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에렌딜에 온 이래 이런저런 일로 앓아누웠던 적이야 퍽 잦았으나, 이번 같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니, 이렇게 아무런 불안감이나 초조함 없이 마음 편하게 푹 쉰 적은 전생 현생을 통틀어 처음인 것 같다.
외부에는 내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고 알려진 듯했으나 사실 나는 더는 아무 데도 아프지 않았다.
다사다난했던 축제 동안 온 진을 쭉 빼버린 탓인지 기력을 완전히 회복하기까지는 좀 걸렸지만, 어쨌든 모처럼의 긴 휴식을 딱히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내가 그렇게 환자 행세를 즐기는 동안 오메르타 가의 주치의 세르게이 씨가 매일같이 찾아왔다.
딱히 아픈 곳도 없었기에 진찰할 것도 없었지만 대신에 나의 이런저런 의문들을 해결해 주었다.
그러니까, 언젠가 이스케가 돌팔이라 칭했던 주치의 양반께서는 왠지 본의 아니게 나의 비밀을 공유하게 된 모양이었다.
새삼 이채가 초롱초롱 감도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모양새가 영 좀 그랬으나 자진해서 술술 털어놓는 말씀은 퍽 그럴싸했다.
“전에 공자님께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실은 마님께선 타인에 비해 고유 신성 코어가 굉장히 미약하십니다. 사실상 없는 거나 다름없달까요.”
“거의 없다고요……?”
“예. 이래 봬도 제가 소싯적 북부의 한가락 하는 치유 사제로서…… 큼, 물론 그런 경우가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만, 마님의 배경을 고려했을 때 퍽 의외였다 할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제 소견입니다만 마님의 그, 특수한 능력이 그 문제와 연관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럼 신성 대신 뭐 마력 같은 거라도 있는 건가요?”
“그러셨다면 큰일이었겠지요. 다만 신성 코어가 없다시피 한 상태에서 지금껏 온통 강력한 신성투성이인 환경에서 지내셨을 터라, 그 반작용으로 아마 종종 원인을 알 수 없는 신체의 고통에 시달리셨을 겁니다. 맞습니까?”
오오, 정확히 짚었다.
역시 절대 돌팔이가 아니시라니까.
내가 나의 여태까지의 연례행사 증세를 설명하는 동안 세르게이 씨는 매우 주의 깊게 듣고 있다고 주장하는 얼굴로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더니 한참 후에 퍽 진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디 보자, 열다섯 살 무렵 크게 앓으신 이후로 매년 두 번씩, 그런데 북부에 온 이후로 갑자기 시도 때도 없이 잦아졌다. 맞습니까?”
“네. 저 말고 다른 사람들은 의원들조차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고요. 일전에 남편이 열이 난다고 느끼긴 했었는데 그게 열병이 겹쳐서인지 다른 이유 탓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제가 마님을 처음 진찰해 드렸던 그때 말씀이시지요? 진짜 열병이 오긴 했습니다만, 전반적으로 제가 보기에는 전부 환경의 변화 탓 같습니다.”
“환경의 변화요?”
“잘 이해가 가지 않으실 겁니다. 로마냐는 엄연한 성도인 데다 마님의 친정분들부터가 신성의 정점이신 분들이니까요. 그러나 후천적으로, 쉽게 말해 성직에 몸담은 이후 똑같이 강력하게 갈고닦았다 해도 선천적인 질의 차이는 어쩔 수가 없는 법입니다. 대부분 사람이 타고나는 고유 신성의 양이나 질은 비슷비슷합니다만, 으레 그렇듯 개중 유난히 두드러지는 특수한 혈통도 존재하게 마련이지요. 이 오메르타 가문처럼.”
거기엔 나 또한 아무 이견도 없었다.
무려 민간인인 엘레니아가 일시적으로나마 사용했을 정도이니까.
원작에선 이 신성이란 것에 대해 따로 분석하거나 중요하게 다룬 적이 없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알면 알수록 심오하군.
“그래서 아까 말씀하신 그 환경 변화라는 것이…….”
“예. 여태 겪으신 것보다 더 큰 부담이 되었을 거란 겁니다. 주치의로서 이런 말씀 드리긴 뭣할지도 모르나 오메르타 가문이 괜히 옛날부터 최고의 팔라딘만을 연속 배출해 낸 것이 아니라서요. 남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고유의 파동과 더불어 순수함과 강력함 면으로 견줄 가문이 없을 겁니다.”
내가 확실히 결혼을 잘하긴 한 것 같군요.
그런데 왜 당신이 자랑스러워 못 견디는 것처럼 보일까요?
하여간 충심 깊은 양반들 같으니.
“그럼 제가 남편하고 가까이 지낼수록 안 좋다는 거네요? 제 남편이 이 사실을 알고 있나요?”
짐짓 짓궂게 묻자 충심 깊은 주치의 양반은 곧장 당황한 표정으로 빠르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얼씨구?
“절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걸 차고 계시는 한 앞으로 아프실 일 없을 겁니다.”
뭐를 차?
나는 눈을 깜박이며 시선을 내렸다.
정확히는 아직도 쭉 차고 있었던 팔찌를 바라보았다.
이스케가 내게 준 첫 선물, 선조께서 암굴용의 심장으로 만들었다던 가보 말이다.
가만, 그러고 보니…….
“처음 진찰해 드렸을 당시만 해도 저도 완전히 확신은 못 하였기에 별 조언을 못 드렸습니다만, 마님께서 그, 가출하시고서 돌아온 이후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본 결과 역시 코어 상태가 상태인지라 혹시 몰라 공자님께 조언을 좀 올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행히 딱 맞는 물건을 찾으셨더군요.”
“암굴용의 심장이라 들었는데, 이 팔찌가 무슨 특수한 역할을 하는 건가요?”
“신성의 접촉을 완벽하게 차단해 버리는 겁니다. 옛날 용 사냥이 한창일 시절 죽은 용의 심장으로 전리품을 만드는 대신 족족 파괴해 버린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예쁘긴 해도 가지고 있어봤자 하등 도움 될 게 없거든요. 살아 있는 상태로는 잘만 성검으로 처맞더니 정작 죽고 나서는 남의 신성뿐만 아니라 착용자의 신성까지 봉해버리는지라…… 물론 마님께는 유용하겠지만요.”
하고 다시 상쾌하게 웃는 주치의 양반이었다.
꽤 그럴싸하고 명쾌한 설명이군.
그나저나 하등 도움 될 것 없는 용의 심장으로 팔찌를 다 만드셨다니, 이스케의 증조부께서도 자손들 못지않은 비범한 악취미의 소유자이셨나 보다.
이걸 만들어서 대체 어디다 쓰신 거지?
동료들이랑 장난하자고 만든 건 아닐 테고.
“그럼 이게…… 혼자 막 빛나거나 할 때도 있나요?”
“드물긴 합니다만 유독 격렬한 신성 충돌에 휩쓸리거나 할 경우 그럴 수 있습니다. 가령 정화와 파괴의 충돌이라든가, 혹은 카니지와 실드의 충돌이라든가…….”
“카니지요?”
“성검에 의한 대살육이죠. 검주가 완전히 눈이 돌아버려야 하는지라 보편적인 신성 검기와는 결이 다르달까요. 혹 보신 적이 있습니까?”
봤다마다요.
보기만큼 무시무시한 이름이네, 그때 아버님이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체시아레는 완전히 도륙이 났겠군.
그 정도로 이스케는…….
어쨌든 그때 카니지에 휩쓸리는 와중에도 보호해 줄 신성이 전혀 없던 내가 혼자 아무렇지도 않았던 건 전부 이 팔찌 덕분이라는 거구나.
완벽한 차단이라고.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다만 아직 좀 의아한 부분이 있는데…….”
“뭐든 물어보십시오.”
“제 고유 신성 문제에 대해 친정 식구들은 왜 여태 아무것도 몰랐을까요? 세르게이 씨조차 금방 파악하고 제가 아플 거라는 짐작을 하셨잖아요. 그런데…….”
알았다 한들 모르는 척했을 가능성도 컸으나 혹시 몰라 질문했다.
한데 소싯적 한가락 했다는 치유 사제 출신 주치의 양반께선 내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대꾸하기는커녕 도리어 매우 이상한 낯빛이 되어가는 것이 아닌가?
“세르게이 씨?”
이쪽도 시도 때도 없이 기분 오락가락하는 다중인격이신가?
한참이나 말없이 나를 지그시 응시하고 앉은 세르게이 씨의 표정은 정말로 이상했다.
갑자기 뭔가 화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뭐야, 다짜고짜 불쌍하게 보는 것 같은 이 낯짝은.
아무것도 모르시는 분이 갑자기 왜 이러지?
“왜 그러시는…….”
“이런, 송구합니다. 제가 그만…… 큼, 뭐 전혀 짐작 못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마님의 상태에 대해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으니 장담할 순 없지만, 열다섯 살 이후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셨다면 아마 그전까지는 코어가 제대로 존재했을 겁니다.”
존재했다 없어졌을 수 있다 이 말인가.
하긴 나의 특수한 상태를 고려하면 가능할 법도 했다.
원래의 루드베키아에겐 있었고 나에겐 없는…….
“선천적으로 없는 경우도 드물지만 후천적으로 사라지는 경우는 더 드문지라 참 특수한 상황입니다만 어쨌든 어릴 때 확인하셨다면 그 이후로는 성직에 종사하지 않는 이상 따로 확인할 일이 없었을 겁니다.”
그다지 명쾌하게 들리지 않는데. 명색이 교황청 소속 의원들이 날 진찰하면서 아무것도 몰랐다고?
게다가 나 이전의 루드베키아가 원래 어떤 상태였는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원작에서의 그녀는 단 한 번도 나처럼 아프거나 혼자 앓는 법이 없었다.
마수들과 엮인 적 또한 없었기에 아마 남의 몸에 들어온 부작용일 거라 짐작할 뿐이었다.
내 의심스러운 표정에 세르게이 씨는 자신이 느끼기에도 궁색하다 싶었는지 퍽 서글픈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마님. 제 생각에는……. 마님 본인조차 모르게 하실만한 이유가 있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
“그러니까, 마님께선……. 그러한 결점이라면 결점으로 보일 수 있는 부분이 알려져선 안 되셨을 테니까요. 언제 어디로 가시게 될지 몰랐으니…….”
교황의 따님이신 로마냐의 공주께서 고유 신성이 없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팔아치울 때 가치가 떨어질지도 모른다, 는 우려에서 그랬을 거란 뜻이었다.
거기다 나는 교황의 친딸이 아니었다.
남들은 모른다 해도 의심은 하고 있다.
신성 코어가 없다는 게 알려진다면 그 의혹에 확신을 심어주는 거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역시나 그런 거였군.
하긴 몰랐을 리가 없네.
그렇게 잘해주는 척할 때도 연례행사만 오면 꾀병 아니냐고 눈을 부라려대더니 그럼 그렇지.
하도 뻔해서 딱히 놀랍지도 않다.
그러니 우리 의사 양반께서 그만 좀 저런 표정으로 쳐다봐 줬으면 좋겠는데.
“마음 쓰실 거 없어요, 그럴 거라고 짐작했으니까. 단지 제 오빠가 이 팔찌를 보고도 아무 말 않은 게 신기하긴 하네요.”
일부러 장난스럽게 내뱉었음에도 또 뭐가 잘못된 건지 우리의 세르게이 씨는 더더욱 우울해져 버렸다.
이런.
“그건 아마 뭔지 모르셔서였을 겁니다……. 용의 심장으로 만든 물건은 현재 그것 하나뿐일 테니까요. 남부인이라면 제대로 알 리도 없고, 또 딱히 뭔가 감지되는 것도 아니라서…….”
참 아련하신 어조로다.
이해했다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인 뒤에도 세르게이 씨는 계속해서 구슬픈 낯짝으로 미적거리셨다.
급기야 내가 먼저 작별 인사를 꺼냄으로써 뜻밖의 우중충한 분위기를 종결시켜야 했다.
하여간 여러모로 의외인 인간들 천지인 나라라니까.
어쨌거나 이제 나의 비밀을 아는 이들이 꽤 늘어버렸네.
엘레니아와 아버님, 오메르타의 호위 기사들, 국왕, 롱기누스 기사단, 왕궁 근위대, 주치의 양반…….
그럼에도 그다지 불안하거나 걱정이 일지 않는 스스로가 신기했다.
왜인지는 나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딱히 더 강해지거나 무슨 수가 생긴 것도 아닌데도 그냥 아무래도 좋다는 듯 무심한 기분이었다.
이스케가 살아 있으며 나 또한 살아 있으니 이제부터 무슨 일이 생기든 괜찮을 것 같은 그런 기분.
그리고 우리 용 새끼도 포포도 그리핀도 전부 무사하다.
앙그반궁을 무지막지하게 때려 부숴놓긴 했지만…….
“마님, 공작님께서 오셨습니다.”
나는 이불에 앉아 베개를 끌어안은 채 생각에 잠겨 있다 말고 얼른 몸을 바로 했다.
천천히 방 안에 들어서는 산적 같은 우리의 공작님은 답지 않게 어딘가 퍽 어색한 분위기였다.
나 또한 좀 어색했다.
그러니까 비단 내 비밀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꼴들을 다 보여버렸으니, 이 어찌 안 어색할 수가 있으랴.
그렇게 피차 심히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아버님이 내 침대 곁의 앙증맞은 안락의자에 걸터앉았다.
퍽 불편해 보였으나 우리 둘 다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먼저 인사를 드려야 예의인지라 슬며시 입을 열려는 찰나, 헛기침을 좀 삼키시는 듯하던 아버님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큼, 몸은 좀…….”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아, 다행이오.”
그리고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어째 그림이 영 그렇다.
아버님과 내가 이런 분위기라니. 이거 참, 발전이라고 해야 할지.
“……큼, 일단 염려 마시오.”
“예……?”
“그러니까 큼, 내 말은, 그 버릇 없는…… 아니, 부인의 가출 친구들이랬나? 그것들은 일단 염려 안 하셔도 되오.”
나는 하마터면 입을 벙하게 벌리고 아버님을 쳐다볼 뻔했다.
아니, 그놈의 가출 친구들 운운이 아버님 입에서까지…….
난 그때 정말 가출했던 게 아니라고!
“아하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요. 전하께서도 동의하셨으니 당분간…… 부인께서 서리용과 지속적으로 친분을 유지해 줬으면 하오. 안 그랬다간 또 혼자 멋대로 오해해서 저랑 꼭 비슷한 내 아들놈을 죽이려 들 테니. 나 원 참 동족 혐오인지 뭔지…….”
“…….”
“서리용 주제에 마곡석에 홀려 폭주한 원인이 아무래도 부인을 못 만나서인 듯하여 내린 결론이오. 아들놈도 순순히 동의한 사안이니 부인 내키는 대로 하면 되오.”
지금 내 표정이 아버님 눈에 어찌 보일지 심히 궁금한걸.
휘둥그레지는 눈을 주체할 수가 없어.
아버님은 내 표정을 힐긋 보고는 한숨을 약간 내쉬더니, 팔짱 낀 육중한 상체를 이쪽으로 조금 수그렸다.
“다른 의도는 없으니 오해 마시오. 비록 그놈 덕에 궁 재건 비용을 내가 대게끔 생겨 버리긴 했으나…….”
“며, 면목이 없네요.”
“왜 부인께서 면목이 없으시오, 생떼 부리느라 실컷 때려 부순 건 그놈인데. 부인이 부른 것도 아니잖소. 그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멋대로 때와 장소를 안 가린 게지.”
“…….”
“다만 아들놈이 물고 늘어지는 것도 그렇고, 딸아이도 그때 부인이 발렌티노 추기경을 언급하셨다 말해주었소. 발렌티노 추기경이 이번 사태를 꾸민 것이라고 하셨다고.”
자식들과 꼭 비슷한 강렬한 루비색 시선이 내 눈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탐색하거나 재보는 거라기보다는, 단지 그냥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태 직전에 거울의 방에서 벌어진 소동 말인데, 일의 전말에 대해선 자식들한테 대충 전해 들었소. 그 두 녀석한테 너무 뭐라고 하진 마시오, 퓨리아나 자제들이 목격자에 포함된 탓이니. 후작가 전체의 입을 확실히 틀어막아야 한다면 내가 나서야 하니 말이오. 거기다 아들놈이 그 집 애새끼를 후려 패 놓은 바람에…… 아무튼 간에 자식새끼 키워봤자 소용없다더니 꼭 자기들 필요할 때만 붙들고 들들 볶아대는 거 아니겠소.”
“…….”
“거울의 방에서의 일 또한 마찬가지로……. 아들놈이 어찌 행동했든 엄연히 오메르타를 욕보인 사건이나, 부인의 위신과 명예를 고려해서라도 공개적으로 대처할 순 없는 노릇이지. 그 점은 부인도 이해하시리라 생각하오. 그때 나도 딱히 그 작자가 좋아서 아들놈을 방해한 건 아니나 지금 기분으로는 그냥 내버려 둘 걸 싶기도 하오. 물론 이제 와서 부인을 붙들고 이런저런 말 늘어놓아 보았자 씨알도 안 먹힐 테지만 아무튼 그렇다는 거요.”
“…….”
“오메르타가 교황청에 비공식으로 따지는 일에 앞서, 부인이 서리용 습격 사태에 대해 언급하신 부분이 사실이라면, 아니, 사실이겠지만 틀림없이 성하 또한 뒷목을 잡으실 거라 짐작하오. 여러 정황을 고려했을 때 발렌티노 추기경이 부인에게 저지른 짓도 그렇고 습격 사태 또한 성하께서 알고 계셨으리라 생각되지 않거든. 내 추측이 맞는 것 같소?”
멍하게 굳어 있던 머리가 저절로 위아래로 움직였다.
아주 정확한 예측이었다.
교황은 내게 있어 장남 놈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폭압에 한해서였다.
자식들에 대한 그렇고 그런 추잡한 악소문들을 한 귀로 흘려버리듯 철저히 무시해 버리는 이유 또한 아예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아서일 터였다.
게다가 체시아레는 그때 거울의 방에서 내게 더는 아버지의 꼭두각시로 살지 않겠다는 둥 하며 같이 돌아가자 했었다.
이번에 체시아레가 저지른 짓들은 솔직히 나조차 의외였는데, 그놈이 그렇게 답지 않게 뭐에 눈이 가린 것처럼 무모하다 못해 어마어마한 짓들을 벌인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으나 어쨌든 교황이 그걸 알고서 묵인했을 리가 없었다.
그럴 만한 멍청한 양반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나를 브리타냐의 왕비로 만들어 북부를 손아귀에 두겠다는 야심 찬 계획에 심히 어긋나는 짓이니까.
아버님이 방금 말한 정황에 그것 또한 포함되려나.
나는 머릿속으로 세심하게 단어를 골랐다.
그러나 이번에도 내가 입을 열기 전에 아버님이 먼저 선수를 쳤다.
“이미 알고 계시는 듯하여 털어놓자면 끌리지 않는 건 아닌 달콤한 제안이었소.”
“아…….”
“부인께서 날 어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눈에 보이는 그대로라고 해야 할 거요. 나는 솔직히 말해 누가 교황이 되든 성도가 얼마나 타락했든 오메르타에 이득만 된다면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이니까. 젊었을 때야 다들 그렇듯 뜨거운 정의감과 애국심에 타오르던 시절도 있었으나 글쎄, 그런 숭고한 기분 따위가 정작 제 가정도 못 지킨 놈에게 더 무슨 의미가 있겠소? 한때는 목숨도 바칠 수 있을 것 같았던 아내조차 그리 가게 만들어버린 놈에게 말이오.”
“…….”
“처남 되시는 국왕께서 이교도 출신 여인을 비로 삼겠다 공표하셨을 때 남들처럼 만류하는 척하긴 했으나 속으로는 미소를 짓고 있었소. 그렇게 쭉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그건 뭐 지금도 마찬가지고, 로마냐에서 브리타냐의 지원군을 요청했을 때 역시……. 무려 성하의 개차반 차남을 딸아이와 성혼시키는 영광을 내리겠다는 뭐 같은 제안을 냉큼 받아들이는 척한 이유는 순전히 아들놈이 어떻게 나설지 짐작했기 때문이었소. 그 당시 나는 사실상, 차후 성하를 등쳐먹을 빌미는 둘째 치고 이 기회에 시건방진 아들놈 버르장머리 좀 고쳐보자 하는 심보였다고 할까.”
그거야 이미 알고 있긴 했으나 이렇게 본인 입으로 술술 털어놓으시다니 참으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아니, 게다가 아버님 말투가 원래 항상 이 모양이셨나?
어색해서 자꾸 헛나오시는 건지 그냥 심히 허심탄회한 것뿐인지 헷갈리는데.
“그렇게 부인이 우리에게 오게 된 거요. 초반까지만 해도 나는 부인을 단지……. 그건 뭐 굳이 설명 안 해도 빤히 보였겠지. 이제 와서 사실 그동안 진짜 속마음은 어땠느니 하는 헛소리는 삼가겠소. 그런 성격은 못 되기도 하고 어차피 씨알도 안 먹힐 것이니. 다만 뭐라고 할까, 부인은 늘 내 뒤통수를 치셨소.”
“……네?”
“번번이 예상 밖이셨다 이 말이오. 그러다 보니 어느 시점부턴가 왠지 모르게…… 이런 젠장, 기어이 헛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는군. 미안하외다, 잡설이 길었소. 나이가 들다 보니 툭하면 얘기가 옆으로 새는구려. 보는 눈도 흐려지고.”
“…….”
“무엇이든 본질 그대로 꿰뚫어 볼 수 있다 자신했거늘 오만한 늙은이의 오판에 불과했던 게지. 이러니 시건방진 자식새끼들이 하늘 같은 아비를 못 미더워할 만도…….”
“아버님.”
호흡을 차분히 고르며 불렀다.
막 고개를 돌리고 요란한 헛기침을 쏟아내시려는 듯하던 아버님이 바위 같은 어깨를 좀 움찔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지 마세요. 아버님은 그 누구보다도 저를 정확히 꿰뚫어 보신 몇 안 되는 분이세요.”
그렇고말고.
나는 일전에 우리가 마구간 옆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생생히 기억했다.
자기 아들에게 희망은 있는 거냐고 다그쳐왔던 아버님의 표정 또한.
알겠어. 이제 알겠어.
그저 어이없고 갑갑했던 그 당시와는 달리 이제는 모든 것이 뚜렷하게 와닿는다.
그때 오메르타 공작이 정말로 무얼 걱정했던 것인지, 식이장애 외엔 나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돌아가신 공비가 그것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 건지도,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
어떤 면으론 체시아레한테 고마워해야겠군.
이번의 그 야단법석이 없었더라면, 나는 어쩌면 영영 알을 깨고 나오지 못했을 테니까.
세월이 더 흐르고 흘러 아주 뒤늦게야 깨닫고서 후회하며 돌아봤을 때, 영원히 변치 않을 것만 같았던 사랑은 이미 보답 없는 가면에 지치고 망가져 손쓸 수 없는 애증으로 돌변해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뒤늦게 붙잡고 너무 늦은 보답을 드러내 봤자 서로 상처만 입을 뿐이었겠지.
영원할 것 같았던 만큼이나 영영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했겠지.
그렇게 폭풍 같은 애증에 함께 휩쓸리면서 광기의 거품에 갇혀 버렸겠지.
어머님은 그렇게 아프셨던 것이리라.
나의 거식증이 통제에 대해서였다면, 어쩌면 어머님은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더 작고 여렸던 소녀 시절, 붉은 눈동자가 정열과 숭배로 가득했을 한 팔라딘과 갓 만났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픈 간절한 심리에 의해…….
물론 전부 내 추측일 뿐이지만. 한데 가만 보니까 이스케랑도 그렇고 아버님이랑도 그렇고 결정적인 일은 어째 죄 마구간에서 터졌었네.
여기 마구간 터가 좋은 건가?
“저더러 죽기 살기로 발버둥 치고 있는 것 같다고 하셨잖아요. 제대로 보셨다는 거 이제 아시겠지요.”
“…….”
“이번 축제의 여러 소동 중에…… 발렌티노 추기경이 거울의 방 이전에 제게 한 짓은 저 또한 상상치도 못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필사적으로 벗어나려고 했던 건 사실이에요. 그러니 죄책감은 제 몫이기도 해요. 매번 이스를 믿지 못하고 이용하려 들었으니까. 아니, 서로에 대해 너무 늦게 깨달아 버렸다고 해야 할까요……? 결과적으로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남아버렸죠.”
“부인…….”
“저 같은 처지라면 어쩔 수 없었을 거다, 라는 변명을 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단 제가 도리어 아버님을 오해해왔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말도 안 되게 관대하고 다정하게 대해주실 줄이야, 정말로 깜짝 놀랐어요.”
“……큼, 큼.”
다소 거칠게 쏟아지는 헛기침 사이로 ‘다정은 무슨……’ 하는 중얼거림이 울렸다.
나는 그만 미소를 지었다.
진심으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서.
“그때 제게 하셨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지금 올리자면…… 이제 안심하셔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마음 놓으셔도 된다고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기나긴 침묵이 흐르는 동안 아버님은 내게서 천천히 시선을 돌리시더니만 이윽고 창밖을 실로 맹렬하게 쏘아보기 시작했다.
하도 오랫동안 미동도 없이 그러고 있어서 바다 위에 뭐가 솟아올랐나 싶어질 정도였다.
“아버님……?”
“……크흠, 좌우지간 부인의 비밀스러운 재주에 관한 부분은 당분간 우리끼리 극비리에 부치기로 했소. 그 버르장머리 글러 먹은 어린 용과 만나는 일 또한 철저한 보안 아래 이루어질 것이니 그리 아시오. 개중 어떤 정신교육 제대로 못 받은 놈이 술이라도 처마시고 딴 데서 멋대로 가벼운 주둥이를 나불댄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나 어명을 어긴 죄는 반드시 처참히 치르도록 해야겠지.”
“…….”
“참, 가장 중요한 얘기를 빼먹었군. 내 원래 이 질문을 하려고 왔던 거요. 이번 습격 사태는 비단 앙그반궁뿐만 아니라 에렌딜 곳곳을 아주 피바다로 만들어놨는데, 진정 발렌티노 추기경이 배후라면 필히 도와준 이가 있었을 거요. 아닌 게 아니라 에렌딜 신전이 보이는 그대로라 믿는다면 신이 우리를 비웃을 일이지. 하여튼 그 싸가지 없는 놈이 대체 어디서 뭐 하는 놈인지 아시는 것 있소?”
“네, 다만 아직 에렌딜에 있을지 모르겠어요. 오래전부터 그쪽 충복이었던 자거든요. 사태가 터지자마자 발렌티노 추기경과 함께 로마냐로 돌아갔을 것이 분명한데…….”
“흠, 그러지 못했을 듯하오만…….”
“네?”
“아무것도 아니오. 그럼 자세한 얘기는 내 세상천지 저 혼자 멋있는 줄 아는 아들놈과 차차 나누도록 하고, 당장은 아무 생각 말고 푹 쉬는 데만 집중하시오.”
세상천지 뭐요……?
나는 벌어진 턱을 살그머니 다물었다가, 문득 머릿속을 퍼뜩 스치고 가는 어떤 생각에 빙긋 웃었다.
“아버님?”
앙증맞은 안락의자로부터 마침내 해방되어 시원스레 걸음을 떼던 공작께서 멈칫 나를 돌아보았다.
방긋방긋 웃는 내 면상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근엄한 얼굴에 묘한 당혹감이 번졌다.
“왜 그러시오……?”
“감사해요. 여러 가지로 마음 깊이요.”
“…….”
“그런데요, 아버님. 앞으로 저를 그냥 루비라고 불러주시면 안 될까요? 말씀도 편하게 하시고요.”
아버님은 잠시 가타부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당연히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대로 기현상이리라.
다만 느리게나마 차근차근 발전해 갈 수 있다면 그것대로 좋다고 생각하는 찰나, 갑자기 무슨 성나는 일이라도 떠오른 것처럼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뚫어져라 쏘아보던 아버님이 불쑥 다음과 같이 내뱉었다.
“아, 참. 하녀장을 딴 데로 보냈소.”
“……네?”
“좀 먼 영지에 있는 친척 집으로 보냈소.”
“……어, 어째서.”
“그건 나도 모르겠소. 딸아이가 늦은 사춘기라도 온 건지 뭔지 다짜고짜 그러자고 제안하길래 그냥 알았다고 했소.”
이, 이건 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충격적인 소식이다.
하녀장을 보내버렸다고?
엘레니아의 유모이자 충심 하나는 철심같이 보였던 그 못돼먹은 하녀장을?
그것도 엘레니아가 먼저 제의해서?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변인데, 혹 무슨 일이라도 생겼던 걸까?
내게 뭔가 짐작 가는 이유가 있느냐고 물어올 거라고 생각했으나, 아버님은 단지 턱수염을 좀 긁적거리면서 마지막으로 덧붙일 뿐이었다.
“아시겠소? 자리를 털고 나면 할 일이 아주 많을 거요. 이곳의 안살림은 루비의 관할이기도 하니 말이오.”
“……어, 아버님 방금 저를.”
“그러니 푹 쉬어 두시라 이 말이오. 크흠!”
그것을 끝으로 아버님은 홀연히 떠나버리셨다.
나는 잠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혼미한 머리통을 부여잡았다.
아니, 하녀장이 왜……! 대체 어떻게……! 이건 너무 아쉽고 허무하잖아!
내 나름대로 그 못돼먹은 고약한 인간이랑 스릴 넘치는 팽팽한 머리싸움을 펼칠 계획을 꾸미고 있었거늘…… 은 물론 당연히 그녀가 알아서 사라져 버렸다니 속이 후련하긴 했다.
다만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변이라 놀랍고 당혹스러운 것뿐이었다.
대체 무슨 일을 계기로 그리 진행된 건지 조금도 짐작이 가지 않는달까.
엘레니아가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혹은 단지 복잡할 대로 복잡한 상황에서 너무 가까운 관계의 이들과 잠시 거리를 두고 싶어진 것뿐이려나……?
“마님, 새 차를 내올까요? 따로 드시고 싶은 건 없으신지요?”
로냐야 원래 그랬으니 놀랄 것도 없지만, 루실 쟤는 어째 갈수록 더 사근사근해지는 것 같은 느낌인데.
하녀장이 사라져서 기분 좋은 건가?
아예 가버린 거라 해도 아직 젊고 고작 3년 차에 불과한 루실이 새 하녀장이 될 가능성은 없을 터인데, 뭐가 저리 내켜서 시종일관 기웃기웃 방글거릴까?
나한테서 보석을 뜯어낸다는 탐욕스러운 계획은 이쯤이면 포기해야 한다는 거 아직 깨닫지 못한 건가?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닌 것 같았는데 말이지.
“있잖아, 루실.”
“네, 마님?”
“나 너한테 더 이상 아무것도 안 줄 거야.”
약간의 심술과 장난기를 반반 섞어 내뱉자 부지런히 식은 찻잔을 치우던 루실이 흠칫 이쪽을 돌아보았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 얼굴이 아주 볼만했다.
내심 찔린 듯 놀란 듯 겁에 질린 듯도 한 표정.
그 표정에 대고 나는 짐짓 삐죽거렸다.
“정해진 봉급 외엔 아무것도 안 줄 거라고. 그러니까 내 시중드는 거 그만해도 돼.”
“……무, 무슨 말씀이신지…… 쇤네는 그런 거 바라고 하는 일 아닙니다, 마님!”
“진짜?”
“…….”
“…….”
“무, 물론 주신다면 더없이 기쁜 일이나 안 그러신다고 해도 어쩔 수…….”
우리의 한 탐욕 하는 루실이 더듬거리며 양 볼을 붉혔다.
그리고 나는 잠시 대체 어째서 여기 인간들은 하나같이 이토록 한결같을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한결같은 게 꼭 나쁘지만은 않지만.
“뭐, 아주 가끔 너랑 로냐가 특별히 잘했을 때 상을 줄 수는 있겠지. 그것 말고는 기대하지 마.”
“네! 알겠습니다, 마님!”
아니나 다를까, 새침하게 못 박은 것이 무색하게도 언제 당황했냐는 듯 냉큼 활짝 웃으며 머리를 수그려 보이는 루실이었다.
거참. 변함없이 빤하구나, 빤해.
솔직해서 좋다고 해야 하니?
좀 과하게 솔직하긴 하다만 뭐 이것도 나름 정감 가긴 하구나.
싱글벙글한 루실이 가져다준 차를 마시고는 다시 까무룩 잠들었던 것 같다.
딱히 아픈 곳은 없었지만 역시 기력이 아직 달려서인지 눈만 감으면 금방금방 잠이 쏟아졌다.
지엄하신 아버님 말씀대로 자리를 털고 나면 할 일이 아주 많으니 쉴 수 있을 때 양껏 쉬어 둬야 옳겠지.
눈꺼풀을 간질이는 따스한 석양빛 덕분에 얼핏 선잠에서 깼을 때, 곁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우리 남편 녀석일까 하고 돌아보는데 아니었다.
그와 똑 닮은 아리따운 시누이였다.
거기다 혼자였다.
내가 환자 행세를 하는 동안 내내 엘레니아는 주치의 양반이나 하녀들이 나를 살필 때만 종종 문가에 슬쩍 나타나 조용히 지켜보다 사라지곤 했었다.
설령 그녀가 나를 무서워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그것보다는 단지 피차 준비가 안 된 느낌이었다.
무슨 준비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내가 멀거니 바라보는 동안 엘레니아 또한 서성거림을 멈추고는 예의 그 무표정한 모습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커튼을 젖힌 창문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온 석양빛이 우리의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미 들으셨을 테지만.”
마침내 울린 목소리는 그녀답게 차분하고 건조했다.
통 넓은 레이스 소매 아래 드러난 길쭉한 손이 오늘따라 유독 파리해 보인다.
“마르타를 다른 곳으로 보냈습니다.”
“아…….”
“루비 탓이 아니니 혹시라도 오해 마셨으면 합니다. 진작 했어야 하는 일이나…… 그간 우리 모두 주변의 누구 하나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왜 그랬느냐, 라는 바보 같은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굳이 긴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순간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냥 바라보기만 하는 나의 시선을 피하기라도 하는 듯, 눈길을 창밖 쪽으로 돌린 엘레니아가 느리게 숨을 가다듬었다.
“저는 단지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관심이 없었으니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겠지요…… 이제 보니 제가 오빠보다도 한 수 위였군요.”
슬슬 내가 감춰온 마수들과의 비밀에 대해 꺼내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것보다는 좀 다른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함께한 그 긴 시간이 무색하게도…… 더없이 우습게 들리겠지만, 그래야 언제 누가 떠나가도 괜찮을 거라 믿었던 듯합니다. 어머니처럼…… 그렇게 갑자기 가버려도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요.”
“…….”
“그랬던 저인 만큼…… 루비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을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으나…….”
무덤덤하게 이어지던 목소리가 태풍의 전조처럼 위태롭게 파르르 가라앉았다.
나는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루비, 저는…… 저는…… 미안합니다,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또, 또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미안하다는 말 말이다.
이번 일에서 그녀가 내게 미안해할 부분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여태 그저 너무 오랜만에 느끼는 온기가 싫지 않아서, 언제나 허를 찌르는 엉뚱한 소동들이 좋아져 버려서, 늘 솔직하게 보이는 모습이 부러워서…….”
“…….”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뭔가 잘못됐다는 거 알았으면서도…… 정말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은 주제에 그저 루비가 이대로 있었으면 했습니다. 무엇 하나 단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해 본 적 없는 주제에 이대로 변하지 않았으면, 절대 떠나지 않았으면 하고요.”
그랬단 말인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을 감고,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뒤돌아서면 잊어버리고…… 그러나 그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녀만 그랬던 것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 색깔만 다른 똑같은 조약돌들이었다.
더 아프기 싫어서, 더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모래성처럼 부서져 내리고 싶지 않아서 나름의 방식대로 있는 힘껏 발버둥 쳐온, 제멋대로에 서툴고 서글픈 어린아이들.
모래가 되어버리면 끝장인 줄 알았어.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거, 서로 부딪히고 부딪히다 모래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온전히 함께 섞일 수 있다는 거, 그러면 구슬픈 비가 내려도 한층 더 단단해질 수 있다는 거,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너희가 이렇게 울지 않아도 됐을 텐데.
나는 아린 목구멍으로 마른침을 넘겼다.
엘레니아는 이제 말없이 고개를 푹 수그리고 서 있었다.
석양에 붉게 물든 긴 은발이 베일처럼 쏟아져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조심스럽게 팔을 올려 축 늘어진 엘레니아의 손을 살짝 잡자 움찔, 하는 떨림이 느껴졌다.
“있잖아요, 엘렌.”
천천히 고개를 다시 바로 든 엘레니아가 어딘가 망연하게 느껴지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무슨 반응이 가장 적절할지, 이런 상황에선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을 해줘야 가장 알맞을지 이제는 감조차 잡을 수 없었으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메마른 입가를 당겨 미소를 짓고는 더듬더듬 털어놓았다.
“엘렌, 나, 셰퍼드 파이가 먹고 싶어요.”
와구와구 퍼먹을 수 있는 그 북부식 파이 말이야.
멍하게 굳어 있던 루비색 눈이 차츰차츰 휘둥그레, 커다랗게 벌어졌다.
아이쿠, 이런 표정을 보게 될 줄이야.
근데 이러니까 갑자기 되게 어려 보인다.
어쩌면 석양빛 때문일지도 모르겠어.
“엘렌도 같이 먹지 않을래요? 혼자서는 쓸쓸할 것 같거든요.”
용기를 내어 덧붙이는 찰나 일순 붉은 하늘에 별이 떠오른 듯했다.
총총 반짝이는 별빛 같은 이채가 커다래진 눈동자에 떠오르나 싶더니 이내 그녀가 입꼬리를 달싹거렸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엘레니아의 미소, 작고 희미하지만 더없이 맑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네……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