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모두 모였다
빌어먹을 체시아레의 말 그대로 에렌딜 전체가 혼이 빠질 사태.
일순 전원이 완전무결한 부동 상태가 된 가운데 누군가가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렸다.
아마 ‘설마 저거……’ 비스무리한 소리였던 것 같은데, 그다음으로 무어라 하려 했든지 간에 앞다투어 뛰어온 혼비백산한 근위병들에 의해 막혀 버렸다.
“경들, 큰일 났습니다!”
“비상사태입니다! 지금 에렌딜 곳곳에, 뿐만 아니라 서리용이 이쪽으로……!”
“롱기누스 기사단장께서 즉시 집합 명령을……!”
바깥에서부터 다급한 발소리들과 고함들, 비명과 욕설과 그 밖의 온갖 혼잡한 소음들이 뒤섞여 들려오고 있었다.
사방이 어수선하고 북적거리는 가운데 나를 붙든 손이 나를 밀치며 누군가의 팔에 떠넘겼다.
“오빠…….”
“부탁한다, 엘렌. 앤디미온, 너도 같이 남아라.”
이스케의 목소리는 조금 전의 폭주가 무색하게도 냉정하리만치 침착했다.
예 하고 외친 흑발의 종자가 다가와 내 어깨에 망토를 둘렀다.
기분 탓일까, 일련의 충격들로 인해 커다랗게 경직된 금색 눈동자가 유독 순수하게 느껴졌다.
“부인, 저는…… 저희는…….”
“어서 움직여야 합니다.”
빠르게 앤디미온의 말을 자른 엘레니아가 나를 거의 껴안다시피 한 채로 앞장섰다.
당장에라도 혼절할 지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혀가 멋대로 돌아갔다.
“이스, 안 돼요! 당신은 지금…….”
평소 같은 상태가 아니라고.
아무리 주인공이라 해도 멀쩡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동료들과 함께 빠르게 뛰쳐나가던 그가 잠깐 멈칫하며 마지막으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아주 잠깐의 순간, 그러고는 내가 채 말을 잇기도 전에 다시 고개를 돌리고 멀어져 가버렸다.
나를 붙든 손길들이 다시 나를 이끌었다.
멍하다 못해 무언가에 홀린 듯 굳어 나를 응시하는 프레이야를 본 것도 같았으나 신경 쓸 거리는 아니었다.
스쳐 지나가는 모든 이가 똑같이 넋 나간 눈빛을 하고 있었으니까.
“아베스 궁 봉쇄! 아베스 궁 봉쇄!”
“연회장을 봉쇄합니다! 전부 저희를 따라 대피실로…….”
아무리 북부 토박이들이라 해도 벌건 축제 대낮에 서리용이 궁전을 덮치는 상황에 익숙할 리가 없었다.
하물며 이번 축제에서 마물을 생전 처음 접한 외국인들이 몰려와 있는 상황이었다.
축제가 재앙의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앤디미온과 엘레니아에 의해 어린애처럼 옮겨지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의식이 제멋대로 왔다 갔다 한 것 같다.
자꾸만 빠져나가는 정신 줄을 붙들려고 애쓰는 내 귀에 대고 아득한 자장가 같은 속삭임이 끊임없이 울렸다.
“미안합니다, 루비. 정말 미안해요…….”
“……멈추…….”
“알았어야 하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대체 엘레니아가 나한테 사과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내 어깨에 두른 그녀의 손을 간신히 붙들었다.
“멈춰요, 제발 멈춰.”
내 절박함이 느껴지기라도 한 건지, 근위병들을 따라 우르르 움직이는 사람들을 뒤쫓던 움직임이 잠시 뚝 멎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눈을 세차게 깜박였다.
“놔줘요, 난…….”
“안 됩니다, 부인.”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눈치챈 듯, 앤디미온이 내 앞에 서며 단호한 몸짓으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인위적인 사태입니다, 지금 도시 곳곳에서 마곡석들의 흔적이 발견됐다 했단 말입니다. 마곡석의 부름에 홀린 마물들은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다고요, 서리용이라면 특히 더, 아무리 부인이시라 해도…….”
“나밖에 없어요, 그거 알잖아요.”
“하지만 부인……!”
“지금 대체 그게 무슨 얘깁니까?”
멍한 눈으로 우리를 번갈아 보던 엘레니아가 날카롭게 끼어들었다.
앤디미온이 주춤했다.
“그것이…….”
“엘렌, 나중에 다 설명할게요. 지금 당장은 다른 곳에 가야 해요.”
“안 됩니다. 지금 이 상태로 대체 어딜 가신다는 겁니까?”
매섭게 일그러진 붉은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어째서 그녀가 이토록 괴로워 보이는 건지는 나중에 알아낼 문제였다.
나뿐이었으니까.
이 잘 계획된 재앙에 변수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일 테니까.
“이 짓거리 꾸민 사람은 내 오빠예요.”
“예?”
“지금쯤 혼자 에렌딜을 뜨고 있겠지만, 아무튼 오빠가 한 짓이니 제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요.”
“그게 대체 루비랑 무슨 상관이…….”
“저한테 미안하다고 하셨지요. 진심이었다면 제발 지금 이스가 있는 곳에 날 데려다줘요. 보면 이해할 거예요. 전부 이해할 거예요, 엘렌.”
진짜로 부부가 되었던 그날 밤, 내 남편은 나에게 원하는 걸 말해보라고 했었다.
그때 나는 내 가출 친구들을 언급하며 그들과 함께 당신 옆에 있고 싶다고 했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을까.
그가 지금 이 순간 서리용을 어떻게 상대하려 하고 있을지 내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니…….
“부탁할게요, 엘렌. 앤디미온 경. 그가 잘못되면 난 더 살지 못할 거예요.”
아비규환이던 연회장은 어느덧 텅 비어가고 있었다.
굳은 얼굴로 나를 응시하던 엘레니아가 앤디미온과 시선을 교환했다.
고작 몇 초에 불과한 그 찰나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일단 여기서 나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