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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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대기실의 나무 벽을 뚫고 들어오는 메아리는 어쩐지 노움들이 꿍얼대는 소리와 비슷하게 들렸다.

그렇다고 해서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옆방에서 어느 과도하게 흥분해 버린 후보 하나가 5분 간격으로 패기 넘치게 내지르는 포효에 비하면 속삭임에 가까운 수준이다.

“경, 저 함성 들리십니까? 어제보다 더 어마어마한 것 같은걸요. 다들 엄청 흥분했나 봅니다.”

이스케는 관람석에 앉아 야수처럼 울부짖는 군중들이 흥분했든 말든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개중 그가 궁금한 이는 단 하나뿐이었다. 어서 전부 끝내 버리고 달려가 끌어안고 싶은 마음뿐이다.

“앤디미온, 쫑알거리지 좀 말고 그거나 깨끗이 닦아라.”

“앗, 혹시 긴장되십니까?”

저 새끼가 언제부터 이렇게 말을 안 쳐들었지.

그런 생각을 허공으로 날려 보내며 이스케는 깨끗이 턴 손수건을 다시 검 손잡이 부근에 꽉꽉 묶었다.

그러는 동안 앤디미온은 검은 투구를 벅벅 닦으면서 멈추지 않고 해맑게 쫑알거렸다.

“제가 장담컨대 오늘 아무렇지도 않게 우승하실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 제가 기사 서임을 하고 나면 반드시 이 대회에 참가해서 경의 명예를 이어받겠습니다.”

“……너 왜 여기 있냐?”

“예? 그야 경의 종자로서 종막까지 충실히 보필해 드려야 하니까……. 혹시 제가 뭐 잘못했습니까?”

“갑자기 네 존재 자체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 너무하십니다, 경. 부인 못 만나서 짜증 난 거 그런 식으로 화풀이하지 말아주십시오.”

참으로 시건방진 대꾸였으나 이스케는 화를 내는 대신에 잠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저 새끼가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능글맞아졌는가.

“사춘기라도 왔나.”

“……아니요. 죄송합니다. 그냥 부러워져서 그런 겁니다.”

“부러워?”

“그러니까 오늘 경이 우승하시고 나면 공자비께서 환하게 웃으며 기뻐해 주실 거 아닙니까? 그런데 제가 나중에 경의 명예를 잇는 순간 그래 줄 사람을 그때까지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전 솔직히 영애들이랑 어떻게 대화해야 할지도 어려워서…….”

하고 대뜸 진지하게 한숨을 푹 내쉬는 앤디미온이었다.

물론 이스케는 자신의 종자의 연애 고민에 귀를 기울여 줄 마음 따위 눈곱만큼도 없었다.

다행히 때마침 노크 소리가 울렸다.

“이스케 경, 방문입니다.”

절로 귀가 쫑긋해질 법한 소식이었다.

경기 시작을 코앞에 두고 방문이라니, 설마 그녀가 그런 깜찍한 짓을……?

“오호라, 공자비이신가 봅니다!”

설상가상으로 종자 놈까지 바람을 팔랑팔랑 넣는 바람에 내색은 안 해도 내심 들뜬 기분으로 냉큼 대기실을 나선 이스케는, 그러나 이내 몹시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이스.”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앉아 있다 반갑게 몸을 일으키는 금발의 영애는 그가 기대했던 금발 미녀가 아니었던 탓이다.

“이스, 잠깐만……!”

그다지 유쾌한 대화가 오갈 것 같지도 않아 곧장 그대로 돌아서는 그를 프레이야가 황급히 붙들었다.

문자 그대로 팔을 붙들며 매달리는 통에 이스케는 이미 짜증이 난 상태에서 더더욱 짜증이 났다.

“이거 놔라.”

“네가 나 오해하고 있는 거 알아. 하지만 지금 너한테 할 아주 중요한 얘기가…….”

“들을 마음 없어.”

“네 부인에 관한 거야! 발렌티노 추기경하고.”

부인에 대한 언급에 그제야 제동이 걸린 듯, 이스케는 그대로 멈춰 서서 프레이야의 얼굴을 빤히 노려보았다.

프레이야는 밭은 한숨을 내뱉고는 마른침을 꿀꺽 넘겼다.

“도저히 믿기지 않겠지만…… 네가 알아야 할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어. 여태 속고 있었던 거라고.”

“갑자기 살기 지루해졌냐……?”

“이스, 내가…….”

“살기 싫어진 거냐고 물었어.”

차게 가라앉은 핏빛 눈동자가 섬뜩하게 요동을 쳤다.

절로 공포가 밀려왔으나 프레이야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이간질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나뿐만이 아니야. 네 친구들하고 네 동생까지 직접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내 말 못 믿겠으면 걔들한테 확인해 봐도 좋아!”

이스케는 그것들이 허구한 날 두 눈으로 뭘 보고 자시고 했는지 눈곱만큼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루드베키아에 관한 것만 빼면.

만일 루드베키아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분명 그들이 직접 와서 전했을 것이었다. 확인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키스하고 있었어!”

그대로 다시 돌아서는 그의 등에 대고 프레이야의 간절한 외침이 울렸다.

어찌나 애타는 목소리였는지, 순간 잘못 들었다 생각했다.

“뭐……?”

“네가 만들어준 그 정원에서 둘이 입을 맞추고 있었다고. 가족끼리 하는 그런 식이 아니었어.”

보라색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반면에 붉은 눈은 얼어붙었다. 거의 살기에 가까운 냉기를 두른 채 얼어붙은 불꽃처럼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다시 한번 떠들어봐. 뭐라고……?”

마침내 울린 으르렁거림은 다그침보다는 경고에 가까웠다.

당장에라도 그녀의 목을 틀어쥘 기세였다.

믿기지가 않는 것이다. 물론 믿기지 않으리라.

프레이야는 파르르 떨리는 손을 기도하듯 꼭 맞잡았다.

“나도 도저히 믿기지 않아. 엘렌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그 모든 소문이 사실이었어, 이스.”

“…….”

“넌 속고 있었던 거야. 너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아아, 이를 어쩌면 좋아. 이를 어쩌면 좋니…….”

정적이 스쳐 갔다.

길고도 살얼음판 같은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이스케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듯 꼼짝도 하지 않고 프레이야를 응시하기만 했다.

그녀가 다시 입을 벌리려는 찰나 요란하게 울리는 힘찬 종소리가 아슬아슬한 고요를 산산조각 냈다.

“5분 남았습니다! 선수들은 모두 홀로 집합하십시오!”

잔뜩 흥분한 장정들이 복도로 뛰쳐나오는 소리에 순식간에 사방이 시끄러워졌다.

곧바로 발걸음을 돌려 그 소란에 합세하려던 이스케는 다시 한번 멈칫하고 말았다.

“가지 마!”

“……놔.”

등 뒤에서 그를 와락 껴안고 매달린 프레이야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녀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울먹이는 투로 속삭였다.

“그냥 기권해, 이스. 제발 부탁이야. 네가 잘못될까 봐 너무 불안해. 그 작자들이 무슨 장난을 쳐놨을지 모르는데…….”

그 어떤 냉혈한이라도 얼어붙은 가슴이 녹아내릴 법한 간절한 울림이었다.

그러나 이스케는 제 허리에 두른 프레이야의 팔을 세차게 뿌리치고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멀어져 가는 그의 등에 대고 프레이야가 마지막으로 외쳤다.

“제발 눈을 떠, 이스! 그 여잔 처음부터 널 농락한 거야, 네가 죽든 말든 아무 관심도 없을 거라고!”

이스케는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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