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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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몰 이후 한동안 잠적해 있던 서리용이 마곡석에 홀려 보금자리에서 빠져나와 곧바로 앙그반 궁을 향해 덮쳐왔다.

축제 거리를 덮쳤을 다른 잡것들도 잡것들이었으나, 가장 큰 문제는 최고 포식자인 서리용의 등장이 이미 정신줄 놓고 기어 나온 다른 마수들을 공포와 혼돈으로 더더욱 날뛰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대재앙급의 비상사태가 벌어졌을 때는 제아무리 날고 기는 가문의 팔라딘이라 해도 무조건 기사단장의 지시가 우선인 법이다.

그러나 숨긴 거 많고 지은 죄 많은 롱기누스 기사단 소수 정예는 현재 제멋대로 단장의 명을 어기고 있는 축제의 챔피언을 군말 없이 따르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고 있었다.

“달의 탑 쪽이다. 아이반 너는 나와 같이 가고, 너희는 그쪽 주변 전부 봉쇄하고 우리 기사단과 왕궁 근위병들 말고는 누구도 접근 못 하게 해.”

“일단 알았어. 야, 다들 이쪽으로 따라와라! 아, 근데 갈라르 이 새끼는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말도 안 되게 고분고분히 따르는 카뮤의 일갈에 함께 사방에서 날뛰는 잡마물들을 베어 넘기며 달리던, 소수 정예에 속하지 못한 롱기누스 팔라딘들과 소수 근위병은 당연히 어리둥절했다.

궁 안의 모든 성직자와 타 소속 기사들까지 전부 힘을 합쳐 총전력을 끌어모아도 모자랄 판에 이 대체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하도 황당하여 그만 단장과 국왕께서 소수 정예에게 따로 지시한 건가 싶어졌다.

“단장님이 그런 지시를 하신 거…… 우와아앗!”

소수 정예에겐 다행스럽게도 입씨름을 하고 있을 상황이 못 되었다.

서리용한테 붙어서 온 건지 그냥 미쳐서 각개 전투 중인지 알 길 없는 마수 새끼들이 사방팔방에서 튀어나와 겁도 없이 그들을 향해 돌진해 대는 통에 쉴 틈 없이 검을 휘둘러야 했다.

그 틈을 타 동료들로부터 떨어져 달의 탑 쪽으로 질주하던 아이반이 한발 앞서 질주하고 있는 이스케를 향해 고래고래 외쳤다.

“무슨 생각이야?!”

“저 도마뱀 새끼가 죽지만 않도록 두들겨 팰 생각이다, 왜.”

“역시 그거냐? 네 마누라 친구 안 죽게 하는 거? X발, 저 새끼가 우릴 알아볼지나 모르겠다고! 거기다 만약 혹시라도 네 마누라가 우릴 쫓아오면…….”

“절대 안 될 일이다만 내 마누라는 내 말은 지지리도 안 들으니 좀 전에 그렇게 말한 거다!”

과연, 타 소속 놈들의 달의 탑 일대 접근을 막으라는 말이 역시나 그런 의미였다.

만에 하나 서리용과 대치 중에 루드베키아와 관련된 비밀이 드러나게 된다면 증인들을 철저히 롱기누스 기사단과 국왕 친위대로 한해야 한다는 것.

정확히는 현 브리타냐의 가장 큰 권력이자 동맹 셋, 오메르타와 롱기누스 기사단과 왕실 외에는 몰라야 한다는 거다.

그건 아이반 또한 이해했다. 그러나…….

“단장님이 우릴 죽이실 거다.”

“누구만 손해려고.”

“네 아버지도. 전하께서도…….”

“이스케 반 오메르타!!”

말이 씨가 된다 했던가, 서리용의 포효와 맞먹을 정도의 위력을 가진 벼락이 떨어져 내린 통에 아이반은 저절로 멈칫했다.

정작 이스케는 시선도 돌리지 않고 질주를 계속할 따름이었다.

그들이 지나는 건물 위쪽, 정신없이 움직이는 기사들을 통솔하고 있던 두 사람은 한눈에 봐도 대로 그 자체였다.

롱기누스 기사단장과 오메르타 공작이 모처럼 한마음 한뜻인 낯짝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당장 멈추지 못하나?! 그 꼴로 대체 어딜 멋대로 튀어 가는 게야?! 아이반 경! 자네 당장 그놈 붙들지 못해앳?!”

“그것이, 경애하는 단장님,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습니까!”

그냥 되는 대로 소리치고 망할 친구 놈을 뒤쫓는 아이반이었다.

빛과 같은 속도로 사라져 가는 두 녀석의 행각에 오메르타 공작은 그야말로 뒷목을 붙들고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아까는 아들놈이 다짜고짜 교황의 장남을 죽이려 들길래 겨우 떼어놨더니만 며느리는 피범벅으로 쓰러져 있질 않나.

거기서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마물들이 갑자기 어쩌구 하는 마른하늘에 날벼락급 급보가 전해지질 않나.

차분히 대화해 보려 했던 발렌티노 추기경은 잠깐 눈 돌린 사이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지질 않나.

그걸 깨닫자마자 서리용이 기습해 오질 않나.

설상가상으로 이제는 통제 불능의 아들놈이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꼬라지를 한 주제에 안광을 시뻘겋게 번득이며 제멋대로 날뛰고 있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혈압이 폭발 일보 직전이라고 주장하는 형상을 하고 있던 롱기누스 기사단장이 불쑥 공작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 새삼스러운 행위에 공작은 저도 모르게 오래간만에 옛 전우의 이름을 불렀다.

“바론스 경.”

“공작, 나 보지 말고 저거 좀 보시오.”

퍽 싸가지 없는 말투였으나 공작은 순순히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졌다 싶었다.

저만치 앙그반 궁 한쪽에 드높이 솟아오른 달의 탑, 브리타냐의 자랑인 유서 깊은 탑 꼭대기가 검푸르게 출렁이는 비늘 더미에 휩싸여 있었다.

느릿하고도 불길하게 펄럭거리는 거대한 날개가 가히 사탄의 현신 그 자체였다.

뿌연 눈발이 흩날리는 가운데 소름 끼치는 황금빛 눈동자가 흉포하게 번득인다.

어르신들 말을 귓등으로 흘려 버리고 제 갈 길 간 두 팔라딘 또한 그것을 보았다.

정확히는 탑 바로 아래에서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서로 알아보기라도 한 듯, 모처럼 강림한 서리용 또한 그들 쪽을 물끄러미 굽어보았다.

여태까지 겪은 일 탓이려나, 아이반은 생뚱맞게도 머릿속에서 조금 전의 발렌티노 추기경과 저 사탄의 하수 자식을 비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러자 어째서인지 저 미쳐 날뛰는 도마뱀 새끼가 교황의 아들 새끼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고 정감 가게 느껴졌다.

그러고 나자 어째서인지 공포보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부숴 먹고 있는 탑이 얼마나 유서 깊은 국보인지 저 파충류 대가리가 알기나 하려나?

이심전심이라고 이스케 또한 비슷한 심정에 도달한 것이 틀림없었다.

잠시 묵묵히 마누라의 질 나쁜 가출 친구와 시선을 교환하던 이스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려와, 싸가지 없는 새끼야.”

“크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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