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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우리 용 녀석이 갓 깨어났을 때만 해도 눈은 아주 잠깐 내리고 이후 북부답지 않은 맑은 날이 이어지더니만, 이번엔 아무래도 좀 다른 것 같다.
기후가 이렇게 멋대로 오락가락하는 게 용 녀석과 연관이 있는 건지 혹은 단순히 이 나라는 원래 항상 이 모양인 건지 모를 일이었다.
슬슬 초겨울인 계절이라 해도 말이지, 밤새 이 정도로 쌓일 정도의 눈이라니 제법 보기 좋은걸.
“마님…….”
어째서인지 대경실색한 듯한 표정으로 우물거리는 호위 기사들 쪽을 돌아보며 입술에 쉿 하고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고는 어깨에 두른 숄을 꼭꼭 여미며 눈 덮인 뜰에 발을 디뎠다.
꼭두새벽의 푸르스름하고 어둑한 하늘과 온통 새하얗게 물든 뜰의 대조라니 참으로 운치 있게 산책하기 좋은 풍경 아닌가.
푹신하게 쌓인 눈 위에 연이은 발자국이 남았다.
오랫동안 침대에만 누워 지내서 그런지 다리가 아직 좀 뻣뻣했으나 곧 나아지겠지.
체력이 곧 정신력이요, 지구력이라 했는데, 그동안 여러모로 너무 비실거렸던 듯하다.
이제부터라도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도록 애써야겠어.
책임져야 하는 것들이 생겨 버렸으니까…….
온통 새하얗게 물든 가운데 홀로 멀쩡할 내 온실 정원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서 그쪽으로 발길을 돌리려다가, 문득 이는 어떤 충동에 걸음을 잠시 멈추고 쪼그려 앉았다.
이 ‘이것이 바로 북부의 기상이오!’라고 주장하는 것 같이 생겨 먹은 험악한 공작성의 앞뜰에 앙증맞은 눈사람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면 어찌 느껴질지 궁금해지는데.
실내용 장갑을 끼고 나오길 잘했군.
눈사람을 제대로 만들어본 기억은 별로 없지만, 나름 야무지게 눈덩이를 꼭꼭 뭉친 뒤 열심히 굴리고 있자니 추운 공기가 무색하게도 어느덧 땀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한창 열중해서 겨울맞이 걸작품을 제작하는 찰나였다.
“……루비!”
……아니, 이게 누구신가.
좀체 얼굴 보기 힘든 우리 도도한 남편 녀석 아니신가?
나는 제법 거대해진 눈덩이 위에 팔을 걸치고는 이쪽으로 부랴부랴 뛰어오는 괴수 같은 녀석을 향해 방긋 웃었다.
그리고 한결같은 이스케 녀석은 그러한 나의 태연자약한 태도가 몹시 마음에 안 든 것이 분명한 듯 한결같이 으르렁거렸다.
“대체 뭐 하는 거야, 추운데 혼자 나와서…….”
“당신이 없으니까 혼자 나왔죠.”
생글생글 쏘아붙이자 털 망토를 벗어 내 몸에 두르던 이스케가 멈칫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눈매에 때아닌 당혹감이 얼룩졌다.
“근신당했다 들어서 기껏 위로해 주려고 잔뜩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왜 내 님은 좀처럼 얼굴을 안 보여주실까?”
“……그건.”
“응? 말해봐요, 어디서 외박이라도 했어요?”
휑한 정적이 좀 스쳐 갔다.
이스케는 일순 영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모양새로 머리를 긁적이더니만, 이내 아니나 다를까 그답게 뻔뻔하게 인상을 찡그리며 당당하게 주장했다.
“나는 같이 바람날 도마뱀 같은 거 없어.”
“…….”
“다만 네가 몸이 안 좋으니까 뭐랄까…… 조심하는 것뿐이라고.”
“나 이제 멀쩡한걸요. 뭐를 조심해요?”
“그거야 당연히…….”
붉은 시선이 머뭇거리듯 내 초롱초롱한 눈길을 마주했다.
얼씨구?
“그러니까……. 아, 젠장, 짐승 같은 놈이라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고. 못 참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해 그럼?”
“…….”
“난 얼간이는 맞지만 그 정도로 형편없는 놈은 아니야.”
우물우물 덧붙이며 눈을 내리까는 모양새가 참 생소하다.
나는 벌어진 턱을 살그머니 다물었다.
입가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나름 참으려고 했으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푸흐하하하하!”
“왜, 왜 웃는 거야?”
“아하하하하!”
배를 잡고 깔깔거리는 나를 멍하게 응시하던 것도 잠시, 한결같은 남편 놈은 곧장 그답게 버럭했다.
“기껏 털어놨더니 비웃기냐? 웃지 마!”
“푸흐흐흐…… 언제는, 언제는 내가 웃는 모습이…… 프아하하하!”
“그거랑 그거랑…… 웃지 말라고!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왜, 푸흡, 왜 또 나 때문인데요?”
“네가 각인이니 뭐니 하는 이상한 소릴 하면서 볼 때마다 그런 표정으로……. 아, 웃지 말라니까!”
“무슨 표정이요?”
웃음을 갈무리하려고 애쓰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고는 슬쩍 물었더니, 아무래도 이스케는 이쯤에서 더 상대해보았자 자신만 손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불쑥 등을 홱 돌리고 선 뒤태가 참 고독하고 쓸쓸해 보인다.
“이스, 내가 어떤 표정 하고 있는데요?”
“…….”
“응? 난 직설적인 북부식 화법에 익숙해져 버려서 있는 그대로 말해줘야 알아듣는다고요.”
대답이 없다.
과연 아버님 말씀대로 세상천지 저 혼자 멋있는 줄 아는 녀석이로세.
“여보, 화났어요?”
“……화 안 났거든?”
“그럼 삐졌어요?”
“내가 열 살 먹은 꼬맹이냐?”
“그럼 왜 갑자기 소녀를 외면하시나요?”
침묵.
연이은 어색한 침묵의 흐름 속에서 이스케는 좀체 꼼짝도 하지 않으며 우람한 등짝만 보여주고 있었다.
하여간 덩치랑 안 어울리는 녀석 같으니라고.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눈덩이가 벽 같은 어깨에 부딪혀 산산이 흩어졌다.
그제야 홱 돌아보는 핏빛 눈길이 실로 으스스하다.
“지금 뭐 하는…….”
퍽.
어머나, 이를 어쩜 좋아. 머리에 적중해 버렸네?
하얀 눈가루가 은빛 머리카락을 뒤덮고 흘러내린다.
내가 다시 눈덩이를 뭉치는 동안 이스케는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는 데 좀 걸리는 듯했다.
그러고는 뭐에 홀려서 멍하니 있었든 간에 곧장 그다운 모습을 되찾았다.
오오, 이 얼마나 등골 오싹하게 느껴지는 표정인가?
“이게 대체 무슨 짓…….”
퍽.
“하지…….”
퍽.
“루비, 하지 말란…….”
퍽. 퍽. 퍽.
“그만두라니까!”
“분하면 당신도 던져요.”
“말이 되는 소리를 좀…… 잠깐, 잠깐! 팔라딘은 얼굴이 생명이라고!”
뭔 소리야, 이건 또. 이 녀석도 알면 알수록 예사롭지가 않다.
무려 성스러운 관직이 달린 면상에 정통으로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보복심 뛰어난 남편 놈은 어째서인지 영 맞서 싸울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팔로 이리저리 막기에 급급할 뿐이다.
에이, 이래서야 재미없…….
“재미있어 보이는군요.”
막 눈덩이를 집어 들던 나도 온통 뒤집어쓴 눈을 툭툭 털어대던 이스케도 나란히 고개를 돌렸다.
우리의 시선이 향하는 끝에는 두꺼운 숄을 걸친 채 나와 계신 아리따운 공녀님이 아주 볼만하다는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오빠가 이러고 놀 줄도 아는지 몰랐네.”
잠시 우리 부부의 시선이 교차했다.
이윽고 남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쪽이라면 가능한데.”
“엘렌, 엘렌도 낄래요?”
엘레니아의 얼굴에 서려 있던 득의만면한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음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예? 아뇨, 저는 사양-”
퍽.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내가 세차게 던진 눈덩이가 그녀의 어깨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이스케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이건 재미있겠군.”
“이게 무슨…… 꺅! 뭐 하는 거야, 오빠 미쳤……!”
퍽. 퍽 퍽 퍽.
조금 전까지의 방어적인 태도는 어디 갔는지, 이스케는 이제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맹한 속도로 선공을 펼치고 있었다.
이거야 원, 좀 걱정될 지경인데.
순식간에 하얗게 뒤덮여 바닥에 풀썩 주저앉은 엘레니아가 불쑥 머리를 가린 팔을 내린 것은 그때였다.
퍽!
주르륵.
“……나도 네 얼굴 치면 되냐?”
“꿈도 꾸지 마시지.”
퍽, 퍽 퍽 퍽!
엘레니아가 던진 눈덩이에 내 머리 또한 금방 하얗게 물들었다.
머지않아 우리 셋 모두 원인 모를 호승심에 활활 타올라 서로를 향해 신나게 눈 뭉치를 날리기 시작했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쩌다 나와 엘레니아가 한 편이 되어 이스케를 공격하는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야, 잠깐만! 남편을 버리는 마누라가 어디 있어? 둘이 언제 그리 친했다고-”
“당신이 먼저 날 외면했잖아요!”
“질투 나면 오빠가 좀 건실해지든가!”
“나처럼 건실한 청년이 어디 있냐, 이 호박아!”
“뭐야?”
웃음소리가 퍼져갔다.
정확히 누구의 웃음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퍽 하는 엘레니아의 강맹한 일격을 마지막으로 이스케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양팔을 들어 올렸다.
“졌다, 졌어. 애초에 이겨 먹으려 한 내가 죄인이지.”
“그걸 이제 알았어?”
“잘난 척 으스대는 데 말이야, 네가 그새 내 마누라를 꼬시지만 않았어도…….”
“꼬시다니, 우리는 셰퍼드 파이도 같이 먹는 사이라고. 그것도 두당 하나씩.”
밀가루를 뒤집어쓴 것 같은 머리를 거칠게 탁탁 털던 이스케가 멈칫하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아가 엘레니아 또한 어딘가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내 쪽을 힐긋 돌아보는 것이 아닌가.
오호라, 이거 참. 그건 또 언제부터…….
나도 뻔하다지만, 너희도 참 뻔하구나.
나는 그만 빙긋 웃었다.
“그러게 당신도 일찍 왔으면 좋았잖아요.”
“……미안.”
“이렇게 순순한 태도는 당신답지 않은데.”
“무슨 소리야, 내가 얼마나 순순한 놈인데. 서리용보다 내가 더 순순하다.”
이건 또 무슨 돼먹지 못한 사족이란 말인가?
뭐 같은 소리를 참으로 당당하게 내뱉은 녀석이 대뜸 씩 웃으며 내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나 못지않게 어처구니를 상실한 눈빛이 된 엘레니아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하다 하다 이젠 마수한테 질투를…….”
“질투는 그놈이 나한테 하는 거거든?”
“오빠 진짜 유치한 거 알고는 있어?”
“몰라, 인마. 이거나 받아라.”
“꺅……! 비겁하게 이게 무슨 짓이야!”
“크헤헴!”
나직하게 끼어든 때아닌 헛기침 소리 덕분에 2차전으로 번질 뻔한 눈싸움은 거기서 중단되었다.
나란히 사이좋게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돌리는 우리의 시야에 그제야 동이 터오는 저택의 풍경과, 이른 아침부터 심판의 날이라도 맞이한 듯한 표정의 목격자들이 들어왔다.
잠시 묘한 정적이 흘렀다.
오메르타 성이 그렇게 고요의 성이 된 가운데, 아주 가관인 얼굴을 한 아버님께서는 단 두 마디만 하셨다.
“들어가서 식사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