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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익숙한 감각이었다.
너무도 익숙해서 무뎌질 대로 무뎌졌다 할 수 있을 만큼.
타는 듯한 갈증도, 생살이 찢기고 뚫리는 감각도, 뼈가 부러지는 감각도, 손톱 발톱 혹은 생니가 통으로 뽑히는 감각도, 피가 빠져나가고 시야가 나갔다 돌아왔다 하고 숨쉬기조차 버거워지는 감각도 모두 다, 그 어떤 육체적 고통이라도 익숙했다.
소년 시절부터 수도 없이 겪어왔던 것이니까.
따라서 피에트로는 자신만만했다.
방심한 바람에 웬 미련하게 생겨 먹은 팔라딘 놈에게 패하여 현재 이렇게 의자에 묶여 있는 신세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피에트로는 자신만만했다.
그가 의자에 묶여 있는 이 장소는 빛 한 줌 안 들어오는 어두운 공간이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잘 훈련된 시야에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창살이 이곳이 어떤 지하 감옥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뻔하디뻔한 전개였다.
여기서 고문이라도 할 작정이겠지.
실컷 해봐라, 내 주인 이름은 절대 못 듣게 될 것이다.
그렇게 비웃음을 흘리며 피에트로는 여유롭게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잠들었다 깼다 잠들었다 깼다 하면서 되도록 정신을 맑게 유지하려고 했다.
놈들이 언제고 온다면, 언제든 틈을 타 탈출할 기회를 엿보아야 했다.
“……근데 우리 근신 중이잖아.”
“그게 왜.”
마침내, 저 멀리서부터 천천히 다가오는 불빛이 기나긴 어둠을 뚫고 나타났다.
막 선잠에서 깬 피에트로의 기민한 오감이 퍼뜩 곤두섰다.
“그래도 근신 중인데 이러고 있기는 좀…….”
“아, 이 말 엉덩이 대가리 새끼 진짜 쫄보 새끼네. 단장님이 그렇게 무섭냐?”
“지랄 마라, 지는 제일 쫄았던 주제에. 울먹이기까지 하더라 너?”
“이런 X발 내가 언제?”
동시다발적으로 울리는 여러 거친 음성들, 투박하게 다가오는 발소리들이 귀를 때린다.
제법 여러 명이 오고 있는 듯했다.
좋아, 한 명보단 여러 명이 재미있지, 뭐.
피에트로는 득의만면한 미소를 띠었다.
“우린 지금 팔라딘으로서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양심도 없는 새끼가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럼 지금 이게 뭐 하는 짓거린데?”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녹슨 쇠창살이 삐걱거리며 거칠게 밀쳐지는 굉음이 울렸다.
“그저……. 비밀 장소에 놀러 나온 친구들일 뿐이지.”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암흑 그 자체였던 사방을 환하게 물들였다.
무리의 중심에 선 은발의 남자를 보는 순간 피에트로는 저도 모르게 등을 긴장으로 굳혔다.
이 작자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안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뱀처럼 가늘고 무감한 붉은 눈과 실제로 마주하게 된 순간 어떤 지독히도 낯선 감각이 척추를 만지기 시작했다.
“야, 방금 들었냐? 저 새끼가 방금 우리더러 친구란다.”
“그냥 못 들은 걸로 치련다.”
“그런데 아이반 너 그때 내 친구 내놓으라면서 막…….”
“내가 언제 이 복면 장애 새끼야?”
무리 중에는 그 미련하게 생겨 먹은 불곰 같은 놈도 있었다.
어째서인지 다들 분위기가 쾌활하다 못해 만담을 떠들어대는 것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그러니까, 피에트로는 횃불을 든 채 멀뚱히 서서 자신을 응시하는 은발의 팔라딘에게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지독히도 거슬렸던, 찢어 죽이고 싶은 고귀한 귀족 놈에게.
그러나 그런 피에트로의 심리와는 대조적으로, 오만방자한 오메르타 공자 쪽은 그에게 그다지 흥미를 보이는 것 같지 않았다.
멀뚱히 훑어보던 것도 잠시, 무감한 시선을 무심하게 돌려버리고는 동료들을 향해 농담조로 입을 여는 것이었다.
“너 제법이네, 갈라르. 다시 봤다 야.”
“그러게, 곰탱이 새끼가 혼자 어디로 내뺀 줄 알고 실컷 비웃어주려고 했는데 의외로 감이 뛰어나다니까.”
“찬사로 해석하겠다. 그런데…….”
“그런데?”
“이제 어쩌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 놈에게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는 와중에도, 피에트로는 문득 이 새끼들은 대체 뭐 하는 것들인가 하는 기이한 의구심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역시 귀족 새끼들이라 그런가.
하긴 잘나가는 기사라 한들 곱게 자란 도련님들이 그런 쪽에 재주가 있을 리가 없었다.
왠지 더 재미있어질 것 같다는 생각에 피에트로는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살살 약 올려서 이성줄 놓는 꼴들 보는 것도 꽤 괜찮을 것 같…….
“어쩌긴 어째, 루브 네가 먼저 시작해라.”
“왜 하필 나냐?”
“이 새끼들은 의외로 감성이 섬세하잖아.”
“야! 우리 안 섬세하거든?”
“나도 섬세한데. 실은 벌레 하나 못 죽이는 감성의 소유자다.”
“너 옛날에 고문관이었다며.”
“그 고문관이 그 고문관이 아니…… 그냥 네가 시작하면 되잖아, 더럽게 뻔뻔한 새끼야. 우리 중 네가 제일 안 섬세한 거 삼위일체께서 아신다.”
“난 유부남이라 몸 사려야 한다고. 젠장 배고프군. 종일 잔소리 들었더니 허기지네.”
“이 안에 뭐 담아왔…… 오오, 역시 우리 감 뛰어난 곰탱이 술병도 가져왔어!”
“힘내라, 루브. 우린 널 믿어! 네가 시작하는 동안 우리는 먼저 좀 들고 있을 테니까!”
“개새끼들.”
대체 뭐 하는 새끼들인가 이것들은.
지극히 태평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옹기종기 바구니를 둘러싸고 앉는 꼬락서니들에 피에트로는 그만 어처구니를 상실했다.
동시에 기이한 모멸감 또한 피어올랐다.
이 상황에서 저 오만방자한 공자 새끼의 태도가 거슬려 미칠 거 같았다.
마치 신경 쓸 가치조차 없는 상대라는 듯 눈길조차 제대로 안 던지고,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유유자적한 꼬락서니가…….
저걸 어떻게 도발한다?
“네 마누라가…….”
“크으, 와씨, 좀 살 것 같다! 역시 잔소리 뒤에는 당밀주가 최고지!”
“이 샌드위치 누구 솜씨냐? 맛있네.”
“네 종자 솜씨다. 내 아우이기도 하지.”
“장가보내도 되겠군.”
득의만면하게 운을 뗀 도발은 정신 나간 귀족 놈들의 고성방가에 묻혀버렸다.
애써 스스로를 추스르며 이번엔 더 크게 으르렁대려던 피에트로는, 이내 이마를 딱 튕기는 때아닌 얼얼한 딱밤에 의해 신경을 다른 쪽으로 돌리게 되었다.
“이런, 미안. 습관이라.”
“…….”
“자자, 그럼 다소 어수선하지만 집중하자고 집중. 나도 배가 고파서.”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린 곱상한 낯짝이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었다.
그 태평한 낯짝을 쏘아보며 피에트로는 어금니를 빠드득 갈았다가, 곧 이를 드러내며 씨익 마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