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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종료 후 아직 열기가 채 가라앉지 않은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다들 앙그반 궁으로 향했다.
이제부터 자랑스러운 브리타냐의 기상을 자랑하는 궁중 만찬회가 이어질 것이었다.
물론 그런 것 따윈 안중에도 없는 이들도 분명 존재했다. 롱기누스 기사단의 귀중한 소수 정예가 회장에 다다르자마자 가장 먼저 누굴 찾기 시작했는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없어, 온데간데없어! 둘이 같이 사라졌다고!”
“이런 X발, 혹시 중간에 따로 샌 거 아니야?!”
“나랑 갈라르가 직접 호위단에 있었잖아, 분명 궁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둘 다 있었다고!”
신경질적으로 으르렁대는 카뮤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이반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관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아직 어제 일을 모르는 나머지 일원들은 그저 어리둥절한 시선을 쏘아 보낼 뿐이었다.
“야, 대체 무슨 일이야? 뭐가 어떻게 되어가길래 종일 지랄 염병이냐고?”
“그게 X발, 아, 나 미치겠네. X발! 일단 이스케 이 새끼 지금 어디 있어? 아직 안 왔냐?”
“뭔 일인지 제대로 설명부터 하라고, 새끼들아!”
내로라하는 팔라딘들이 이러한 풍경을 연출하는 것은 평소였다면 당연히 이목을 끌 법한 일이었다.
다만 다행이랄지 불행이랄지 연회장에 속속들이 모여든 내외국인들 모두가 흥분에 가득 차 시끄러웠고, 조금 전의 경기에 대해 평론가라도 되는 듯 제각각 한마디씩 못 던지느라 안달이었던 통에 그들에게 신경을 쓰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극소수를 제외하면 말이다. 어쩌면 그게 문제일지도 몰랐다.
“공녀.”
“아이반 경.”
성난 동료들을 카뮤에게 떠넘긴 아이반이 단숨에 발걸음을 돌린 방향은 단연 엘레니아가 있는 곳이었다.
초조하게 누군가를 찾고 있던 건 이쪽 역시 마찬가지였던 듯, 즉시 대화 중이던 영애 무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돌아서는 엘레니아의 만면은 창백하기 짝이 없었다.
“역시 못 보신 겁니까?”
“경들께서도……?”
뒤쪽에서 낮은 수군거림과 함께 까르르하는 웃음이 터졌다.
아마 두 사람이 뭔가 로맨틱한 밀담을 주고받는 거라고 짐작한 모양이었다.
그리 보이는 게 무리도 아니긴 했으나 엘레니아도 아이반도 그런 것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왜 하필 이런 상황에서 둘이 동시에 그렇게……. 오빠가 알면…….”
“공녀, 공녀. 일단 진정하십시오. 퓨리아나 영애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
“네? 프리는 왜…….”
“그분도 아시잖습니까. 어쩌면 우리처럼 둘을 지켜보고 계셨을 수도 있고, 뭔가 보셨을지도 모르니까요.”
순간 묘한 정적이 스쳐 갔다.
마치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뒤늦게야 상기한 사람처럼,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아이반을 올려다보던 엘레니아가 마침내 낮게 속삭였다.
“화장실 간다고 했어요.”
프레이야 반 퓨리아나는 화장실 쪽에 있긴 있었다. 단 그녀는 혼자 있는 게 아니었고, 화장실 안이 아니라 길고 한적한 복도에 서 있었다.
“자, 로렌. 누나 부탁 들어줄 수 있지?”
그녀는 키가 컸다.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있어서 더 그랬다.
그저 의아한 눈으로 누이를 올려다보고 있던 소년이 머리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사랑하는 누이의 부탁이라면 그는 뭐든 순순히 따를 것이었다.
그게 역겨운 남부 마녀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프레이야는 기쁜 듯 활짝 미소를 짓고는 동생의 백금발에 손을 얹었다.
“곧 이스가 회장에 도착할 거야. 그가 와서 자기 부인이나 발렌티노 추기경을 찾으면, 그때 네가…….”
이어지는 말은 아주 작디작은 속삭임이었다.
물론 로렌초는 확실히 알아들었다.
곧이어 그가 몸을 돌리고 뛰어나감과 동시에 등 뒤에서 친구의 목소리가 울렸다.
“프리?”
“……엘렌. 늦어져서 미안, 무슨 일이야?”
커다랗게 뜬 보라색 눈. 의아함과 걱정이 뒤섞인 얼굴. 친숙하고 친숙한 얼굴을 마주한 채 엘레니아는 어째서인지 머뭇거렸다.
따라서 그녀의 뒤에 있던 아이반이 대신 나섰다.
“퓨리아나 영애, 혹시…….”
“챔피언, 챔피언!”
아이반의 침착한 음성은 뒤따라 울린 외침에 그대로 묻혀 버렸다.
연회장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 사람들이 환호하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아이반은 문득 전신에서 피가 싹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건 엘레니아 또한 다를 바 없었다.
벌써? 그러니까, 벌써?
대회의 최종 우승자, 축제의 챔피언은 마지막 궁중 연회에서 국왕과 함께 입장하는 것이 전통이다.
그런데 그 유서 깊은 관례가 방금 막 깨진 것이었다. 세 목격자는 그대로 돌아서서 앞다투어 달리기 시작했다.
* * *
당장에라도 폭발할 듯한 불곰 한 마리를 선두로 한 성난 전우들을 홀로 상대하는 처지에 놓인 카뮤는 이미 죽을 맛이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직 이 자리에 나타나지 말아야 할 녀석이 홀연히 눈앞에 등장한 것이 아닌가.
그것도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전투복을 갈아입지도 않은 상태로 말이다. 심지어 검까지 그대로 차고 있다.
즉시 악귀라도 본 듯한 표정이 되어버렸음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럼에도 카뮤는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마음만 그렇게 먹었다 이 얘기다.
“어어, 너, 이스, 대체 왜 벌써 여기 있는 거냐? 너 아직…….”
“내 아내 어디 있어?”
이스케의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이나 낮고 차분했으나 꼴이 꼴인 탓인지 사신의 그것처럼 음산하고 으스스했다.
카뮤뿐만 아니라 멍한 눈으로 이스케를 쏘아보던 셋까지 일제히 주춤할 정도였다.
“그게, 아마 치장이 아직…….”
“비켜.”
퍽 하고 거침없이 카뮤의 어깨를 밀친 이스케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뒤로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앤디미온이 헐레벌떡 쫓아왔으나 현재 누구 하나 그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스케, 잠깐만.”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탓일까, 바로 조금 전까지 카뮤를 사정없이 몰아붙이던 갈라르가 불쑥 나서서 고대 불곰의 현신처럼 거대한 몸집으로 이스케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뭔지 몰라도 이건 좋지 않다. 넌 아직 여기 있어서는…….”
“이스!”
때마침 아이반과 엘레니아가 나란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거의 달리다시피 하며 등장한 그들의 모습에 귀신도 때려 잡는다 알려진 소수 정예는 원인 모를 기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물론 찰나의 순간일 뿐이었다.
“오빠,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왜 벌써 여기 있어, 그것도 그 차림으로…….”
“야, 너 의기양양한 건 알겠는데 지금 네 꼴은…….”
“내 아내 어디 있어?”
기이한 울림이 깃든 착 가라앉은 목소리.
문득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드는 느낌에 엘레니아는 그만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런 그녀를 가로막고 나선 아이반이 갈라르를 지나 이스케의 어깨를 붙들었다.
“이스, 일단 진정하고 우리 얘기부터 들어봐. 어차피 지금 여기 안 계셔,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아, 좀 놔봐.”
이스케를 가로막고 선 팔라딘들이 옆으로 팩 밀쳐졌다.
심드렁한 말투와는 대조적으로, 그 갈라르조차 잠시 비틀거릴 정도로 엄청난 힘이었다.
“야, 이스케!”
압도적인 기세로 나타나 어딘가를 향해 가는 챔피언과, 그런 그를 미친 듯이 쫓는 한 무리의 풍경에 벌써부터 꽤 많은 이들이 모여 있는 연회장이 의아하게 술렁이기 시작함은 마땅한 현상이었다.
묘한 풍경이라는 사실도 사실이었으나,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챔피언이 이쪽으로 가까워질수록 어째서인지 공기가 차츰차츰 스산해지고 있었다.
“이스, 잠깐, 잠깐 멈추라고 이 미친놈아!”
“오빠……!”
등 뒤에서 매달리는 이들을 거침없이 뿌리치며 걸음을 옮기던 이스케가 나타난 것만큼이나 갑작스럽게 멈춰 선 건 그때였다.
무감한 붉은 시선이 향한 끝에는 대회랑으로 이어지는 복도 안쪽,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선 채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어물거리고 있는 백금발의 소년 종자가 있었다.
“저어, 겨, 경…….”
“…….”
“제가, 아까 부인께서 어디로 가셨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