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136)

Chapter 7 종말의 꽃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여기저기서 흩날리는 색종이들.

오늘의 후보들을 응원하는 깃발들.

우레와 같은 함성과 더불어 돔형 경기장을 가득 채운 인파.

모두 어제와 그다지 다를 바 없는 풍경이다.

머리가 아팠다. 어제 너무 자서 그런가.

기이한 꿈을 꾼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잘 안 난다. 욱신거리는 눈가를 문지르고 정신을 차리려 애써보았다.

“저기…….”

가만있자, 이건 또 뭐지?

난 분명 오메르타 소속 호위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는 중이었던 것 같은데, 어째서 아이반 경이 내 옆에 와 있는 거지?

지금쯤이면 날 뭐 보듯 보며 접근조차 꺼릴 거라 생각했는데.

죄스럽고 주눅 든 모습으로 임해야 할까 싶었으나 솔직히 그러기도 귀찮았다.

별안간 무슨 마법이라도 벌어졌는지, 그냥 계속해서 무감하고 무감한 느낌이었다.

마치 내가 내가 아니라 그냥 어떤 비극 속의 등장인물을 구경 중인 것처럼.

그리고 이것이 방어 기제인가 뭔가 하는 정신학적인 문제이든 아니든, 나는 지금의 내 상태가 오히려 기꺼웠다.

하여 무슨 꿍꿍인가 하고 그저 빤히 쳐다보고 있자니 아이반 경은 뭔가 더 말할 듯 말 듯 괴상망측한 낯으로 머리만 벅벅 긁적거렸다.

어제 일만 아니었다면 그저 안절부절못해 보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닙니다.”

반어법인가? 모르겠다. 생각하기도 지치는구나. 어느 쪽이든 무슨 상관이람.

남들이 나한테 무슨 감정을 품고 뭔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려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이상한 날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시작부터 참 이상한 날이었다. 아니, 다들 이상했다. 사이좋게 뭘 작당한 건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일단 오늘 아침 나는 엘레니아의 처소에 잠들어 있는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충격적인 하루를 시작했다.

처소 주변에 쫙 깔린 호위 기사들도 그렇고 아무래도 작정하고 날 감시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짐작이야 했으니 딱히 신경 쓰이지도 않았지만 엘레니아가 자꾸만 내 주변에서 기웃대는 것이 의아했다.

아예 근처에도 오기 싫어할 줄 알았는데.

그러다가 마침내 기껏 한다는 소리가 오늘 경기 관람은 자기네랑 합석하는 게 어떠냐는 거였다.

물론 아니 될 소리였다.

너네랑 프레이야랑요? 차라리 죽으라고 저주해 줘요, 엘렌.

그것도 모자라서 방금 전에는 아이반 경이 날 에스코트하려 들지 않나, 말을 다 거시질 않나, 날 감시하면서 내가 얼마나 뻔뻔한지 시험할 작정이 분명해 보였다.

아까 아침부터 찾아와서 엘레니아랑 숙덕댄 것 같던데 그게 그 얘기였을까?

그런데 어째서 다들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까?

물론 꿍꿍이가 뭐든 간에 내가 그들을 딱히 탓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 입장에선 그럴 만도 하니까.

하지만 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나를 내칠 수 없다는 거 알고 있어.

그렇지요, 친애하는 소수 정예 여러분? 우린 비밀을 공유했던 사이니까 말이죠.

그러고 보니 방금 아이반 경이 하려던 말이 그것에 관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어제 목격한 것도 있으니까, 내가 알고 보니 여태까지의 이미지와는 달리 실은 제일 막장인 종자라는 판단이 섰을 것이고, 그래서 친정과 손잡고 능히 북부를 엿 맥일 수도 있겠다 싶어져 갑자기 겁들이 나신 걸지도.

어쩌면 곧 시작될 경기에 내가 뭔가 수작을 부릴까 겁이 난 걸지도 모르고.

이야, 하하하. 오해는 질리고 질렸지만 이런 오해는 좀 쓸 만한 것 같은데. 이제부터 공포의 화신이 되어주면 되려나?

“……날이 건조하다. 뭐 좀 마셔.”

너도 참…… 철면피라 해야 할까, 대단하다 해야 할까. 그 짓거릴 하고 나서 오늘 보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기껏 그거냐?

나는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체시아레를 잠시 물끄러미 응시했다.

검푸른 머리카락과 짙푸른 눈동자. 구릿빛으로 그을린 얼굴.

지겹도록 잘 안다고 생각했던 낯짝이거늘, 새삼 생판 낯선 놈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참으로 별스럽게도, 내가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도 놈은 꼿꼿이 정면만 보고 있어서 더 그랬다.

이것 보게. 설마 지금 내 시선 피하는 거야? 언제부터 그런 바람직한 버릇이 싹텄대?

“난 여기 기후에 적응한 지 오래라서.”

하도 별스러워서 툭 던져보았으나, 놀랍게도 체시아레는 여전히 꼿꼿이 새삼스러운 태도를 유지할 뿐이었다.

냉큼 노려보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에라, 뭐 다들 알아서 멋대로 하라지. 내가 알 게 뭐야. 어차피 원래 항상 지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하잖아.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 가는 거야……?”

“화장실.”

짧게 대답하고 몸을 돌렸다.

발코니석 안쪽에 달린 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동안 등 뒤에 달라붙는 시선이 느껴졌다.

진짜 웃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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