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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 들러서 한바탕 입안을 헹구고, 보초병들뿐인 계단에 잠시 앉아 차가운 바깥 공기를 좀 쐰 뒤 다시 객석으로 돌아갔을 때, 어느덧 경기장에 선수는 두 명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언젠가 본 듀라한들처럼 괴기 기사의 모습을 한 드라우그들과 레버넌트인지 미라인지 헷갈리는 것들이 사이좋게 뒤섞여 있었다.
인간 쪽으로 말하자면 검을 뽑고 서 있던 기사, 렘브란트의 비셸리에 가문을 상징하는 장미 장식이 새겨진 갑주를 입은 기사가 은발 기사의 어깨를 손으로 툭 치고는 앞서 달려갔다.
함성이 터져 나왔다.
“좀 괜찮아?”
“당연히 괜찮지. 이다음에는 뭐가 나올지 궁금한데.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시시해.”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의외인걸. 정말로 시시했다면 벌써 넷이나 떨어져 나가진 않았겠지.”
“의외라니, 여기서 누가 죽든 말든 아무도 신경 안 쓰잖아?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죽어도 마찬가지고. 새삼 더 놀랄 것도 없잖아, 안 그래?
이 경기의 결말을 알고 있는 덕분에 약간 더 지루하긴 하지만 말이야.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
아니나 다를까, 또 예의 그 떠보는 투다.
종막까지 지루하기도 했고 또 옆에서 이 새끼가 자꾸 시시콜콜 말 걸어대는 것도 짜증 났기에 나는 차라리 그냥 이참에 눈이나 붙이는 게 어떨까 싶어졌다.
“글쎄. 근데 영 시시해서 졸리다. 시끄러워 죽겠는데도 잠이 솔솔 오네.”
“……졸리다고?”
“간밤에 잠을 설쳐서 말이야. 잘 알겠지만 난 잠도 편히 못 자는 신세라서.”
대충 쏘아붙이고는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아버렸다.
놈이 뭐라고 중얼댄 것 같은데 우레 같은 야유 소리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았다.
물론 여기서 진짜로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사방이 전쟁터가 따로 없는 와중에 잠은 무슨.
단지 체시아레 놈이 말 붙이는 걸 차단할 겸 시종일관 테러당하는 안구도 보호할 겸 그러는 척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가 정말로 밀림의 왕국을 방불케 하는 야단법석 한복판에서 까무룩 잠이 들어버릴 줄은 몰랐다고.
그것도 모처럼 아무 꿈도 꾸지 않고 푹.
“……꺄아아아아악!!”
함성이 아니라 비명.
다수가 내지르는 거의 절규에 가까운 비명에 나는 화들짝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순간 내가 어디서 뭐 하고 있는 건지 잘 인지가 되지 않았다.
눈을 빠르게 깜박임과 동시에 빠져나갔던 현실 감각이 느릿하게 정수리 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문득 고개를 돌려 옆을 쳐다보았다.
상체를 앞으로 약간 기울인 채 어딘가 한 곳을 맹렬하게 주시하고 있는 체시아레가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도 별반 다를 거 없는 모양새였다.
뭐야, 무슨 대단한 게 나왔길래 다들 이렇게 사이좋게 넋이 빠진 걸까?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을 따라 정면을, 그러니까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첫 순간 나는 웬 얼빠진 성직자 하나가 어쩌다 경기장 안으로 떨어진 건가 보다 싶었다.
땅바닥이 그새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쩍쩍 갈라져 솟아나 있고 거대한 뼈 덩어리가 굴러다니는 와중에 잘도 멍 때리고 서 있다고.
그러다 이내 깨달았다.
누더기로 좀먹은 수단을 걸치고 녹색 안광을 내뿜으며 입이 귀밑까지 찢어지라 처웃는 중인 저건 어느 덜렁대는 추기경 따위가 아니었다.
저놈은 리치였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머릿속이 싸하게 식어왔다.
리치가 나와? 이번 경기에서 리치가 나왔다고? 내 기억에 구멍이라도 뚫린 걸까?
성직자로서 결코 하지 말아야 할 자결의 죄를 저지른 자의 시신으로 저런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건 대충 알고 있었다.
어차피 구울이 되어 떠돌 혼이니까. 그러나 그런 짓을 하려면 교황청의 특별 인가가 있어야 했다.
즉, 이번 경기에 저걸 내보내는 걸 교황이 인가했다는 뜻이었고, 체시아레를 포함한 추기경단 전원뿐만 아니라 이번 경기 개최에 관여한 모두가 알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맙소사, 저걸 승인했다고? 저걸?
거대한 검은 날개가 눈앞을 스쳐 갔다.
그게 와이번이란 걸 깨닫기까지 좀 걸렸다.
와이번이 원래 검은색이었나? 아무튼 온통 검은 와이번들이 공중에서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고, 그 아래 리치 추기경의 앞에는 거대한 뼈 덩어리가 출렁대고 있었다.
아니, 단순한 뼈 덩어리가 아니었다.
마치 용의 화석 같은 형태였는데, 기괴하게도 머리 부분에서 초록빛 안광을 흉흉하게 번득이고 있었다.
그러면서 뼈다귀뿐인 앞발로 무언가를 갈라진 땅바닥에 짓누르고 있다.
무언가가 아니라 누군가를.
이 거리에서도 은빛 머릿결이 반짝이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저만치 그의 검이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왜 그 밑에서 그러고 있는 거야? 그다지 벅찬 상대도 아니잖아?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지 않아?
설마 다친 거야? 이미 저 좀비 추기경한테 당한 거야? 말도 안 돼, 넌 주인공이잖아? 아니면 전략일 뿐인가?
“캬롸아아아아아아아!”
“꺄아아아아악!”
화석 용이 마치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는 것처럼 고개를 허공에 쳐들고 포효했다.
동시에 온 사방에서 다시 한번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때 그와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는 그가 바닥에 짓눌린 상태에서 고개만 약간 돌려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온통 얼어붙은 듯 무감각하고 멍한 상태였다.
우리의 시선이 얽혀든 그 짧은 시간 동안 그저 의문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왜…… 왜 이쪽을 보는 거야?
왜 그런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거야?
그러면 너만 손해라고.
우리의 환상은 앞으로 한 시간도 안 돼서 산산조각이 날 테니까.
가끔은 네 손에서 죽는 거라면 최악의 죽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어.
왜냐하면 너는…….
“안 돼!”
대관절 무슨 변수로 인해 경기 종목이 바뀐 건지는 내 알 바 아니었다.
리치 성직자건 용 새끼건 내가 알 게 뭐냐고.
그럼에도 저절로 몸이 벌떡 일으켜 세워졌다. 무릎을 덮고 있던 가운이 발치로 떨어졌다.
모든 비명이 일시적으로 멎고 일심동체로 정적을 맞이한 그런 순간이었다.
불길한 검보랏빛으로 자글거리는 주둥이를 커다랗게 쩍 벌리고서 막 발아래를 덮치던 화석 용이 멈칫 이쪽을 돌아보았다.
“이스!”
“이스케!”
누가 내 어깨를 붙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공중을 맴돌던 검은 와이번들이 일제히 기괴한 울음을 내뿜는 소리가 선연하게 귀를 찔렀다.
내가 뭘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비명을 질렀던 것도 같다.
나를 붙들고 마구 흔들어대는 손길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대로 형편없이 주저앉았을 것이다.
“루비, 정신 차려!”
“레이디 루드베키아, 아무 일 없습니다! 정말 괜찮다고요! 자, 보십시오!”
뭐? 괜찮아? 괜찮다고?
다들 날 놀리기로 작당한 것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나는 비틀거리며 제 발로 섰다.
“자, 어서…….”
다들 이상하군. 아무래도 다 사이좋게 미친 것 같은데?
어째서 이 상황에서 정신 나간 웃음소리들이 울리는 거지?
“푸하하하! 저거 지금 대체 뭐 하는 거냐?!”
“뭔 리치 새끼가 저렇게 어벙해?! 야, 조종 똑바로 못 하냐?!”
“아, X발. 이게 뭐야, 재미없게!”
나는 어리둥절해서 시선을 들었다.
그러고는 어째서인지, 사악하게 처웃던 아까와는 영 딴판인 허둥지둥한 모습으로 팔을 아무렇게나 휘두르고 있는 망할 리치 추기경을 보게 되었다.
보아하니 화석 용 새끼와 와이번들은 이제 뭐가 잘못된 건지 자기들끼리 엉겨 붙어 뒹굴고 있었다.
이스케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어디로 갔지?
“어울리지도 않는 병약 미소년 흉내 집어치우고 빨리 끝내라!”
“롱기누스 기사단 이름에 먹칠하지 말라고, 미치광이 새끼야!”
“단장님께서 지켜보고 계신다!”
“북부의 팔라딘 최고다!”
집단 히스테리가 일어나는 와중에 나는 추기경들 무리에 에워싸이다시피 한 채로 종막을 지켜보았다.
부질없는 모양새로 이리저리 열심히 팔을 휘두르던 좀비 추기경이 이내 무슨 결단을 내린 건지, 지들끼리 살육 중인 언데드 파충류들로부터 신경을 끄고는 이미 엉망으로 금이 간 땅을 더더욱 엉망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쭉쭉 갈라진 흙과 돌덩이들이 허공으로 치솟으면서 그 틈새로 매캐한 검보랏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러다 순식간에 빠르게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것이다.
산 채로 매장시킬 작정이었나 보다. 그러나 가공할 흙먼지가 일어나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순간에 연푸른 섬광이 폭발했다.
바로 코앞의 신성한 투명 벽에 금이 쭉쭉 깜빡거리는 것이 육안으로 보였다.
신성과 신성의 충돌이라고 해야 하나? 어찌나 격한 충돌이었는지 온통 눈이 부시고 흔들려 대서 토할 지경이었다.
저 안에 휘말리면 나 같은 일반 사람은 어떻게 될지 실로 의문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시야를 멀게 하는 빛이 다 사그라들고 간신히 눈을 떴을 때, 경기장 바닥은 처음처럼 멀쩡해져 있었고 화석 용과 저주받은 와이번들의 흔적은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불쌍한 리치 추기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상황에서 정화를 쓸 줄이야. 과연 그 오메르타군요.”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추기경 중 하나가 체시아레한테 한 말 같았다. 정화라니 그건 또 무슨 신기술이래.
“우와아아아아아아!!!”
이틀에 걸친 대장정의 학살전은 그렇게 허무할 정도로 단숨에 끝이 났다.
이젠 완전히 먹먹해져 버린 귀를 찌르는 환호가 왠지 아득하게 멀리 느껴진다.
꽃들과 오색 손수건들과 색종이, 십자가와 깃발과 그 밖의 온갖 정체불명의 물건들이 쏟아져 내리는 가운데 평평한 경기장 바닥 한복판에 누워 헐떡이고 있던 은발의 기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검을 바닥에 내리꽂고 거기에 지탱해서 일어섰다. 의무관들이 한꺼번에 뛰어나왔다.
“이스케! 이스케!”
“사랑해요, 기사님!”
“북부 최고의 기사! 북부 최고의 기사!”
나는 자리에 도로 단정하게 앉았다.
그게 무슨 신호라도 됐는지 주변에 모여 있던 인간들 또한 다시 근엄한 모양새로 제자리에 착석했다.
심드렁하고 무심한 감각이 다시 몰려왔다.
변수가 좀 있는 듯 보였어도 역시나였다.
딱 정해진 대로 결말을 맞았다.
이 세계의 주인공, 이스케 반 오메르타가 또 한 번 최종 우승을 거머쥔 것이다.
어마어마한 환호와 함께.
그래, 그게 너지.
“루비 네가 좀 더 기뻐할 줄 알았는데.”
표정 관리 좀 하라는 건가.
나는 시선을 돌려 옆자리에 앉은 놈을 노려보았다. 체시아레는 뻔뻔스럽게도 지극히 평온한 낯짝을 하고 있었다.
“춤이라도 춰줘야 할까?”
“……아까는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 같았거든. 그래서 해본 소리야.”
“그딴 것들이 튀어나올 줄 상상도 못 해봤는데 당연하잖아? 리치 추기경이라니 누가 생각해 냈는지 몰라도 확실히 축제를 즐길 줄 아네. 이왕 하는 거 차라리 좀 여럿 만들어내라지 그랬어?”
“자결한 추기경 시체가 그렇게 많을 리가 없잖아? 잠적한 서리용을 대신할 만한 오락거리가 뭐가 있나 다들 고민이 많았다고.”
느긋하게 대꾸한 놈이 불쑥 나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설마 웃으라고 하는 소린가? 재미도 감동도 없었으나 나 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빠야말로 엄청 기쁜가 보네. 다들 내가 아니라 오빠가 공자비인 줄 알겠어.”
“…….”
함성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의무관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이스케가 어느덧 국왕이 앉은 특별석 아래 무릎을 꿇는 동안 내국인들이 차지한 관람석 쪽은 그야말로 터져 나갈 듯하였다.
아주 애국심들이 활활 불타오르겠구먼.
왕과 아버님 표정이 몹시 궁금해지는데. 엘레니아의 표정도.
아마 자부심으로 터져 나갈 듯하지 않으려나.
“루비. 아무 걱정 할 필요 없어.”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말씀이란 말인가. 이 새끼는 오늘 내 주의를 끌려고 아주 작정한 모양이다.
“뭐를 말이야?”
“네 남편 말이야. 그가……. 널 어쩌지 못할 거라고.”
짙은 사파이어색 눈동자가 기이한 빛으로 너울거렸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순간적으로 얼이 빠질 뻔했다.
너 진짜 머리가 돈 거 아니니? 아니 돌았다는 건 예전부터 알긴 했는데, 가면 갈수록 더더욱 신박하게 진화하는 모양이구나. 뭐가 어쩌고 어째?
그래, 뻔뻔한 거에도 정도가 있다는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비범한 작자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어제 일을 언급하다니, 어지간해선 따라 휩쓸릴 지경인걸?
누가 누굴 안심시키려 드는 거야. 마치 날 지켜줄 거란 식으로 떠들면서 저런 눈빛을 지어 보일 줄이야.
더 우습기 짝이 없는 건 그것이 말장난이나 다른 간계 따위가 아니라 진심이라는 거였다.
앞으로 내 남편이 어떻게 나오든 자신한테 책임이 있다는 생각은 아예 못 하는 걸까?
어제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아예 자각 못 하나? 세간의 눈에 우리가 어떻게 보이는지는 안중에도 없다고?
제멋대로 나한테 입을 맞춰놓고는, 제멋대로 그딴 달콤한 눈빛을 하고 있어?
하하, 네 녀석들 하나같이 진짜 재미있구나. 나랑 입 한 번 맞췄다고 눈빛까지 달라지다니, 참 단순한 생물들이 아닐 수가 없네.
“우와아아아아!”
다들 악 좀 그만 쓸 수 없는 걸까? 그것보다 함성에 섞여든 다른 소리가 내 이목을 끌어당겼다. 다름 아닌 말발굽 소리였다.
승리를 상징하는 새하얀 종마에 올라 질주하는 북부의 기사.
그의 한 손에는 그를 승리로 이끈 성검이 들려 있었고, 그 검의 끝에는 바로 눈부신 황금 장미로 엮은 화관, 최종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영광의 꽃이 매달려 있었다.
무슨 주문에라도 걸린 듯, 우레 같은 함성이 일제히 멈추고 갑작스러운 정적이 찾아온 것은 순식간이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발코니석 난간 아래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금이 쩍쩍 인 검은 판금 갑옷 차림을 하고서 승리의 안장에 앉아 핏자국이 얼룩진 만면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나의 남편이자 나의 기사를 마주 보았다.
너무도 낯익은 새빨간 눈동자 속에서 알 수 없는 고통의 태풍이 휘몰아쳤다.
어찌나 격렬한 고통이었는지 내게 전이되어 내 가슴이 아파올 지경이었다.
왜, 왜 그런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거야?
왜 또 그렇게 힘든 표정이야? 뭐가 그렇게 괴로워?
역시 알아버린 거니?
이미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거 맞지? 오늘 종일, 어쩌면 어제부터 내내?
이젠 더는 내가 황홀해 보이지 않겠구나, 그렇지?
공주인 줄 알았는데 마녀를 발견한 기분은 어때? 이대로 날 베어버리고 싶어? 그냥 여기서 전부 끝장내 버리고 싶어?
너만큼은 그럴 자격 있어. 그러니 네 마음 가는 대로 해도 좋아.
그런 마음을 담아 나는 있는 힘껏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약하지만 확실하게.
환각이라도 인 것인지, 얼핏 그 또한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였다. 우습게도 세상없이 쓰라리면서 달콤해 보이는 미소였다.
착각에 불과한 거라고 생각했다. 늘 그랬듯 단지 내 망상일 뿐이라고.
하지만 그가 검을 움직인 순간 내 발치에 떨어진 꽃은 절대 망상의 산물이 아니었다.
멍하게 응시하던 것도 잠시, 홀린 듯 허리를 굽혀 주워 들었다.
황금 장미와 오색 보석으로 엮은 화관이 내 보잘것없는 손 사이에서 찬란한 빛을 발했다.
검집에 검을 꽂는 소리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소리 없는 의문이 입안에서 끊임없이 맴돌았다. 왜?
도대체 왜?
시선을 다시 들어 올리고, 본 적 없는 아름다운 붉은 시선과 다시 마주한 그 순간에 내 안에 있는 작은 무언가가 부서져 녹아내렸다.
그랬다. 깨달아 버린 것이다. 그제야 깨닫고 말았다.
살아 숨 쉬는 동안 단 한 번도 기대하지 않았던, 아니, 기대할 수 없었던 그것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는 걸.
어떤 사람은 평생을 찾아 헤매기도 하는 바로 그것, 역사와 시대를 막론하고 영영 변치 않기를 염원하며 노래하는 그것 말이다.
진부하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이름의 그것.
어떻게 그래, 다 알고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고 외쳐봤자 우스운 기만일 뿐이었다.
돌아오는 메아리는 그게 바로 그것이라고 외칠 뿐이니까.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뭐 얼마나 더 거창한 걸 기대했느냐고 말이다.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뭐가 내 눈을 가렸던 걸까?
악단이 연주하는 승리의 음악이 돔형 경기장 안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다시 환호하고 있었다.
내 뺨에서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기쁨의 눈물인지 안도의 눈물인지 자책의 눈물인지 혹은 그 전부인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눈물 많기로 유명한 이미지라 망정이었다.
그가 주저하며 나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싶었다. 그 넓은 어깨에 매달리고 싶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나를 지켜주고 나로 하여금 스스로를 다르게 느끼도록 해주었던 그 강한 팔에 다시 한번 안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아직은 그럴 수 없었다.
아직 처리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었다.
난 지독하게도 이기적인 여자이니까 말이다.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과분한 것을 얻은 와중에도 그걸 이용해 나 살길을 생각해 내는 지독한 영혼이니까 말이다.
있잖아, 이스케. 난 애초에 저주받아 마땅한 여자였어.
난 틀림없이 지옥에 떨어질 거야.
하지만 살아 있는 시간 동안 네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어.
난생처음으로 가지고 싶은 게 생겨 버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