왜. 네 말대로 내가 한심하게 살았다고 치자, 그런 나한테 사사건건 못 이겨 먹어서 안달인 너는 뭔데? 정정당당하게 부딪힐 생각은 못 하고 음흉한 꼼수나 써대면서 덤벼댄 너는 대체 뭐냐고?”

“이봐요, 나는…….”

“뭐, 행동으로 옮기면 하늘이 도와? 하늘이 너더러 그딴 유치한 짓만 골라 하라고 계시라도 내리든? 내가 그렇게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을 하든가, 고상한 척하면서 속은 까맣게 타죽느라 참 힘들었겠구나? 너 참 못났고 불쌍한 거 알고는 있니? 나 같은 한심한 인간 때문에 미쳐 날뛰는 네가 참 너무너무 불쌍하고 추하다고!”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덜컹덜컹 흔들리던 보라색 눈동자가 이어 화르륵 불타올랐다.

이토록 살벌하고 독기 어린 표정을 프레이야의 낯짝에서 보게 될 줄이야, 역시 오래 살고 봐야 해.

“당신이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내가 흔들릴 일 따위 없었어! 당신 따위 같은 게 대체 뭐라고, 대체 당신 따위가 뭐라고 내 세상을 멋대로 더럽혀? 더러운 보르히아 계집 주제에, 진짜 교황 자식도 아닌 주제에, 누가 매춘부 딸 아니랄까 봐 여기저기 팔린 누더기 주제에…….”

퍽.

내 손에 붙들린 프레이야의 머리가 그대로 새하얀 케이크 속으로 처박혔다.

고운 낯짝이 삽시간에 크림 범벅이 된 그녀가 이내 허우적대는 팔을 뻗어 내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두피가 홱 당기는 통증에 눈물이 찔끔 솟았다.

이것 봐라?

“당신만 없었어도 북부는 그대로였을 거라고! 당신이 나타나서, 당신 따위가 뭐라고 다들 그렇게……!”

“그렇게 애국심이 타오르면 가서 순교라도 하든가, 이 못돼 처먹은 음흉한 인간아!”

“전부…… 당신…… 때문이야! 대체 왜 내가 당신 같은 거 따위 때문에 이런 기분 느껴야 하느냐고……!”

“네 기분 따위 내 알 바 아니거든?”

“혈통도 불분명한 여자 하나 때문에, 뭐 하나 비교할 가치도 없는 여자 때문에, 할 줄 아는 거라곤 웃고 춤추는 것밖에 없는 멍청한 인형 하나 때문에 왜 이 내가 그딴 박탈감을 느껴야 해!”

“그게 바로 인생이야, 이 어린 년아! 따질 사람한테 좀 따져!”

남편을 내 편으로 만드는 방법

3권

냥이와향신료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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