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136)

Chapter 9 성장통 (1)

‘우흐흐흑…….’

어딘가 귀에 익은 흐느낌 소리가 아득하게 울린다.

설마 또 밴시의 울음소리일까.

애초에 밴시가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목소리가 좀 다른 것도 같은데.

‘흐흐흑…….’

‘작작 좀 하시지.’

아아,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뿐인가.

왠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어둑한 방의 풍경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쌌다.

그러고는 발코니 커튼을 붙든 채 처연하게 흐느끼고 있는 한 여자와, 그 여자에게 다가서며 으르렁대는 한 남자의 형체가 보였다.

이 두 조합 전에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맞아, 예전에 이런 비슷한 꿈을 꿨던 것 같아.

그래, 그때 저 여자는 여기랑은 다른 곳에서 이상하게 웃고 있었고 남자는…….

지금보다 더 화나 있었던 것 같은데.

‘흐흑…….’

‘그 망할 연기는 이제 좀 집어치울 때도 되지 않았나?’

‘……훌쩍, 안 집어치우면 어쩔 건데?’

‘환장하겠군.’

‘후우, 이런 망할, 역시 안 통하네. 넌 진짜 재수 없어. 그거 알고는 있지?’

처연해 보이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손등으로 눈물을 짜증스레 훔치며 비아냥대는 여자의 행태는 그야말로 매 순간 변신하는 배우 같았다.

그와 반대로 남자는 한결같이 머리 꼭대기까지 분노한 것처럼 보인다.

‘궁중연회를 난투극으로 만들어놓고 잘도 뻔뻔하게 떠드시네.’

‘그 촌년이 먼저 실실대면서 시비 거는데 어쩌라고?’

‘안부 물어본 게 시비냐? 왜 온 세상이랑 머리채 붙들고 싸우지 않고?’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던 주제에 뭘 아니? 네 동생 년이야 또 친구랍시고 그년 편들었겠지. 나 참, 끼리끼리 논다더니.’

‘입조심-’

‘아, 별것도 아닌 걸로 호들갑 좀 떨지 마. 그리고 입조심 안 하면 어쩔 건데, 때리기라도 하시게? 때리지도 못하는 주제에.’

여자 쪽이 슬슬 걱정되기 시작한다.

이 상황만 놓고 보면 여자는 말 그대로 남자의 성질머리를 있는 대로 박박 긁어대고 있었다.

이미 잔뜩 열 받아 있는 상대를 일부러 더 자극하는 것 같다고 할까.

잠깐 으스스한 침묵이 스치나 싶더니 이내 살기등등하게 여자를 노려보고 있던 남자가 다시 으르렁거렸다.

‘나쁜 년.’

‘넌 지지리도 나쁜 새끼거든?’

‘참 잘났다 너.’

‘알면 영광인 줄 아시지.’

‘영광? 너랑 결혼해서?’

‘뭐 불만이라도 있으셔? 있으면 말해봐, 이름뿐인 남편 씨.’

‘네 존재 자체가 불만이다.’

‘나도 네 존재 자체가 불만이야 이 재수 없는 꽃돌아!’

분명 부부싸움을 하고 있거늘 분위기가 어째 묘했다.

둘이 정나미 뚝뚝 떨어지는 기세로 똑같이 으르렁대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고 할까.

누구 한쪽이 홱 돌아서 버릴 기세이면서도 둘 사이의 거리는 되레 점점 더 좁혀지고 있었다.

급기야 바로 코앞까지 바짝 가까워졌다.

‘꽃돌이라니 외모는 만족스러운가 보네.’

‘그냥 해본 소리니까 착각하지 말지? 내 고향엔 너보다 훨씬 잘난 놈들 널리고 널렸거든?’

‘그럼 여기서 뭐 하냐? 어서 거기로 안 돌아가고.’

‘……싸가지 없는 새끼.’

‘부부는 닮는다지. 내일 궁에 가서 형식적인 사과라도 올려.’

‘그럼 너도 그 멍청한 경기 참가하지 마.’

‘안 돼.’

‘그럼 나도 싫어.’

날카롭게 팩 쏘아붙인 여자가 다음으로 움직였다.

불쑥 팔을 올려 남자의 목덜미를 붙들더니 홱 끌어당긴 것이다.

여자의 거의 두 배 가까운 몸집의 남자는 신기하게도 순순히 이끌려 갔다.

금방이라도 덤벼들 듯 싸울 땐 언제고 갑자기 대관절 무슨 불꽃이 일어난 건지.

실로 정열적인 기세로 서로에게 엉겨 붙는 풍경을 앞에 둔 채 나는 잠시 여긴 어디고 저들은 누구이며 나는 누구인가 하는 존재론적인 고민에 빠져들었다.

남자의 팔에 번쩍 안겨서 열정적인 키스를 퍼붓던 여자가 멍하게 서 있는 내 쪽을 힐끔 돌아본 것은 그때였다.

그녀가 나를 보는 거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이 나오는 꿈에서 나는 그저 관객 같은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여자가 나를 향해 생긋하고 뜻 모를 미소를 지어 보인 순간, 늘 어둑하게 가려져 보이지 않던 얼굴이 달빛이라도 쏠린 듯 희뿌옇게 비친 그 순간 나는 그야말로 경악하고 충격을 받고 말았다.

아니…… 저건 바로 나잖아?!

바로 나, 루드베키아 데 보르히아잖아?

그렇다면 저 남자는…….

남자의 얼굴도 확인하기 위해 움직이려 했으나 이 구석 자리에 발이 묶인 듯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눈앞의 풍경이 서서히 멀어져 가면서 하얀 안개에 휩싸이는 것처럼 지워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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