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공용 화장실은 텅 비어 있었다.
사실상 딱히 볼일이 없었기에 나는 세면대로 다가가 물을 틀고 엄한 손을 벅벅 씻기 시작했다.
으음, 살이 더 빠진 걸까? 손가락이 더 가늘어진 것 같기도 한데. 반지가 원래 이렇게 헐렁했나?
“참 대단하시네요.”
깜짝이야. 나는 화들짝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냥 다시 손 씻는 데에 집중했다.
에이, 뭐야. 프레이야잖아. 이건 너무 뻔해서 재미도 반전도 없군그래.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그리 뻔뻔하실 수가 있는지 감탄스러울 정도예요.”
난 네가 더 감탄스럽단다.
어떻게 그렇게 꼬박꼬박 남들이 잠깐 없는 틈을 타서 나와 단둘이 밀회할 기회를 찾는 거니?
그 정성이면 왕비가 뭐야, 진작 왕국이라도 세웠겠다.
“설마설마해 왔는데 진짜로 사실일 줄이야……. 부끄럽지도 않으신가요?”
“…….”
“듣고 있기나 해요?”
“음? 방금 나한테 말한 건가요?”
“하. 기가 막혀 죽겠네요, 정말.”
“저런, 딸꾹질을 하면 좀 도움 될 거에요.”
프레이야는 잠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나는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서 꼼꼼하게 들여다보았다. 딱히 늘어나거나 한 것 같진 않은데. 늘어나기도 불가능하지만, 역시 손가락 살이 빠진 걸까?
“……역시나.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군요. 이게 본모습인가요, 사랑스러운 공자비님?”
“내 신분을 제대로 알고 계셨군요. 하도 설치길래 그런 것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뭐라고요?”
기가 막혀서 죽겠다더니 청력에 문제라도 왔나?
나는 반지를 다시 끼면서 멀뚱히 눈을 힐끔 돌렸다.
“반역하겠다고 떠들어대길래. 대놓고 그러는 사람이 있는 게 신기해서요.”
“반역이라니 내가 언제…….”
“왕비 될 거라고 야단법석 떨지 않았어요? 야망이 참 크시던데요.”
나를 빤히 노려보는 프레이야의 표정은 굳이 표현하자면 가관이었다.
밀랍처럼 창백한 얼굴과 차게 얼어붙은 보라색 눈동자의 조합이 퍽 위압적이라 하겠다.
그러다 이내 그녀답게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치켜세웠다.
“가엾은 이스. 그가 당신 실체를 알고 나면 어떻게 될지 참 궁금하네요.”
“그쪽이 궁금해할 일은 아닐 텐데. 주제 파악 못 하는 건 여전하군요.”
“주제 파악 못 하는 건 부인이실 텐데요. 북부 전체를 모욕한 셈이라는 자각은 하고 계시는 건가요?”
“아, 제발 낄 데 안 낄 데 구분 못 하고 설치지 좀 마요. 기껏 후작가 여식 주제에 북부가 무슨 지 거라도 되는 것처럼 떠드네. 멍청해다 해야 할지 불쌍하다 해야 할지 원.”
“뭐, 뭐라고요?”
하얗고 창백한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물들었다.
실로 감상해 줄 법한 보기 드문 풍경이었으나 그런 기분은 영 나지 않은 고로 나는 젖은 손의 물기가 사방에 튀도록 탈탈 털고는 손수건으로 마무리하는 데 집중했다.
사시나무처럼 파들파들 떨어대는 프레이야가 다시 뭐라고 운을 떼는 찰나였다.
“……프리,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불쑥 등장하신 우리의 엘레니아가 화장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한 말이었다.
분위기가 퍽 심상치 않아서 순간 내게 하는 소릴 줄 알았다.
이건 또 뭐야, 둘이 싸우기라도 했나? 뭐, 내 알 바 아니지만.
“프리?”
“……화장실 온 것뿐이야.”
오호라. 곧장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칠 줄 알았거늘, 웬일인지 프레이야는 마치 변명하는 듯한 투로 얼버무리고는 후다닥 화장실을 나섰다.
그러는 동안 나는 손수건을 다시 잘 접어서 품 안에 넣고는 몸을 돌려 문 옆에 조용히 서 있는 엘레니아를 지나쳐 갔다.
“……루비, 괜찮으십니까?”
이런 비아냥이라면 좀 신박한데. 실로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생뚱맞은 질문이 아닐 수 없으나 굳이 저의를 알고 싶진 않다.
잠깐 멈칫하고 멀뚱히 돌아보자 무표정한 붉은 눈이 빠르게 깜박거렸다.
“제가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겠어요?”
엘레니아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답지 않게 뭔가 말할 듯 말 듯 입술만 달싹거렸다.
무슨 대화가 오갈지야 뻔했다. 조금 전의 2차전이겠지.
내가 비난을 듣는 거야 어떻게 보면 당연했으나 상대가 시끄러운 프레이야라 장단 좀 맞춰준 것뿐이었다.
엘레니아랑도 그러고 싶은 기분은 안 났기에 그대로 걸음을 옮겨 그곳을 나왔다.
* * *
“있잖냐, 갈라르.”
“왜 그러냐, 아이반?”
“넌 공자비가 여기서 신성 장막을 뚫고 뛰어내리는 일이 가능하다고 보냐?”
순간 잘못 들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갈라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간밤에 대체 뭔 짓을 한 건지 다크 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동료 놈의 낯짝을 퍽 기분 나쁠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따라서 아이반은 당연히 발끈했다.
“X발, 가능하다고 보냐고?”
“술이 덜 깬 모양이다. 뛰어내리긴 네가 뛰어내려야 할 것 같은데. 도와주랴?”
“아오, 이 도움 안 되는 곰탱이 새끼가 왜 갑자기 시비 걸고 지랄이야!”
“……이 녀석 오늘 왜 이러냐?”
갈라르의 차분한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루브도 에스겔도 다들 어리둥절하게 머리를 가로저을 뿐이다.
어째 아이반과 비슷한 푸석한 낯짝으로 허공만 노려보고 있는 카뮤를 제외하고 말이다.
하여 갈라르는 검붉은 눈썹을 실로 오싹하게 꿈틀거렸다.
“카뮤. 아이반. 우리한테 감추고 있는 게 대체 뭐냐?”
“……뭐? 뭔 소리야, 인마. 우리가 뭘 감춘다고 다짜고짜 난리야?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네놈이야말로 뭐 숨기고 있나 보지!”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버럭 반응하는 카뮤의 모습은 누가 봐도 수상쩍음을 넘어 정신 상태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아이반으로 말하자면 이제 어울리지도 않는 한숨을 연달아 푹푹 내쉬며 한 곳을 응시하는 중이다.
갈라르는 그 시선을 따라 눈길을 돌렸다.
“네 질문의 요는, 만에 하나 이스케가 경기 중 다칠 경우 공자비께서 그만 평정을 잃고 돌발 행동을 보이실까 걱정된다, 뭐 이런 거냐……?”
“……미친, 그딴 거 아니거든.”
“그럼 대체 뭘 걱정하는 거냐? 오늘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시던데. 오히려 어제보다 더 태연하신 것 같다.”
바로 그게 문제라고.
말을 삼키며 아이반은 잠시 카뮤와 복잡한 시선을 교환했다.
밤새 둘이 머리를 부여잡고 나름 고민한 결과, 일단 갈라르 등과 상의하기 전에 먼저 루드베키아와 얘기를 해보기로 계획했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찾아갔는데 글쎄 초췌한 얼굴의 엘레니아가 그들을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스러워하는 그들에게 엘레니아는 어떤 객관적인 정보를 전하는 듯한 담담한 어조로 간밤의 소동에 대해 털어놓았다.
오메르타 가문은 이미 한 번 안주인의 비극적인 최후를 겪었다.
그런 일이 또다시 일어난다면 다들 어떻게 될지 아이반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머리가 터질 것같이 아파옴과 동시에 살기에 가까운 분노가 치솟았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뛰쳐나가 저기 뻔뻔한 낯짝으로 앉아 있는 보르히아 놈을 단칼에 죽여 버리고 싶었다.
쭉 지켜보고 있자니 아닌 게 아니라 오늘 루드베키아의 분위기는 정말로 이상한 것 같긴 했다.
그녀답지 않다고 해야 할지 사람이 갑자기 바뀐 것 같다고 해야 할지.
그들이 아는 루드베키아의 평소 모습과 어제의 난장판 등을 감안했을 때 의외를 넘어 낯설디낯선 느낌이었다.
아까 짧게라도 얘기를 해볼 작정으로 다가가 보았는데 전혀 본 적 없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이었다.
솔직히 아이반은 루드베키아가 자신을 보자마자 파랗게 질리거나 잔뜩 주눅이 들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 텅 빈 듯 무미건조한 얼굴이라니.
기가 막힌다기보다는 당혹감이, 당혹감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가버릴 것 같은 얼굴. 아무런 미련도 감정도 없어 보이는 그런 얼굴이었다.
설마 정말로……
젠장. 누가 부부 아니랄까 봐 쌍으로 사람 피를 말려.
아이반은 그만 양손으로 머리를 싸쥐었다. 이제 자신들이 이스케 쪽을 더 걱정해야 할지 루드베키아 쪽을 더 걱정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어졌다. 우스운 노릇이었으나 어쨌든 그랬다.
당장 뭔가 행동을 취하고 싶어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야말로 엿 같은 일, 경기가 끝날 때까지 전부 손 놓고 초조하게 기다려야만 하는 엿 같은 처지인 것이다.
대체 어떤 할 일 없는 새끼가 이딴 대회를 창조한 건지 두고두고 지옥에서 썩었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