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곳에서 생활한 지 거의 반년 차, 이와 같은 풍경은 처음이다.
따라서 내가 감개무량한 기분이 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울 터였다.
한데 어째서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오랜 세월을 여기서 보냈을 사용인들은 저토록 흔들리는 동공을 하고 있는 것인가.
“너 근신 중 아니었느냐?”
“진작 풀렸습니다만.”
“대체 어째서냐?”
“자애로운 단장님께서 저 없이는 안 되시겠답니다.”
“빌어먹을 놈, 호시탐탐 남의 아들을…….”
“뭐요?”
“염병 떨지 말라고 했다.”
“아, 젠장. 애 앞에서 말 좀 안 가립니까.”
“크흠, 크흐헴!”
이 부자도 참 보면 볼수록 오묘하군.
그래도 먼발치에서조차 암흑의 기운을 풀풀 풍겨대던 예전이랑 비교하면 한결 다른 분위기이긴 한데…….
엘레니아로 말하자면 두 남정네를 지극히 한심해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긴 했으나 딱히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예전에는 안 그러는 척해도 뭔가 전전긍긍하는 기색이 좀 있었던 것 같은데 이쪽 또한 묘하다.
“아버지, 그만 식사나 드십시오. 아침엔 늘 허기진다 하셨잖습니까.”
“내가 아무리 허기진다 한들 꼭두새벽부터 그리 놀아댄 너희만 하겠느냐?”
“…….”
“어린애들이 따로 없더구나. 재미있더냐?”
엘레니아의 무표정한 얼굴이 움찔함과 동시에 이스케가 애꿎은 돼지 다리를 무자비하게 토막 내는 소리가 쿵 하고 울렸다.
나는 고소한 향기를 풍기는 맥주 수프에 스푼을 찔러 넣으며 꿀 먹은 남매를 대신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음에는 아버님도 같이하시는 거 어때요?”
“……나는 어깨가 좋지 않소. 특히 눈만 오면 쑤셔댄단 말이오.”
“하고 나서 좀 주물러 드리면 되지요.”
“쿨럭!”
아이고, 깜짝이야.
그냥 웃자고 한 말인데 왜 다들 나란히 사레가 들리고 그러시나, 민망하게.
황급히 물잔을 내려놓은 엘레니아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는 동안 이스케는 겨우 기침을 갈무리하고서 다짜고짜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제 아버지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그간 그리 부려먹으신 겁니까?”
“쿨럭, 쿨럭! 내가 미쳤느냐?”
“그럼 이게 무슨 소리냐고요?”
“쿨럭, 크흠! 불효막심한 너희더러 좀 하라는 깊은 뜻 아니겠느냐? 좀 본받기나 하거라.”
음, 아무래도 다들 이 자리가 심히 어색한 것 같다.
다 같이 식사한 적이 아예 따로 없는 건가?
지금 내가 제일 몸 둘 바 몰라야 정상일 텐데 내가 제일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네.
나는 더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묵묵히 고소한 수프를 다 비웠다.
올리브가 송송 박힌 신선한 빵을 갈라 버터를 듬뿍 바르고서 크게 한 입 베어 물자 찌릿한 식욕이 저 아래서부터 치고 올라왔다.
와, 참 맛있다.
엘레니아랑 먹은 셰퍼드 파이도 맛있었지만, 여기 버터가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다.
북부는 참 위대하군.
“……입맛에 맞아?”
“으응? 버터가 엄청 고소하네요.”
“야크 버터야.”
그렇단 말인가? 그런데 너는 왜 안 먹고 나만 빤히 보고 있니? 평소의 짐승 같은 식욕은 어디로 가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떠 보였다.
말끄러미 내가 먹는 모습을 바라보던 이스케가 이내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쪽에 놓인 고기 스튜를 빈 접시에 덜고는 내 앞에 내려놓는 것이었다.
“그거 이렇게 먹으면 더 맛있어.”
“이렇게?”
“봐봐, 여기다 넣어서…….”
“이상할 것 같은데.”
“아냐, 일단 한 번 먹어 봐.”
좀 미심쩍긴 했으나 먹는 걸로 장난칠 녀석은 아니기에 순순히 따라 해보았다.
그러고는 흐물흐물해진 버터 빵과 스튜 건더기를 스푼 가득 떠서 입안에 넣었다.
“맛있어…….”
“그렇지?”
의기양양하게 웃는 미소가 새삼 낯간지럽게 느껴지는군.
왠지 신이 난 것 같기도 한데, 갑자기 좀 미안해지는구나.
고작 이런 걸로 이렇게 좋아해 주는 녀석한테 난 대체 무슨 꼴을 보여주고 만 건지…….
“당신도 얼른 먹어요. 자, 맨날 고기만 먹지 말고.”
“내가 언…… 알았어.”
소시지와 버무려 볶은 채소 접시를 건네자 의외로 순순히 포크를 놀리는 이스케였다.
하긴 바로 조금 전에 자기 입으로 누구보다 더 순순하다고 주장했으니, 이제 와서 물릴 수는 없겠지.
“크흠, 크흠!”
“또 사레라도 들리셨습니까 아버지?”
근엄하신 공작님은 딸의 삭막한 질문에 대꾸하는 대신에 아들이 애써 썰어놓은 돼지고기 접시를 가져가 들기 시작했다.
이 횡포에 이스케는 당연히 기가 막힌 표정이 되었으나 웬일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사가 그렇게 그럭저럭 무난한 분위기 속에서 흘러가고 이어 디저트가 나왔다.
마시멜로가 보글보글한 진하고 달콤한 코코아와 눈처럼 새하얀 크림 케이크라니 이 얼마나 함박눈 내린 아침에 딱 맞는 디저트인가?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무래도 나뿐인 모양이었다.
심지어 엘레니아조차 뭐 보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거 아버지 취향입니까?”
“갑자기 또 뭐가 불만이냐? 며늘아기는 좋아만 하는 눈치거늘.”
“아버지가 대체 언제부터 그리-”
“너희도 어릴 땐 좋아하지 않았더냐?”
“지금 언제 얘기를…….”
“그때랑 똑같이 놀더니만 새삼스럽구나.”
느긋하게 대꾸하신 아버님이 술잔을 홀짝이며 시종들을 향해 기품 있게 손짓을 해 보였다.
창백한 낯빛으로 주위를 오가던 사용인들이 부리나케 자리를 떴다.
나는 독배라도 되는 것처럼 제 코코아 잔을 물끄러미 노려보고 있는 이스케가 그대로 테이블을 엎어버리는 거 아닐까 좀 걱정했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관자놀이에서 핏대가 불끈불끈하는 무시무시한 모양새이긴 했지만.
“재미있으십니까……?”
“너만 하겠느냐? 그것보다 네 상관이 꼭두새벽부터 왜 그 야단인지 좀 얘기해 보거라.”
“내가 그걸 왜 아버지한테 보고합니까?”
“누가 나한테 하라더냐?”
이건 또 뭐람.
나는 얼어붙은 남매의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내 케이크를 한 입 뜨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이 생겼나요?”
“일이 생겼다기보다는…… 젠장, 알아서 말하려고 했는데 왜 우리 부부 사이에 멋대로 껴드십니까?”
“껴들고 싶은 마음 전혀 없다만 네가 자세히 털어놔야 나도 전하께 보고드릴 수 있지 않겠느냐?”
“바론스 경한테 들으시면 되잖습니까. 아니, 이미 들으셔 놓고는.”
“네 상관은 옛적부터 과장하는 버릇이 심하여 뭐든 신빙성이 떨어진단 말이다. 부…… 루비, 실은 간밤부터 롬의 굴에서 기묘한 소리가 들려온다는 거 아니겠소.”
롬의 굴이라면 우리 용 새끼의 은신처가 있는 곳 아닌가.
짜증스럽게 이마를 문지르던 이스케가 한결 차분해진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궁전 습격 이후로 쭉 그쪽 주위를 감시하고 있었는데, 어젯밤부터 갑자기 누가 칭얼대는 소리가 들린다더군. 앓는 소리라고 해야 하나? 단장님 주장으론 용의 곡소리가 분명하다는데.”
“용이 아프기도 해요?”
“부상당한 경우가 아니면 한 가지뿐일 텐데 시기가 맞질 않아서…… 아무튼 정확한 동태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긴 한데, 일단 오늘 주변 청소를 좀 하고서 널 데리러 올지도 몰라. 그 녀석 비밀 장소에 들어가 본 건 너뿐이기도 하고 또 이래저래…….”
“일부러 아픈 척할 가능성도 있지 않아? 그러니까 루비 오게 하려고.”
나는 일순 턱을 멍하게 벌린 채 엘레니아를 쳐다보았다.
엘레니아가 눈을 매섭게 떠 보였다.
“루비, 보이는 것보다 훨씬 영악한 것들입니다. 쉬이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내 말이 그 말이다. 아무리 봐도 그 새끼 꾀병이 분명한데 바론스 경은 자꾸만…… 아버지가 보기엔 어떻습니까?”
“너희들 의견에 일리가 있다. 그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저질렀던 추태를 감안하면…….”
모처럼 사이좋게 머리를 끄덕거리는 단출한 일가족의 풍경에 훈훈함을 느껴야 하나?
대체 언제부터 그리들 뜻이 잘 맞으셨냐고?
그 고약한 녀석이 진짜로 아픈 거면 어쩌려고!
뭐, 나만 걱정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긴 하다만, 그래도 명색이 멸종위기종인데 말이지?
설상가상으로 아리따운 시누이께서 한술 더 떴다.
“정말로 아픈 거라면 차라리 이번 기회에 시름시름 앓다가 그냥 홱 가게 두지 그래.”
“나도 그러고픈 마음이 산더미다만 꼴에 멸종위기종이라서 그것도 어렵다. 아프다는 핑계로 또 폭주할까 하는 우려도 있고.”
“정확한 안목이구나. 한데 네 상관은 도대체 뭐라고 징징대더냐?”
“대체 뭐 하는 것들인지 모를 조합의 금수 새끼 두 마리가 사이좋게 입구에 떡 버티고 있어서 도저히 접근할 수가 없답니다. 즉, 그놈들이 용이 아픈 틈을 타 대에 걸친 재물을 훔치려는 다른 마수들을 막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거, 고로 서리용이 진짜 아픈 거 아니겠냐는 겁니다.”
“그것들끼리 그리 친한 사이였더냐? 그렇게 안 보이던데.”
“모르죠, 어쩌면 셋이서 사이좋게 작당한 걸지도. 꼴에 머리 굴리지 않아도 알아서 만나게 해주려고 했는데 이거야 원 하는 짓거리가 영 괘씸해서…….”
“있잖아요.”
탄식을 삼키며 입을 열자 기괴한 흥이 실린 기괴한 대화가 순식간에 뚝 멎었다.
이어 비단 도도한 남편 녀석뿐만 아니라 포커페이스의 시누이와 근엄한 아버님까지 일제히 나를 말끄러미 바라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어째 그림이 좀 그렇군.
“……아, 물론 농담이다. 안 그래?”
“당연히 농담이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아버지?”
“크흠, 내 그놈 덕에 입은 손실이 괘씸하여 한번 해본 소리인 게지.”
영 신빙성이 없었으나 나는 내색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대신에 어정쩡하게 잔을 쥐는 척하고 있는 이스케를 향해 생글 웃었다.
“그럼 오늘 거기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죠? 롬의 동굴에 당신이랑도 같이요?”
“어? 어, 뭐 당연히 그렇지. 혹시 모를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절대 혼자 그것들을 만나도록-”
“좋네요, 꼭 부부 합동 작전 같잖아요. 당신 혼자 살펴보겠다고 할까 봐 내심 걱정했는데. 그 애들 지금 엄청 예민할 거 아니에요?”
이스케는 잠시 두 눈을 세차게 깜박거리며 나를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싶더니 ‘누가 누굴 걱정……’ 비슷한 소리를 중얼거리고는 불쑥 진한 코코아를 원샷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 기시감은 뭐지.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스케가 급격하게 혈당 오른 머리를 테이블에 쿵 처박고 부들부들 떠는 동안 아버님이 혀를 끌끌 찼다.
“입 안 뎄느냐?”
“……쿨럭! 아, 제기랄…….”
“갈수록 꼴같잖은 짓만 골고루 골라 하는구나.”
“시끄럽…… 쿨럭! 큼, 큼……!”
“이스, 괜찮아요?”
이스케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에 우람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고는 솥뚜껑 같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싸쥔 채 눈만 겨우 내보이며 신음하듯 내뱉었다.
“아무튼 그럼 난 이만 가서 먼저 정리 좀 하고 있을 테니까…….”
“나도 이만 궁에 가봐야겠군. 부디 그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꾀병이길 바라겠소. 그런 거라면 이참에 좀 단단히 주의를…….”
“이만 가겠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너야말로 얼른 안 가고 뭐 하느냐? 더 먹고 싶으냐?”
나와 엘레니아는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가, 티격태격 으르렁대는 부자의 크고 아름다운 뒷모습에 대고 동시에 입을 열었다.
“잘 다녀오세요, 다들 이따 만나요.”
“잘 다녀오십시오.”
두 우람한 부자는 어째 비슷하게 느껴지는 모양새로 우리 쪽을 마지막으로 흘긋 한 번 돌아보았으나, 이내 그들답게 또 뭔 심사가 꼬인 건지 앞다투어 헛기침을 쏟아내며 폭풍처럼 식당을 나갔다.
“……루비, 제 것도 드시겠습니까?”
“엘렌은 어쩌려고요?”
“전 다른 디저트를 좀 내오라 하겠습니다.”
최초로 일가가 한자리에 모여 맞은 아침 식사는 그렇게 평화롭게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