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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하얀 빛이 내게 다가오는 듯한 느낌과 함께 눈이 뜨였다.
제일 먼저 느껴진 감각은 머리가 온통 무겁다는 느낌이었다.
손을 움직여 보려 했으나 기운 하나 없는 듯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잘 되지 않았다.
여긴 어디지……?
내가 왜 이러고 누워 있는 걸까?
마지막에 무슨 일이 벌어졌더라……?
집 나갔던 의식이 천천히 뇌리에 스며들면서 기억이 차츰차츰 되살아났다.
모여드는 기억의 파편들을 더듬다가 문득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내 머리 아래 팔을 밀어 넣은 채 누워 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가 무사하며, 이렇게 멀쩡해 보이는 모습으로 내 옆에 드러누워 있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뻐해야 마땅하거늘 어찌 된 셈인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리깐 붉은 눈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슬퍼 보인다.
힘없는 손을 애써 꾸물꾸물 움직여 그의 흐트러진 앞머리에 대보려고 했다.
“왜 말 안 했어……?”
잔뜩 가라앉고 잠긴 목소리.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여느 때였다면 눈 뜨자마자 처음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냐 싶었겠으나, 지금은 딱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그런 기분.
여태까지의 일도, 내 전생의 일도 모두 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무덤덤하게 입을 여는 내 목소리 또한 그 못지않게 낮고 잠겨 있었다.
“그러면 당신도 변할 줄 알았거든요.”
“왜?”
“가진 거라곤 환상뿐이니까. 환상이 깨지고 나면 다들 그랬으니까요.”
아주 오래전부터 반복된 역사라고 할까.
내가 아시안답게 타고난 수학 천재가 아니었던 것에 내 양부모가 어찌나 실망을 표했던지.
“항상 그랬어……?”
“항상 그랬죠.”
“주변 인간들이 다 장님이고 바보였나?”
“그렇다기보다는…… 안 그래도 이미 충분히 미움받고 있는 처지잖아요.”
하고 저릿한 손가락 끝으로 그의 눈가를 꾹 눌렀다.
그렇게 장난을 쳐보아도 이스케는 여전한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팔베개하지 않은 쪽 팔로 나를 안아줄 수 있으면서도 꼼짝도 하지 않고서 말이다.
그래서 내가 대신 움직여 팔을 그의 몸에 얹으며 너른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머리가 왜 이렇게 무거운지 모르겠다.
무슨 꿈을 꾼 것도 같은데 전혀 기억이 안 나.
“이스,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요. 당신 잘못이 아니니까. 언제나 모든 게 당신에 대한 것만은 아니라고요.”
이 왕자병 환자야.
짐짓 장난스럽게 덧붙이는 찰나 이스케가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장님도 바보도 아니야……. 어느 정도 대충 눈치는 채고 있었어.”
“우리가 부부가 된 그날 밤에요?”
“아니. 그전부터.”
“정말? 그럼 언제부터요?”
“마구간.”
그의 손이 내 푸석거리는 머리카락을 하릴없이 만지작거렸다.
그랬구나, 그런 거구나…….
“제가 그렇게 빤히 드러나는 사람인가요?”
“응. 몰랐어?”
“전혀 몰랐어요.”
“엄청 빤히 보이는데.”
“놀리지 마세요. 그렇게 빤히 잘 보였으면 왜 그동안 아무것도 캐묻지 않았대요?”
“그러면 네가 나를 떠날 것 같아서.”
숨이 멈춰졌다.
휘둥그레 치뜬 눈으로 올려다보니, 이스케는 어느덧 한쪽 팔을 접어 손등을 눈언저리에 두고 있었다.
마치 표정을 가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네가 꽁꽁 감추려 그렇게 기를 쓰고 있는 걸 내가 파고들려고 하면…….”
“…….”
“그러면 네가 나를 좋아하는 척을 멈추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았어.”
“…….”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아무튼 그래서 그냥 조용히 혼자 알아보려고 했어. 딱히 무슨 수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번 축제 때는 확실히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발렌티노 추기경을 만나고 나면.”
“…….”
“그런데 네가 그놈 옆에서만큼은 더 이상 빤히 보이지가 않더라.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어. 불안해하지도 뭔가를 감추려 애쓰지도 않는, 그냥 평범하게 웃는 여자.”
나는 바보처럼 벌어진 입을 가까스로 닫았다.
아니, 그러니까 예전엔 좋아하는 척했던 건 사실이긴 한데 말이야…….
이제는 사실이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내 뭐 같은 연기력이 체시아레 놈 앞에서 유독 하늘을 찔러댄 건 아주 당연할 수밖에 없다고!
왜냐하면 전생에서도 그놈이랑 꼭 같은 오빠 놈을 죽을 때까지 내내 상대해 왔으니까.
너 같은 놈이 진짜 처음이란 말이야.
“내가…… 이스,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척한다고요?”
이스케는 여전히 얼굴을 가린 손을 치우지 않았다.
내가 상체를 슬그머니 일으켜 앉을 무렵 쓰라린 한숨이 울렸다.
“처음부터 날 두려워했잖아.”
“처음부터……? 아니, 그거야 꼭두새벽부터 그런…….”
“그런 의미가 아니야. 너는 언제나 나를 무슨 사신이라도 되는 것 같은 눈으로 바라봤어. 네 남편 명색이 팔라딘이라고. 공포와 호감도 식별 못 하는 얼간이는 못 돼.”
그야 네가 나한테는 진짜 사신 맞았으니까 그랬지, 이 주인공 놈아!
게다가 너 무서운 건 만인이 만장일치로 동의할 사안이라고!
아이고, 이걸 전부 말할 수도 없고 미치겠네.
“그러니까…… 얼간이는 아니라서 그렇게 생각했다는 거예요?”
“아니, 그래 봤자 역시 얼간이 맞았어.”
“네?”
“네가 나를 떠나는 게 싫어서 멍청한 욕심을 부렸잖아. 네가 숨으려 들더라도 전부 알아내야 했는데.”
“…….”
“그놈이 있으니까 네가 평범하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생각까지 했어. 진짜 엉망진창이지. 어리석은 풋내기처럼 들떠서는……. 결국에는 네가 그 꼴을 당하기까지…….”
마르고 버석한 음성이 갈라지고 바스러졌다.
주먹을 꽉 움켜쥔 손등 위로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는 내 손을 그의 손 위에 살며시 얹었다.
아아, 이 바보 같으니…….
아니, 바보는 바로 나였다.
천생연분이 따로 없네.
“그러지 말아요. 당신은 나한테 영광의 꽃을 줬잖아요. 내가 당신을 속였는데도, 오해할 만한 상황 전부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랬잖아요.”
그렇고말고.
그건 그냥 단순한 승리의 전리품이 아니었다.
그가 경기에 참가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부터 여태 거쳐온 그 모든 일까지, 그 황금 화관에는 아주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나를 진심으로 원하는 일은 절대 없다고 믿어왔어요. 그리고 좋은 일이 생기면 반드시 그만큼 나쁜 일이 뒤따를 거라고. 평생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연극하는 기분으로 살았다면 믿어져요?”
말을 하는데 혀가 저절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머리로 생각하고 말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것들이 가슴속에서부터 멋대로 흘러나오는 그런 느낌.
“항상 의심하고, 편견으로 가득하고, 오해가 생기면 풀 엄두도 안 들고, 누구도 믿지 않는 주제에 남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믿고,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면서도 전부 어떻게 되든 나 혼자만 살아남으면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기적이죠.”
“…….”
“진짜 엉망진창은 나예요, 이스. 당신이 나를 위해 증명한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도 당신을 믿지 못했어. 결과적으로 당신을 상처입혀 버렸어요.”
그가 마침내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고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기분 탓일까, 뱀처럼 가늘고 날카로운 눈에 물기가 어려 있는 것 같았다.
그 물기가 내 눈으로도 옮겨왔다.
“나는…… 네가 진심으로 웃는 걸 보고 싶었어.”
“이스…….”
“네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그때는 더는 울면서 웃지 않을 거라고 믿으면서…….”
투박한 손바닥이 내 뺨을 쓸었다.
내가 양손으로 그의 팔을 꼭 붙들고 도로 기대어 눕는 동안 저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갈라지고 터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난 내가 만든 알껍데기에 갇혀 있던 거예요. 그걸 깨줄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뿐이었어.”
“…….”
“나는……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자기 부인들을 전부 죽인 동화 속 악당이 빛나는 기사님하고 같은 사람이라 믿어왔어요. 누구든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
“사실은 그렇지만은 않다는 거, 그러니 이제 그만 껍데기를 깨고 나와야 한다는 거 깨닫게 해준 사람이 당신이에요. 당신은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해줬어. 그리고 다시 태어난 나는 진심으로 당신을 원해요. 각인해 버린 셈이니까 이제 당신이 나한테 질려도 어쩔 수 없는 줄 아세요.”
이마가 맞닿으면서 그의 팔이 천천히 내 몸을 감쌌다.
주저하듯이 조심스러운 동작이었으나 따스하고 안전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는 그제야 내가 두 번 다시 이 팔에 안기지 못하게 될까 봐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어떡하지, 이제야말로 진짜 병아리가 되어버렸어.
내 입으로 말해버렸으니 빼도 박도 못하겠네…….
더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서로 바짝 껴안고 누워서 바라보기만 했다.
눈꺼풀이 다시 무거워지고 몸이 다시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질 때까지 내내, 하염없이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