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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온통 무너져 내리고 뒤죽박죽으로 얽히고 얼어붙은 난리통이라 접근하기 힘들었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기에 더 힘들었으나 그리핀과 포포가 보인 덕에 그쪽 방향을 따라 얼음 더미를 기어올랐다.
사방이 온통 겨울 왕국 그 자체였다.
있는 힘 없는 힘 전부 쥐어짜 내서 얼음 더미를 오르고, 그 위로 부서져 처박힌 건지 솟은 건지 모를 얼어붙은 건물의 외벽 계단을 한참 따라가 돌자 아, 비로소 풍경이 제대로 보였다.
저 바로 밑에서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용 새끼와, 그 발밑에 깔려 있는 이스케가.
어쩐지 아까 경기장에서의 그 장면과 너무도 닮았다.
마치 예지였던 것처럼.
내 전신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만해!”
온 힘을 다해 고함을 질렀다.
빌어먹게도 꽉 잠긴 목소리가 너무 작게 울린 듯했지만, 신이 이번만큼은 나를 도운 건지 아니면 주인공을 위해서인지 용 새끼가 주둥이를 벌리다 말고 멈칫했다.
“이 나쁜…….”
숨이 가빠와 힘껏 몰아쉬었다.
별안간 눈두덩이가 시큰시큰 아려왔다.
이 나쁜 놈. 나쁜 놈들. 진짜 나쁜 놈들.
“포, 포, 포!”
흐릿한 시야 사이로 우리의 포포가 양팔을 팔딱이며 내 쪽을 향해 통통 튀어 올라왔다.
만신창이인 꼴을 한 채 포포리에게 안겨서 아수라장을 향해 뛰어내리는 나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찌 비칠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날개를 느릿하게 펄럭거리며 우리를 좌시하던 그리핀이 천천히 부리를 돌렸다.
정확히는 머리를 돌려서 용 새끼를 힐끔 쳐다보았다.
못돼 처먹은 용 새끼는 아까 그 모습 그대로 주둥이를 어정쩡하게 벌린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포포의 팔에서 뛰어내림과 동시에 거대한 주둥아리가 콱 닫혔다.
“비켜.”
“크릉…….”
콧김을 씩씩 내뿜어대며 수그린 몸을 바로 세우는 용 새끼의 흉포한 금빛 눈동자에 불만인지 원망인지 모를 표정이 어렸다.
적반하장이 따로 없을 노릇이었다.
“어서 비키란…….”
“캬오오오오오!”
“……침 튀잖아, 바보야!”
머리카락이 마구 뒤로 흩날리면서 대왕 침방울이 얼굴을 때려대는 통에 짜증이 왈칵 솟았다.
축축한 뺨을 대충 문지르고는 무작정 달려들었다.
“이스!”
이스케는 눈가루에 뒤덮인 얼음 더미 위에 처박혀 누워 있었다.
두 눈은 맥없이 감겨 있었고, 창백한 얼굴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떨리는 손을 그의 뺨에 갖다 대자마자 심장이 철렁했다.
맙소사, 이렇게나 차갑다니.
“이스, 이스! 눈 좀 떠봐요, 여보……!”
행여나 죽은 게 아닐까 기겁한 것이 무색하게도 괜히 주인공이 아닌 듯, 우리의 주인공께서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차양처럼 긴 은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나 싶더니 아름다운 루비색 시선이 내 엉망진창인 얼굴을 멀거니 노려보았다.
나는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
“여보, 괜찮아요?”
“…….”
“히끅,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지 말아요. 어쩔 수 없었다고요, 당신이 죽어버릴까 봐…….”
“…….”
“화내지 좀 말라고요! 지금 화내면 혈압 올라서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고, 히끅, 이렇게 멋대로 죽어버리면 나는 어떻게 살라고! 누구 없이는 살기 싫다는 생각 든 건 당신이 처음이란 말이야! 진짜 처음으로 가지고 싶어졌다고! 당신뿐이란 말이야!”
내가 대체 뭔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건지 나도 모르겠다.
이 광기 그 자체인 것들한테 옮은 걸지도 모르겠어.
헉헉거리며 아린 눈가를 문지르는데 나를 잡아먹을 기세로 쏘아보고만 있던 남편 놈이 마침내 입술을 달싹였다.
“……이 나쁜 여자야. 그 말 좀 들어보자고 죽을 지경까지 오게 만드냐.”
나는 잠시 멍하게 굳었다.
그러다 별안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나왔다.
그때 양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용 새끼가 또다시 쩌렁쩌렁 목청을 자랑했다.
“캬오오오오오오오!”
이미 난파선 꼴이 난 일대가 우릉우릉 진동하면서 파편들이 떨어져 내렸다.
양팔로 용 새끼의 다리를 팡팡 때리던 포포가 저만치 날아갔다.
느릿하게 주변을 맴돌던 그리핀이 쏜살같이 달려들어 포포를 낚아챘다.
그러면서 어쩐지 의기양양해 보이는 기세로 내 쪽을 쳐다보았다.
“그만 뚝 해, 바보야!”
이미 손상당할 대로 손상당한 인간들의 청력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던 울부짖음이 뚝 멎었다.
용 새끼는 이제 당장에라도 나를 도륙 낼 기세로 콧김을 식식 뿜어대며 내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이스케가 살아 있음을 확인해서인지 그제야 한발 늦게 저 녀석의 폭주가 좀 무서워졌으나 꾹 참고 마주 노려보았다.
“……나도 너네 보러 가고 싶었어.”
“크릉, 크르르릉…….”
“하지만 내가 널 만나러 가서, 네가 숨어 있던 곳에서 나오면 네가 위험해질 수 있었다고. 이 사람 잘못이 아니야.”
“크릉…….”
“그래서 참고 있었던 거야. 이…… 축제만 끝나면 만나러 가려고 했어. 정말이야.”
알아듣기나 하는지 모를 일이었으나 아무튼 힘주어 내뱉었다.
잠깐 으스스한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못돼먹은 용 새끼는 나름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기세로 거대한 눈알을 몇 번인가 굴리더니, 갑자기 접어두었던 한쪽 날개를 세차게 펄럭거리며 다시 울부짖었다.
“캬오오, 캬오!”
“……그래, 다쳤구나. 미안해, 다음부터 못 그렇게 할게. 그렇지만 너도 이 사람들 더 다치게 하면 안 돼.”
“크르르릉……!”
마지막으로 섬뜩하게 그르렁거린 용 새끼가 다시 날개를 접고는 천천히 바닥에 배를 깔고 앉았다.
그러고는 콧김을 팽 내뿜으며 거대한 머리를 저쪽으로 팩 돌렸다.
왠지 새침하게 느껴지는 모양새였다.
비로소 찾아온 고요가 이상하게 귀를 더 아프게 만드는 듯했다.
눈을 돌려 반대편을 바라보니, 친애하는 북부의 기사들은 그저 못 박힌 듯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모습이었다.
그 너머, 일대 주변에 모인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엘레니아와 아버님이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차갑고 투박한 손이 내 팔에 얹히는 바람에 나는 시선을 돌렸다.
내 팔을 붙든 이스케의 손은 힘이 빠지고 약해져 있었으나 동시에 결연했다.
그의 눈 또한 마찬가지였다.
“괜찮다.”
“…….”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
괜찮기는 뭐가 괜찮단 말인가. 이 꼴을 한 주제에 잘도 말한다. 자기 걱정이나 할 것이지…….
“울지 마.”
“……안 울거든요.”
팔을 붙든 손이 내 뺨으로 옮겨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나는 그만 그대로 무너져 내려서 남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의 몸은 으스러진 갑옷과 피로 엉망이었으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뒤쪽에서 머뭇머뭇 다가오는 발걸음들이 느껴졌다.
그것을 끝으로 암흑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