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아이반!”
속속히 합류해 오는 동료들의 등장에도 아이반은 안심할 겨를이 없었다.
거대한 꼬리가 곧장 그들 쪽을 덮쳐오며 콰지직 하고 요란하게 내리찍었다.
이미 금이 쭉쭉 간 돌바닥이 쩍쩍 갈라지면서 돌덩이들과 물이 사방으로 솟아올라 튀었다. 앞다투어 달려온 기사들 또한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그러나 아이반은 그 와중에도 온전히 단 한 사람만 염려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 중이었다.
“이 X발, 싸가지 없는 파충류 새끼가! 야, 이스케! 너 뒈졌냐?!”
“떽떽거리지 좀 말라고.”
아직 안 뒈졌나 보다. 박살 나 부서져 내린 돌벽 더미 위에 착지하고 선 이스케가 으스스하게 발광하는 핏빛 눈동자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저 새끼 과도 흥분기에 들어버렸지.
아이반은 그만 이를 꽉 악물었다.
죽지 않을 만큼만 두들겨 패준다더니 꽤 고전하고 있는 주제에, 이미 경기장에서 기력을 소진할 대로 소진해 평소 같은 상태도 아닌 주제에 과도 흥분기로 접어들기까지 하는 친구 놈을 지켜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이건 죽이기 위한 싸움도 아니다.
차라리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보다 쉬웠을지도 몰랐다.
그들 모두 과도흥분기에 돌입하고서 서리용에게 덤벼드는 일이 가능했다면, 동료들 모두 함께 너 죽고 나 죽자 하는 맛 간 상태가 되어 미쳐 날뛰는 용을 상대할 수 있었다면.
아이반은 정말로 차라리 그것을 장려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랬다간 저 정신 줄 놓은 도마뱀 새끼과 쌍벽을 이루는 상태의 이스케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X발, 병X 새끼, 저딴 걸 지 마누라 친구라고…….”
“아이반, 우리도 어서……!”
“뭔 개소리야, 이 아가리 터진 머저리 등신 새끼야! 또 누가 올지 모르는데 우리 전부 미쳐 날뛰다가 사이좋게 대학살 펼치자 뭐 이딴 거냐?! 아오! 하여간 이 새끼들은 왜 하나같이 대가리 굴릴 줄을 모르지?! 평소에 공부 좀 하라고, 무식한 검잡이 새끼들아!”
이 뜻밖의 폭언에 누구 하나 따지고 들지 못했다. 순전히 그럴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크롸아아아아!”
탑을 둘러싼 층계와 주변 건물 지붕들을 마구잡이로 부수며 한바탕 몸을 흔든 서리용이 그들 쪽을 향해 시커먼 아가리를 벌렸다.
무시무시한 냉기와 성검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쉴드가 충돌하면서 굴절된 냉기 폭풍이 사방팔방으로 퍼졌다.
일대가 온통 꽝꽝 얼어붙은 겨울 성이 되었음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돌 더미 위에 있던 은발의 기사가 허공으로 뛰어올라 냉기를 내뿜는 중인 서리용의 머리 위로 착지했다.
그야말로 미친 행위였다.
두말할 것 없이 미친 행위라 아예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내 마누라가 네놈하고 같이 있고 싶다고 했다고!”
듣도 보도 못한 괴상망측한 소릴 외쳐대며 자신의 면상을 검 등으로 사정없이 두들겨 패는 인간의 건방진 행위에, 서리용은 너무 의외의 공격이라 그런지 아니면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어서인지 몇 초간 그대로 처맞고만 있다가 당연히 대로했다.
“크롸아아아아아!”
천지가 갈라지고 터지는 듯했다.
서리용이 이스케를 떨구려 발버둥 치는 사이 아이반은 간신히 쉴드를 유지 중인 동료들을 다그쳐 곧장 달려들었다.
어차피 죽이지만 않으면 되니 검 좀 몇 번 쑤셔도 상관없을 일이었다.
애초에 그딴 걸로 죽을 생물도 아니고, 검기를 그렇게나 먹였는데 여전히 저리 기운 넘치는 것이다.
“크롸아아아, 크르르르르!”
사방에서 푹푹 찔러대는 것이 영 따가웠는지 다음 순간 서리용이 펄쩍 날아올랐다.
거대한 날갯죽지를 찢으려 애쓰고 있던 팔라딘 몇몇이 주르륵 떨어져 나갔다.
“크롸아아아아아아아아아!”
두꺼운 얼음으로 뒤덮였던 달의 탑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서리용은 마치 약 올리듯이 혹은 화풀이하듯이 떠올라 탑을 부수면서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냉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아래에서 마구잡이로 날려 보낸 신성한 검기들이 토네이도 같은 냉기와 충돌하면서 얼어붙은 눈물이 되었다.
“야, 이스케!”
먼지와 건물 파편들, 번쩍이는 검기들과 얼음 폭풍과 가루처럼 쏟아져 내리는 눈 등등 덕에 도무지 시야를 제대로 확보할 수가 없었으나 아이반은 이스케라는 이름의 미친놈을 찾아냈다.
그 미친놈은 아직까지도 잘도 서리용에게 들러붙어 있었다.
정확히는 서리용의 등짝, 촘촘한 비늘들 틈에 검을 반쯤 박아넣은 채 붙들고 있었다.
다음 순간 서리용이 아무 전조도 없이 하강했다.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바닥을 향해 돌진하며 회전했다.
쿠콰쾅, 콰지지지직!
끔찍한 파열음이 천공을 뚫고 저 너머 계시는 조상님들에게까지 메아리치는 듯했다. 그러고는 잠시 훅 하고 더없이 불길한 고요가 찾아왔다.
“……야, 야, 인마.”
누군가가 자신의 복부를 짓누르고 있는 돌 더미를 치우는 느낌에 아이반은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야수 곰탱이 갈라르나 카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늘 데면데면한 사이인 루브였다.
한쪽을 안대로 가린 단안경이 스산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어깨 너머로 아이반은 그 모습을 보았다.
더는 바닥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바닥에 착지하고 앉은 서리용은 더는 포효하지도, 으르렁대지도 않고 있었다.
아무 소리 없이, 마치 사냥감을 붙든 고양잇과 맹수처럼 몸 앞쪽을 약간 숙인 채 귀와 날개를 납작 붙인 자세로 앞발 아래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거대한 몸을 뒤덮은 푸른 비늘들이 출렁이면서 서로 짝 맞부딪혔다.
그 소리가 여태까지의 그 무엇보다도 더한 전율을 일으켰다.
그랬다. 서리용이 한쪽 발로 울퉁불퉁 솟은 얼음 위에 짓누르고 있는 사냥감은 다름 아닌 이스케였다.
꼭 두 번째였다.
오늘 하루 안에 두 번째.
첫 번째는 경기장의 언데드용의 앞발에, 이제 두 번째로 서리용의 앞발에 완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짓눌리고 있는 것이었다.
거대한 금빛 눈동자에 순수한 살기가 불꽃처럼 자글거렸다.
그 눈을 마주 보고 깔린 붉은 눈동자의 기사가 콜록거리면서 짙은 선혈을 토했다.
“아프다, 운 더럽게 좋은 새끼야…….”
“……크르…….”
“대체 뭘 했길래 내 마누라가 널…… 쿨럭! 짜증 나는 새끼.”
다음 순간, 물끄러미 이스케를 쏘아보고만 있던 서리용이 천천히 주둥이를 벌리기 시작했다.
죽는다.
퍼뜩 이는 전율에 아이반은 몸을 튕겨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루브가 그를 밀치며 나섰다.
“저 새끼가 무슨 생각인지는 이해하겠는데 난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다.”
“아니, 그건 나도…….”
“피요오오오오오오오오-”
머리 위에서 또 다른 굉음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전혀 예기치 못한, 때아닌 거대한 맹금류가 나타나 울부짖는 듯한 소리.
그것에 신경 쓸 겨를 따위 없었다.
아이반과 루브를 비롯한 팔라딘들이 일순 일제히 고개를 들어 위를 본 것은 순전히 살기등등한 서리용이 불쑥 이스케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위로 목을 꺾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한마음 한뜻으로 나란히 하늘을 올려다본 그들은 머지않아 비현실적이다 못해 황당무계 그 자체인 풍경을 보게 되었다.
울음소리 탓에 그리핀이나 뭐 그런 유의 마수일 거라고는 당연히 짐작했었다.
그러니까 눈 쏟아지는 천공을 가르며 강림하시는 성령처럼 힘차게 비행해 오는 근엄한 그리핀의 모습은 그다지 신선하지도 주의를 끌 거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그리핀의 다리를 짧은 양팔로 꼬옥 붙든 채 유유히 매달려 있는 오동통한 포포리의 모습은, 황당함을 넘어 기괴한 우스꽝스러움마저 자아내고 있었다.
가히 방금까지의 서리용의 난리가 순간 싹 잊혀질 만큼이나 넋이 빠지는 풍경이라 하겠다.
“성부 성자시여, 저건 또 대체 뭔 조합이야…….”
누군가가 성호를 그으며 내뱉은 얼빠진 속삭임이 모두의 심정을 대변했다.
벌어진 턱을 다물려 애쓰던 아이반의 눈이 루브의 넋 나간 눈과 마주쳤다.
카뮤와 에스겔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날, 서리 숲에서의 기억이 소수 정예의 머릿속에 일제히 스치고 있었다.
보아하니 서리용은 갑자기 등장한 두 구면의 등장에 인간들만큼이나 넋이 빠진 것 같았다.
그리고 뭐에 홀려서 가만히 있었든 간에 주문은 곧 풀렸다.
천천히 하강해 서리용의 바로 근처까지 다가온 두 기괴한 조합이 다짜고짜 시비를 걸기 시작한 덕이었다.
“포, 포, 포, 포!”
“……크르르르…….”
“포포포, 포, 포, 포!”
“크르르르르르…….”
“포포, 포, 포, 포포! 포, 포!”
“크와아아, 크와아아아……!”
대화를 나누는 건가 싶었다.
아마 지들끼리 뭔가에 대해 다투고 있는 것 같다. 뭔 내용인지야 신만이 아실 일이다.
서리용이 어째서 한낱 그리핀과 포포리를 간단하게 해치워 버리는 대신 말다툼을 나누는지야 모를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 틈을 타 아이반은 이스케를 구해오기 위해 슬쩍 움직였다.
물론 타이밍이 나빴다.
“크르르르……!”
아이반이 슬며시 근처에 다가오자마자 포포리와 짜증스럽게 싸우는 듯하던 서리용이 다시 시선을 홱 돌린 것이다.
그야말로 온몸을 얼어붙게 만드는 눈으로 아이반을 노려보며 내리찍은 앞발에 힘을 주었다.
헐떡거리며 포포리를 노려보고 있던 이스케가 아까보다 더 심하게 각혈했다.
아이반의 만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내 친구 내놔, 이 미친 도마뱀 새끼야!!”
“포포포포, 포, 포!”
“크르르르르, 크르르르롸아아-”
“그만해!”
야수들의 울부짖음을 찢고 갑작스럽게 들려온 외침은 가늘고 작았으나, 아주 분명하고 선연하게 귀에 꽂혔다.
적어도 막 아가리를 쩍 벌리고서 이스케를 도륙할 기세이던 서리용을 그대로 주춤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마수 새끼나 인간 놈이나 관계없이 전원이 돌아보게 만들기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