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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도 때려잡는다는 롱기누스 팔라딘이 두려워하는 단 한 가지가 지상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마 굵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이를 꽉 악문 채 팔짱을 낀, 즉 ‘나 폭발 일보 직전이요!’라고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기사단장님일 것이었다.
거기에 차디찬 미소를 은은히 머금고서 좌시하고 계시는 국왕이 더해졌다면 두려움은 배로 증폭되기 충분하다.
더 나아가 은퇴하신 대선배이자 하늘 같은 단장님의 옛 전우이자 국왕의 매형이자 괴물 같은 동료 놈의 부친 되시기도 하는 분까지 더해졌다면, 공포는 이미 천공을 뚫고 올라갈 만했다.
“그래서 제군들, 이 사실을 얼마 동안 숨겨온 것이라고?”
대개 롱기누스 기사단장이 휘하 기사들을 제군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소리로 칭하는 현상은 극히 드물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러면서 손을 올려 뒤통수를 슥슥 문지르시는 거 아닌가.
가히 소름 그 자체인 형상이었다.
잘못 대답했다간 심통 난 서리용 뺨치는 무시무시한 무언가를 보게 될 것만 같다.
그 무언가가 뭔지는 모를 노릇이었지만, 아무튼 그러한 이유 탓에 누구도 감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잘못한 놈들 아무도 입을 뻥긋 안 하니 분위기는 당연히 더더욱 심각하게 으스스해졌다.
“아이반 경.”
“……예, 존경하는 단장님.”
“경은 지금 대체 뭘 잘했다고 주둥이를 삐죽거리고 있나?”
“예? 그런 적 없…….”
“어디 감히 전하의 면전에서 꼬박꼬박 버르장머리 없이 말대꾸인가! 반성은 하고 있는 거냔 말일세, 제군들!”
우르르릉 꽝!
급기야 불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이에 더는 소수정예가 아니게 될지도 모르는 소수정예들은 크게 놀라 황급히 자신들의 주둥이 길이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눈물을 머금은 비련의 꽃 같은 아이반부터 성난 불곰 같은 갈라르, 까칠한 듯 시크하게 굳어 있던 카뮤, 갑자기 안대 안쪽이 아려오는 척하는 루브와 복면을 열심히 긁어대는 에스겔까지 모두 다.
이러한 심각한 상황에서 오롯이 단 한 명, 이 모든 사태의 원흉 그 자체인 어떤 뻔뻔한 녀석만이 태평하게 동료들의 추태를 감상하기만 하고 선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재미있다는 눈빛까지 지어 보인다.
철면피도 이런 철면피가 따로 없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국왕의 사랑하는 조카 놈이자 대선배의 아들놈에게 이 새끼 저 새끼 하고 욕할 수도 없는 노릇.
괜히 지목되어 설움을 당한 아이반은 그저 원망스러운 친구 놈을 향해 눈을 있는 대로 부라려 보이는 것으로 천 마디 욕설을 대신할 따름이었다.
어째 그림이 영 그랬다.
급기야 젊은 후배들의 이러한 추태를 영 두고 못 보겠다고 판단한 대선배께서 거들고 나섰다.
오메르타 공작은 핏빛 무언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서슬 퍼런 시선은 아들놈에게, 말은 나머지 죄인들에 향하는 애매한 태도를 취하며 근엄하게 내뱉었다.
“서리용 토벌을 계획해야겠군.”
“누구 마음대로요.”
아니나 다를까.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 냉큼 입을 여는 이스케의 행각에 다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떠올렸다.
한마디로 말해 바람 빠진 뭐 같은 표정이 되어 일제히 작금의 문제아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심지어 국왕조차 스산한 미소를 지우고서 미간을 다 찡그리고 있다.
아끼던 조카 놈이 좀 컸다고 바로 면전에서 왕좌의 권위에 도전하는 태도를 취하는 마당이니 그럴 만도 했다.
“이스케 경. 경은 이 자리에서 팔라딘 망토를 벗고 싶은 모양일세.”
“마음에도 없는 말씀 삼가십시오, 전하.”
“……무슨 자신감으로 마음에도 없는 말이라 단언하는 게지?”
“바로 최근 챔피언으로서 국가의 위상을 널리 떨친 놈더러 다짜고짜 팔라딘 하지 말라고 파면시킨다면 가여운 백성들을 비롯한 다정한 이웃 나라분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참고로 소신은 안 도와드릴 겁니다. 혼신을 다해 억울해하고 땅을 치며 비통해하겠습니다.”
페아놀 왕은 ‘내 저놈과 말을 섞는 게 아니었다’ 비슷하게 들리는 한탄을 중얼거리며 관자놀이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이 우아한 압박에 오메르타 공작과 기사단장은 잠시 암울한 시선을 교환했다가, 동시에 호통을 쳤다.
“이 멍청한 놈!”
“내 경만은 믿었네, 이스케 경! 경이 어찌 내게 이럴 수가 있나? 어찌 나의 신뢰를 배신할 수가 있어?”
“지극히 송구합니다만 다름 아닌 바론스 경께서 저더러 그러라 하셨잖습니까.”
이제 담화실 안에 모인 전원의 험악한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건 바론스 경 쪽이 되었다.
뜻밖의 사태에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롱기누스의 기사단장은 능숙하게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다시 호통쳤다.
“단장님이라고 하게, 이스케 경! 그리고 내가 대체 언제 그랬나? 서리용한테 머리라도 잘못 맞은 겐가?”
“저더러 제 유리그릇처럼 예민하고 섬세한 아내가 뭘 원하는지 알아내서 다 들어주라 하셨잖습니까. 따라서 그 뭐라고 할까, 인생 선배의 충고를 따랐다고 해야겠지요.”
“……경의 섬세한 아내가 경더러 이러한 국가 중대사를 감추라 부탁하던가? 아니면 이리 뻔뻔하게 굴라고 부탁하던가?”
“말씀이 좀 과하십니다. 제 아내가 뭐하러 제게 그런 부탁을 합니까? 제 아내는 절 붙들고 이것저것 졸라대는 사랑스러운 모습이라곤 좀체 보여주지 않는 성숙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씀 마십시오. 제가 단장님의 부인을 두고 이렇다 저렇다 멋대로 평가하면 기분 좋습니까?”
이쯤이면 작정하고 느물거리는 건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건지 분간이 안 간다.
은밀하게 슬쩍 움직여 뻔뻔한 동료 놈의 재앙의 주둥아리를 틀어막으려던 참인 카뮤는, 이내 경외하는 단장님의 표정을 보고서 그냥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심히 부적절한 웃음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휘하 팔라딘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기사단장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실로 으스스하게 턱수염을 문지르면서 오메르타 공작 쪽을 돌아보았다.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린 옛 전우의 낯짝과 마주하게 된 공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또 체증이 도지셨소?”
“이게 다 공작이 아들놈 하나 제대로 못 잡아 벌어진 사단이라는 사실은 이해하고 있다 믿겠소. 창피한 줄 좀 아시라 이 말이오. 아니 그렇습니까, 전하?”
어느덧 뒷골까지 꾹꾹 누르고 계시는 국왕은 더없이 온후한 미소를 지어 보임으로써 백 마디 비난을 대신할 뿐이었다.
대놓고 아비로서의 권위가 크게 상해버린 공작은 만회의 본보기로써 아들놈을 향해 재떨이를 집어 던지는 대신에 차분히 주의를 환기했다.
즉, 화제를 돌렸다.
“무엇이 원인이었든 간에 서리용이 습격을 감행한 이상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는 노릇이다. 하마터면 각국의 중대 인사들이 변을 당할 뻔했어.”
“아무도 안 죽었습니다. 그 와중에 제일 안전하셨던 외국분들이야 지금쯤 평생 다시없을 체험이었다며 신나라 떠들고 있겠지요.”
“앙그반궁의 삼 분의 일가량이 박살이 났다. 달의 탑은 말할 것도 없고.”
“그거 안타깝군요, 제가 거기서 죽어버렸다면 지금쯤 재건꾼들 대신 드래곤 슬레이어 꿈나무들을 모집하고 계셨을 텐데.”
“이놈 새끼가 어디 감히 아비 앞에서 죽었어야 한다는 망발을 지껄이는 게야! 네 시건방진 목숨이 어디 너 혼자만의 것인 줄 아느냐? 부모가 준 목숨 귀한 줄도 모르고 눈 시퍼렇게 뜨고서 제멋대로 사지로 뛰어들질 않나, 네가 그러고도 누굴 지킬 수나 있겠느냐?! 네놈이 그러고도 애처가 행세할 자격이 있다고 봐!”
가히 전성기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오메르타 공작의 무시무시한 폭발에 찬물을 끼얹은 듯한 멍한 정적이 뒤따랐다.
그야말로 영문을 알 도리가 없는 폭발이었던 탓이다.
뭘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저 인성 파탄자 양반께서 꼴에 부성은 있는지라 인성 파탄자 아들놈이 꽥 죽어버릴까 봐 몹시 전전긍긍한 모양이라고 오해할 법한, 압도적으로 격정적인 폭발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그러한 훈훈한 오해에 사로잡히기에는 서로를 지나치게 오래 알아온 고로, 그저 귀신 들린 광자 보는 눈빛을 지을 따름이었다.
오죽하면 국왕이 친히 나서서 슬며시 질문할 정도다.
“공작, 자네 미쳤나?”
“……송구합니다, 전하.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단장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여태 그답게 과묵하게 서서 조용히 천장만 쏘아보고 있던 갈라르가 불쑥 입을 열고 나선 것은 그때였다.
다른 이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눈빛으로 제 부친을 노려보고 있던 이스케조차 돌아볼 만큼 뜻밖의 일이었다.
어딘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기사단장은 무심한 듯 기품 어린 얼굴로 이 뜻밖의 사태를 반겨주었다.
“아아, 우리 듬직한 갈라르 경. 내 안 그래도 경에게 따로 묻고 싶은 것이 있었네. 동료들이 궁에서 그 야단을 치르는 동안 혼자 슬쩍 사라져 대체 어딜 가서 뭘 하고 돌아왔는가?”
“…….”
“경들이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내 지시를 어기고 각개전투를 하는 동안 나 또한 나름대로 좀 지켜봤는데 말일세……. 나 참, 어쩐지 얼굴만 맞대면 으르렁대던 녀석들이 요즘 들어 유독 사이좋게 붙어 다닌다 싶었어. 내 평소 누누이 강조한 동료애의 참뜻을 마침내 경들이 깨달은 것이라 여기고 마냥 감격했네……. 얘기가 샜군. 아무튼 간에 내가 제일 귀애하는 우리 소수정예들께서 무슨 신만이 아실 이유로 건방을 떨어대나 싶어 좀 지켜보았는데 말일세, 글쎄 누구보다도 듬직한 의리의 기사라 여겼던 우리 갈라르 경만이 온데간데없이 행방불명이었지 뭔가. 하도 믿기지가 않아 이스케 경이 저리 미쳐 날뛰는 이유가 혹 서리용이 경을 먹어버려서가 아닌가 했네.”
“…….”
“그런데 참으로 무사태평한 모습으로 돌아와 주었으니 내 얼마나 기뻤겠는가? 자자, 대관절 그 곰 같은 덩치를 잘도 감추고 어디서 무얼 하고 온 건지 이 자리에서 허심탄회하게 보고해보게. 전하께서 지켜보고 계시지 않은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자애로운 아버지처럼 푸근하게 웃고 계시는 단장님과 대조적으로, 안 그래도 험악한 면상을 더더욱 험상궂게 일그러뜨린 채 이를 악물고 있는 갈라르의 모습은 왠지 더 건드리면 안 될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풀풀 풍겼다.
여차하면 하늘 같은 단장님에게 달려들 기세다.
“음? 어서 말해보게, 갈라르 경. 그 난리통 속에서 혼자 몰래 벌집이라도 털고 온 건 아닐 테고.”
“…….”
“왜 그렇게 있는 대로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나? 누가 보면 롱기누스의 우직한 불곰께서 당황한 줄 알겠네, 허허.”
정확한 지적이었다.
겉보기와는 달리 갈라르는 지금 나름대로 몹시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상태였다.
초조하게 번득거리는 호박색 눈이 슬며시 이 모든 사태의 원흉 쪽으로 향한다.
어떻게 좀 수습해 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스케는 그렇게 했다.
“지금 갈라르가 문제가 아닙니다, 단장님. 하필 그 순간 딱 사라진 놈이 하나 더 있지 않습니까?”
“아, 그러한가, 우리 잘나신 이스케 경? 그렇다면 그 잘난 입으로 우매한 우리를 좀 일깨워주지 않겠나?”
“발렌티노 추기경 말입니다.”
어째 씹어 뱉듯이 읊조린 이스케가 오메르타 공작 쪽을 힐끔 곁눈질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눈을 부라려 보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감히 아비더러 이래라저래라 하는 아들놈의 패륜적인 작태에 공작은 송충이 같은 눈썹을 꿈틀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한 이는 국왕이었다.
페아놀 왕은 마치 거론할 만한 가치도 없다고 주장하는 듯한 칼 같은 어조로 일렀다.
“시기가 묘하다 한들 발렌티노 추기경이 이번 사태와 관련이 있다고 단정 지을 순 없어. 아무런 증거도 없지 않은가. 섣부르게 로마냐에…….”
“물론 그렇겠지요.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이스케!”
“괜찮네, 공작. 그것보다 이스케 경, 경이 그쪽을 물고 늘어지다니 의외로군. 사랑하는 아내의 가족이지 않은가? 이 자리에서 여태 내내 경이 보인 태도를 고구해 보건대, 현재 경의 모습은 어딘가 심히 모순적인 구석이 있단 말일세.”
꽤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발렌티노 추기경의 이름이 울리자마자 곧장 표정이 굳어진 동료들이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이스케는 일순 인상을 약간 쓰더니만 이내 피식하고 비릿한 냉소를 지어 보였다.
“제 아내는 오메르타의 가족입니다, 전하. 그쪽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거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소신이야말로 의외입니다.”
국왕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소수정예들의 안색을 주의 깊게 관찰하던 기사단장도 마냥 손 놓고 지켜보기만 하던 오메르타 공작도 동시에 움찔했다.
왕 앞에서 왕비의 출신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암묵적인 금기였다.
결혼 과정에서 무수한 난관을 치르기도 한 데다 왕녀가 나고 자란 지금까지도 따라다니는 낙인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저 미친 서리용 같은 녀석이 그걸 깨버린 것도 모자라서 적반하장으로 냉기를 풀풀 뿜어대며 배신감에 가득 찬 눈을 이글이글 불태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도 사나운 기세라 왕이 방금 공자비를 어떻게 한다고 선포하기라도 한 듯한 착각이 일 지경이었다.
물론 아주 잠깐에 불과했다.
페아놀 왕은 저 잘난 줄만 아는 오만한 기사 놈들과는 달리 스스로의 모순을 되짚고 반성할 줄 아는 군주였다.
“그만두세. 짐이 말실수를 했군. 경의 아내는 오메르타의 공자비지.”
“예.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국왕은 머리가 좀 아픈 것 같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냉큼 정중하게 미소 짓는 이스케를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바론스 경이 이번엔 퍽 침착하게 나섰다.
“이스케 경, 경 지금 그거 정서불안이네. 오락가락하지 좀 말고 똑바로 대답해 보게. 로마냐 쪽에서 공자비의 비밀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어찌 확신하나?”
“알았다면 그리 무방비하게 보냈겠습니까. 본인도 전혀 몰랐는걸요. 제 아내가 무슨 거대한 음모의 한패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라도 하고 싶으신지?”
“오락가락하지 좀 말라고 방금 막 이르지 않았던가? 서리용한테 얻어맞고 후유증 온 건 이해하나 우리는 경의 적이 아니네. 공자비의 비밀은 대륙의 판도를 뒤바꿀 만한 어마어마한 일이야. 따라서 당분간은 극비리에 부치는 것이 응당 옳은 일이지만, 만일 공자비가 브리타냐의 기수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도움을 보태준다면…….”
“아하, 제 아내를 비밀 병기로 만들자 뭐 이런 겁니까? 그러면서 제 적이 아니시라고요? 단장님, 지금 제 귀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데, 그거 대체 어느 놈 머리에서 나온 얼빠진 생각입니까?”
“이 썩을 놈이…… 왜 또 멋대로 삐뚤어지는 게야! 진정 좀 하지 못해! 우린 자네 같은 시절 안 겪어본 것 같은가? 자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으나 이런 식으로 죄다 가루가 되건 말건 상관없다는 태도로 임한다면 대체 뭐가 남겠는가? 잿더미뿐인 세상을 만들고 싶은 겐가? 자네가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은 풍경이 진정 그것이냔 말일세!”
“…….”
“강요하는 게 아니네. 없애는 걸 도와주라는 것도 아니고. 자네가 무슨 마음으로 경기장에 입장했을지 전부 이해가 가. 무슨 생각으로 그 꼴을 하고서 서리용에게 달려들었는지도. 이 자리에서 이해 못 하는 사람 하나도 없다 이 말이네. 저 얼간이들 또한 이해했으니 그간 잘도 협조해온 거겠지. 알아듣겠나? 이 자리에서 자네의 적 또한 없단 말일세. 왜 우리를 원수 대하듯 대하나? 그냥 이러이러하니 도와달라 한마디만 하면 되는 것을, 대체 무슨 한이 져서 천지랑 원수진 고아 새끼처럼 혼자…….”
“단장님, 단장님. 그것이 실은 이 녀석이 차마 말 못 할 못 볼 꼴을 봐버려서 지금 속이 말이…….”
안면 거죽이 강철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뻔뻔한 인성 쓰레기 친구 놈이 갑자기 어울리지도 않게 눈을 내리깔며 풀죽은 듯한 모습을 연출한다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동하게 마련이다.
아이반이 불쑥 끼어들고 나선 것은 아마 그러한 이유 비슷한 무언가일 터였다.
사실 아이반은 자신이 뭐에 홀려서 이 자리에서 냅다 끼어들고 말았는지 본인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러자마자 당장 그 입 닥치라고 압박해오는 친구 놈의 무시무시한 시선과, 네놈은 뭔데 버르장머리 없이 끼어드냐고 다그치는 단장님의 서슬 퍼런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어버렸다.
즉시 자신의 돌발행동을 후회해 보았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이반은 그만 어깨를 부르르 움츠리고 말았다.
참으로 처연하고도 애처로워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그러한 비련의 꽃 같은 자태는 이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것이 그러니까, 제가 드리려는 말씀은…….”
바로 그 순간, 진퇴양난에 빠진 가여운 한 떨기 꽃을 구해준 이는 다름 아닌 지엄하신 대선배 오메르타 공작이었다.
공작은 여태 내내 그래왔듯 다짜고짜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서리용의 첫 출몰 이후부터 마물들에 의한 민간 습격이 절반 아래로 떨어졌다. 그것은 좋은 일이라 해야겠지.”
다들 일제히 하던 짓을 멈추고 공작을 노려보았다.
오메르타 공작은 만인의 시선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우아하게 양손을 깍지끼며 기품 있게 말을 이었다.
“어떤 싸가지 없는 놈이 수작을 부린 덕분에 궁전이 습격을 당하긴 했지만, 그것보단 모처럼 축제를 즐기던 백성들의 다른 마물들에 의한 피해가 훨씬 심각하다 해야겠지. 좌우지간 그날 달의 탑에서 본 장면은 도저히 눈을 믿을 수가 없더군. 우리 모두, 아직도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이러한 기현상은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으니……. 다만 정황을 죽 살펴본 결과 아무래도 서리용은 네가 며늘아기를 자기랑 못 만나게 한 것이라 여기고 꼭지가 돌아버렸던 듯하구나.”
“…….”
“아직 어린 용이라 그런가, 어느 정도 원숙한 성체였다면 마곡석의 유혹에 그리 쉬이 홀리지 않았을 것을. 여러 요소가 합쳐져 인내심이 바닥났던 듯해.”
“……하시고픈 말씀이 대체 뭡니까?”
“네 상관께서 조금 전에 하려던 얘기가 바로 이것이라는 말이다. 멸종 여부가 불분명했던 용을 생생하게 상대해 보았다고 다들 들뜬 것은 이해하나 바론스 경과 나는 오래전 성체용 두 마리를 함께 상대했던 경험의 소유자다. 그만큼 용의 영악함과 특수성에 대해선 너희보다 한 수 위라 할 수 있지.”
뜬금없이 자부심 흘러넘치는 어조에 다들 그저 멍한 얼굴로 듣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 와중에 오직 바론스 경만이 헛기침을 좀 하며 턱을 자부심 있게 치켜들었다.
“비록 서리용은 화염용이나 여타 개체와 비교를 불허하는 강한 종자이며, 또 인간을 상대로 그리 근본 없이 생떼를 부려대는 꼴은 처음 보았으나, 어미용 없이 혼자 롬의 굴에 처박혀 잠만 자고 자란 녀석이라는 점과 며늘아기의 특별함을 고려했을 때 당분간 지속적인 만남을 가지게 하는 것이 모두를 이롭게 하리라는 결론이다.”
분명 중간에 뭐를 건너뛴 것 같이 느껴지는 결론이었다.
이럴 거면 대체 여태 토벌 운운은 왜 했단 말인가?
그러나 이스케는 곧장 따지고 드는 대신에 자신을 예의주시하는 웃어른들의 낯짝을 하나하나 쏘아보기만 했다.
그러더니 이윽고 밭은 한숨이 울렸다.
“뭡니까, 그 득의만면하신 표정들은. 안 그래도 이미 그럴 작정이었으니 표정 관리 좀 하십시오.”
“정말인가, 이스케 경? 참으로 이리 순순히 나오기인가?”
“아내가 그러길 바라는데 제가 무슨 수로 막습니까? 게다가 요즘엔 차라리 애정 결핍 사춘기 파충류 녀석이 인간보다 믿음직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혼자 만나게 할 마음은 당연히 없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제 아내를 해칠 것 같지 않습니다. 마곡석에 홀려 미쳐 날뛰던 와중에도 보자마자 얌전해졌으니까.”
“이것 참, 공자비가 병석에 누워 있지만 않았다면 진작 그쪽과 상의할 노릇이었는데 말일세. 앞으로 자네한테 뭐 시키고 싶을 때마다 공자비에게 매달리면 되겠군.”
의외로 순순하다 못해 진솔하게마저 느껴지는 이스케의 반응에 기사단장은 어느덧 시답잖은 농담을 던질 정도로 평정과 여유를 되찾은 모양이었다.
한바탕 열띤 연설을 펼친 오메르타 공작 또한 한숨을 좀 돌리며 국왕과 나란히 쓴웃음을 교환했다.
그리고 이스케는 이 생소하기 짝이 없는 꼬락서니들이 퍽 마음에 안 든 것이 분명했다.
“그나저나 전하.”
“왜 부르는가, 팔불출 공자.”
“발렌티노 추기경은 어쩌실 겁니까. 정말로 이대로 넘어가실 겁니까?”
마침내 좀 풀어지고 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도로 경직되었다.
페아놀 왕은 또다시 두통이 인다는 표정이 되어버렸으나 그럼에도 품위 있게 대꾸했다.
“경은 늘 분위기 망치는 데 남다른 일가견이 있군.”
“모처럼 축제를 즐기던 북부의 백성들이 지옥 같은 아비규환에 휩쓸렸습니다. 상대가 누가 됐든 수상쩍은 놈은 한 명도 제하지 않고 조사해야 마땅한 일 아닙니까?”
“경이 대관절 언제부터 그리 타인에 대한 애틋한 연민을 품을 줄도 알았는지 심히 의문일세. 짐에게 군주론에 대해 연설하려는 작정이거든 그만두게. 경의 눈에는 짐이 마냥 유유자적해 보이나?”
“잘 모르겠습니다.”
“성역 없이 이번 사태의 배후를 조사하고 싶은 심정은 짐 또한 마찬가지네. 그러나 이만큼 심각한 문제일수록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법이야. 상대가 타국, 그것도 로마냐라면 더더욱! 아무런 증거도 없이 무작정 몰아붙인다면 종국에는 이쪽이 되레 몰려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어.”
일리 있는 말이긴 했다.
그럼에도 죄 많은 소수정예는 어째서인지 기묘한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마치 역시나 뻔하디뻔하다고 주장하는 듯한, 어딘가 불손한 눈빛들이다.
“막말로 평생 남부에서 나고 자란 발렌티노 추기경이 서리용의 포효를 듣고 그만 겁에 질려 도망쳐 버린 것이라면 어쩔 텐가? 대관절 경이 왜 자꾸 그쪽을 끈질기고 붙들고 늘어지는지 모르겠군. 마곡석이야 암시장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는 사실 다들 알지 않는가? 더군다나 공자비와 실제로도 매우 우애 깊어 보이던데 그런 짓을 꾸밀 이유가 전혀 없다고 보네.”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네, 이스케 경. 일단 자네가 무슨 이유로 갑자기 발렌티노 추기경을 원수 대하듯 의심하는지 그것부터 말하는 것이 옳은 순서일 듯한데. 공작은 뭐 아시는 것 없소?”
“…….”
“공작? 또 기면증 도지셨소?”
보르히아 가문의 악명이야 모르는 이가 없다고 하나, 사태가 벌어졌을 당시 궁 안에는 교황이 사랑한다 알려진 여식뿐만 아니라 여타 교황청 인사들까지 있었다.
타국 귀빈들 또한 마찬가지로 보르히아의 동맹과 앙숙이 아무렇게나 섞여 있는 상황이었다.
일반적인 시선으로는 철저함과 교활함으로 악명 높은 발렌티노 추기경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멍청한 짓을 저지를 리가 없다고 보는 것이 당연했다.
아끼는 누이가 위험에 빠질 일이라면 더더욱.
이스케는 잠시 갈라르와 빠른 시선을 교환하고는 다시금 순순한 태도를 취해 보였다.
“그냥 사적인 감정일 뿐입니다, 단장님. 그렇다면 전하, 상대가 누구든 명백한 증거가 나온다면 그때는 성역 없이 나서시겠다 이 말씀입니까?”
“당연한 질문을 하는군. 이쯤이면 경이 평소에 짐을 어찌 생각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네.”
“하해와 같은 은혜에 늘 감복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잘 알겠습니다.”
그것으로 마침내 드디어 기나긴 담화 아닌 담화에 종지부가 찍힌 듯했다.
국왕은 한 손을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고, 오메르타 공작은 여태 아무것도 적지 않았으면서 내내 굴리고만 있던 펜대를 한쪽으로 밀었다.
최소 근신 처벌이라도 각오하고 있었던 용맹한 소수정예 팔라딘들은 잔뜩 뭉친 어깨의 긴장을 슬그머니 풀기 시작했다.
어딘가 신중한 눈빛으로 옛 전우를 한 번.
그 전우 놈의 아들놈이자 자신이 각별히 아끼는 수하 놈을 한 번.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잘도 쏙 빠져나간 불곰 수하 놈을 한 번씩 살피던 롱기누스 기사단장께서 갑자기 뭐가 생각났다는 기세로 불쑥 내뱉기까지는 그랬다.
“아, 경들은 전부 근신이네.”
“…….”
“그리고 이건 내 지극히 개인적인 의문인데 말일세, 그때 그 포포리와 그리핀은 대체 뭐 하는 놈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