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작은 촛대 하나만 켜놓은 책상 위에는 텅 빈 렘브란트산 술병들이 제멋대로 늘어져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달달하니 참 입맛에 맞긴 했으나 취기는 영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북부의 취향과는 맞지 않는 선물이었지만 이미 받은 걸 어쩌나, 다른 마실 놈도 없고 하니 혼자 해치워 버리는 수밖에.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며 오메르타 공작은 기품 있게 입을 열었다.
“아직 안 잤느냐?”
감색 가운 자락을 여미며 복도를 지나던 엘레니아가 멈칫하며 돌아보았다.
불 꺼진 심야의 어둑한 공기 속에서 두 쌍의 무심한 붉은 시선이 충돌했다.
“……아버지야말로 이 시간까지 혼자 뭐 하십니까?”
“보면 모르느냐. 술 마시고 있다.”
“취하셨습니까.”
“글쎄다, 조금 전에 말도 안 되는 풍경을 본 걸 감안하면 좀 취한 것 같기도 하구나.”
“말도 안 되는 풍경이라니요?”
“내 딸이 내 며느리를 둘러업고 살금살금 지나가는 풍경 말이다. 둘이서 소꿉놀이라도 한 게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엘레니아는 그다지 당황한 기색도 없이 사뿐사뿐 부친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즉시 화제를 돌렸다.
“내일 경기를 염려하시는 모양입니다. 오빠가 걱정되십니까?”
“내가 그 싸가지 없는 놈을 왜 걱정하느냐. 며늘아기 쪽은 좀 걱정된다만.”
며늘아기라. 답지 않게 어울리지도 않는 별 낯간지러운 단어를 갖다 붙이는 이유야 명확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고 묻는 것이다.
“별일 아닙니다. 오늘 좀 과하게 마셨던 모양입니다.”
“몸이 안 좋다고 일찍 물러나서 말이냐?”
“언제부터 그리 신경을 쓰셨습니까?”
할 말을 잃은 모양인지 뭔지 공작은 다시 묵묵히 술잔을 기울였다.
엘레니아는 잠깐 망설였다가 느릿하게 운을 떼었다.
“저도 한 잔 주십시오.”
이거야말로 뜻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공작은 ‘네가 웬일이냐’며 기겁하는 대신에 묵묵히 우아하게 빈 고블릿을 꺼냄으로써 마찬가지로 뜻밖의 태도로 임했다.
“그다지 맛이 좋진 않군요.”
“기분 탓이다.”
“비셸리에 공작과 죽이 꽤 잘 맞으셨나 봅니다.”
“왜 그리 생각하는 게냐?”
“그래 보여서 말입니다. 보르히아산 와인은 없는 겁니까?”
“대놓고 비아냥대는 걸 보아하니 내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담담한 어조 끝에 쓰라린 무언가가 묻어났다.
어머니를 떠올리시는 모양인가. 그런 생각을 삼키며 엘레니아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런 거 없습니다. 아버지야말로 제게 하실 말씀 없습니까? 가령 도리아스와 관련된 거라든가.”
“네가 그 입 냄새 역겨운 대사 양반한테서 나름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야 모를 일이다만, 이 애비는 도리아스가 싫다.”
“갑자기 어째서입니까?”
“자기들만 고고한 척하지 않느냐. 어차피 우리 모두 전부 똑같은 인간군상들인데 말이다.”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의외로군요. 언제부터 그리 범인류적이 되셨습니까?”
“나도 모르겠구나. 요즘 나이가 드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정말 무슨 일인지 말 안 해줄 작정이냐?”
“별일 아니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그야 그렇다만, 네가 이만큼 울상을 하고서 나한테 온 것이 하도 오랜만이라 신기해서 그런다.”
울상이라니. 역시 취하신 건가. 그야말로 어이가 없었으나 엘레니아는 그냥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오늘 하루 이 이상의 소동은 사양이었다. 어차피…….
“어차피 애초에 관심도 없으셨잖습니까, 아버지의 며느리가 어떤 사람인지.”
“불공평한 말이지만 그냥 넘어가마. 이젠 아니라고 변명하면 받아들일 테냐?”
“또 갑자기 어째서 이젠 아닙니까?”
“그 아이가 아니었다면 내 언젠가 너를 떠나보내 그 아이와 같은 꼴을 겪게 만드는 실수를 저질렀을 테니. 무엇보다 네 오라비가 그 아이를 사랑하지 않느냐.”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시큰둥한 투였다.
엘레니아는 반쯤 벌어진 턱을 가까스로 닫았다. 갑자기 속이 갑갑해져 왔다. 이유야 역시, 또 모를 일이었다.
“정말로 오빠가 루비를 사랑하는 겁니까? 그러니까, 만약 무슨 일이 생겨도…….”
불쑥 튀어나온 질문은 제 귀로 듣기에도 뜬금없었다.
별안간 왜 혀가 멋대로 돌아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마 무의식적으로 다른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나 보다.
나지막하게 고블릿을 내려놓는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렸다.
아버지, 사실은요, 그녀가 죽어버릴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러면 우리 중 누가 그녀를 죽인 건지 영영 알 수 없을 거 같아요……. 참 우습죠, 피해는 이쪽이 봤다고 생각했었는데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지그시 딸을 응시하던 공작이 이내 몸을 기울여 빈 고블릿에 술을 따라주었다.
졸졸 흐르는 연푸른 액체가 누군가의 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몹시 걱정스러워 보이는구나. 대관절 무슨 세기의 비밀이라도 알아낸 건지 도통 말을 안 해주니 나도 내 할 말만 하마.”
“…….”
“남자가 한번 마음을 정하고 나면 그녀가 얼마나 만신창이이든 개의치 않게 마련이다. 잡음이 인다 한들 결국에는 틀림없이 전부 안고 가려 들 거다. 이해했느냐? 네가 걱정해야 할 건 그녀 쪽이라는 뜻이다.”
“그녀 쪽이요……?”
“그다음부터는 그녀의 마음에 달린 일이니. 그녀 쪽에서 영영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아무리 결연한 놈이라도 더는 할 수 있는 노릇이 없으니 말이다.”
침묵이 내렸다.
느릿하게 술병을 내려놓은 공작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나와 네 어미가 그랬듯이.”